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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여전히 우리의 갑(甲)인가?

category 칼럼/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2017. 1. 17. 15:47

중국은 여전히 우리의 갑(甲)인가?

  • 한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이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시작으로 위안부 소녀상 설치, 중국의 사드 배치 이슈로 국내외로 불거진 위협이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요즘 들어 더욱 절실한 국가 리더십,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2017년 정유(丁酉)년은 우리 역사에 격동의 한해가 될 공산이 크다. 최순실 국정농단이라는 미증유의 부정부패 사건으로 나라는 온통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특검과 헌법재판소에 피의자로 이름을 올리는 불명예를 안았다. 국가 리더십이 사라진 이 와중에 연초부터 중국은 미국의 한반도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놓고 “중국과 미국 어느 한편에 붙으라.”고 협박을 가하고 있다. 내정간섭인 동시에 국가 자존심을 깡그리 짓밟아놓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소녀상

 

일본은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를 놓고 연일 한국 흠집내기에 나섰다.  중국이 계속해서 사드 배치를 놓고 전면공세를 취할 때 새로운 미국 지도자가 한반도 전략과 전술을 어떻게 바꿀지는 아무도 모른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ICBM을 올해 안으로 개발, 미국 본토를 위협하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마침 이때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중국 베이징을 방문, 사드 배치와 관련한 중국측의 입장을 듣고 왔다. 국가 안보를 다른 나라와 상의한다는 자체가 사대주의(事大主義) 발상이다. 이러한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존재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의 주장대로 사드배치가 무산된다면(민주당 대선주자는 사드배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이미 밝혔다.) 미국이 더 이상 한미동맹을 유지해야할 이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출처-조선닷컴

 

출처-조선닷컴

 

 새해벽두부터 한반도에 밀어닥친 중국의 거친 공세는 미국의 대한민국 안보정책 기류변화 및 일본의 소녀상 문제와 함께 삼각파도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다. 

 

 1597년 정유년에 조선땅에서는 일본의 재침공으로 정유재란이 일어났고 국토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던 시산혈해(屍山血海) 참극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해 9월 16일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치러야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필사즉생(必死卽生)’을 주문했다. 이 ‘필사즉생(必死卽生)’은 국난 극복을 위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정신일 것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순신 친필. 출처-현충원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순신 친필. 출처-현충원

 

 사드와 관련, 중국 고위층의 태도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자신들의 속국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그것은 정유재란 다음해인 무술년인 1598년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의 갑질로 이순신 장군이 당했던 수많은 수모를 떠올린다.

 

 지금 중국은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과의 공식 외교채널을 차단했다. 그러면서 일단의 민주당의원 7명에게는 환대를 베풀었다. 중국 외교부 왕이(王毅)부장 등은 스스로 찾아온 민주당의원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펼치면서 “사드배치를 반대한다.”는 강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미 중국은 한한령(限韓令 한류 스타나 한국 드라마, 영화 등 제한령) 등 ‘사드 보복’ 조치를 보이고 있다. 나아가 한국 화장품 불매운동도 벌이겠다고 호언하고 나섰다. 대한민국이 말을 안 들으면 경제보복조치를 취하겠다는 경제 선포나 다름없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사드 배치는 심각한 한중관계 대립을 초래할 것.”이라며 “한국정부가 미국의 무모한 앞잡이가 되려 한다.”고 밝혔다. 한 나라의 안위(安危)를 놓고 이렇게 쉽게 막말 발언을 한 것은 대한민국의 자중지란을 부추기기에 충분하다. 중국과 미국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는 선택강요는 마우저뚱(毛澤東)의 ‘통일전선 전술’과 다르지 않다. 원래 통일전선전술은 공산당이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는 대정부투쟁의 가장 대표적인 전술이다. 즉 적을 분열시킨 뒤 한 쪽과 연합하는 공산 혁명이론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국가 안위와 관련된 방위시스템과 맞바꿀 대체재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입장표명을 보면 언젠가 어디서 봤던 기시감(旣視感)이 떠오른다.

 

 청나라 말기 조선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던 위안스카이, 원세개(袁世凱 1859~1916)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 원세개를 닮은 이는 중국 외교관리인 중국 외교부 천하이(陳海) 아주국 부국장이다. 그는 우리 외교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근 방한했다. 그가 서울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때 중국은 우리 전세기의 취항을 불허하는 조치를 취했다. 2012년부터 2년간 주한중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그는 공사참사관이었지만 실제보다 급이 높은 척 행동하며, 부대사나 대리대사로 불렸는데 의전상 급이 높은 국내 인사들과 교재를 트며 호형호재하고 지냈다. 정재계 인사는 물론, 여야 국회의원들과도 교류를 했다. 그가 서울에 근무할 당시 그의 종횡무진 행보 때문에 ‘진세개(陳世凱)’라는 별명이 붙었다. ‘진세개’는 천하이 부국장을 원세개(袁世凱)에 빗대서 한 말이다. 그는 중국에 돌아가서 사드의 대한민국 배치에 반대하는 선봉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위안스카이  ⓒ 김동철

 

위안스카이 ⓒ 김동철

 

 우리에게 위안스카이로 잘 알려진 원세개는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빌미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보호를 위해 군대 파병의 움직임을 보이자, 청나라는 신속히 군대를 파병했다. 청나라는 흥선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몰아 톈진으로 압송, 구금함으로써 일본의 무력 개입의 여지를 없애 버렸다. 청나라는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구식 군인들과 민중의 반란을 진압했고, 민씨 일파를 중심으로 한 친청(親淸) 정권을 수립했다.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에도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용산에 주둔시키며 자신들의 침략적 요구를 관철하여 나갔다. 위안스카이는 내정 고문으로 마건상(馬建常)을, 외교 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묄렌도르프는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이라는 불평등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에게 통상의 특권을 제공했고,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20대 초반 혈기방장한 위안스카이는 1884년 다시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게 된다.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고종을 경복궁에 유폐시키자 경복궁에 침입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고종을 구출했다. 그럼으로써 민씨 정권의 구세주가 됐지만 결국은 조선의 주권을 유린한 셈이다.

 

 위안스카이가 고종(高宗) 황제를 무시하고 사실상 왕 노릇을 했던 일은 기억돼야 한다. 경향신문이 2006년 11월 15일에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청나라 보호국이던 조선 땅에 진주한 뒤 무능했던 고종 임금 면전에서 “너같은 혼군(昏君)은 임금자리도 아깝다. 당장 폐위해도 시원찮다.”라며 호되게 꾸짖었다. 그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으며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조선 관료 20명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근들로 채웠다. 당시 미국 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했다. 그가 조선여자 첩을 3명이나 뒀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그는 조선에서의 눈부신 활약을 인정받아 1885년 11월 21일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에 취임했다. 사실상의 조선 총독이 된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주무르며 전횡을 저질렀다. 무력한 조선 정부가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호가호위를 일삼던 위안 스카이는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 신변을 안전을 빌미로 청나라로 돌아갔다. 위안 스카이는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1898년 무술정변을 일으켜 서태후(西太后)의 총애를 얻었다. 1911년에는 신해혁명이 나자 총리대신에 올랐고 청제국 몰락 후 중화민국 대총통이 됐고 1915년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반대운동이 벌어지자 즉위 80일만에 하야하고 이내 화병이 도져 세상을 떴던 인물이다.

 

 사드를 둘러싼 중국 측의 속내는 19세기 말 위안 스카이가 조선 총독 행세를 한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들은 화(華)로 구분하고 중원 이외의 지역을 각각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동이(東夷)로 부르던 중화사상(中華思想)은 시대착오적 산물이다. 일찍이 공자님이 말씀하신, 화이부동(和而不同) 지혜로 이웃과 더불어 함께 잘 사는데 서로 도움이 되는 선린우호의 관계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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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