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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중 연합수군 최초로 일본군 섬멸한 해상전투
[노기욱의 남도 이순신]
금산 신촌 ~ 녹동 앞바다
이순신, 진린장군 등 합작
일본 군선 50척 침몰시켜
훗날 노량해전 승리 초석
입력시간 : 2016. 08.19. 00:00


거금도 절이도 대첩지. 현재는 절이도전적지공원으로 바뀌었다 노기욱 소장 제공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일본군과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조선 수군을 이끌고 신안 팔금에 기지를 설치했다. 이 때 중국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은 1598년 조선 파병에 나섰다. 명나라 수군은 이순신이 강화도로 올라와 합류하기를 바랐다. 진린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남해 해상 진출을 위해 목포 고하도를 거쳐 금당도로 옮겼다. 이순신은 순천 왜성에서 농성하는 일본군을 섬멸하기 위해 고흥 바다로 진출했다. 이순신의 고흥 해상으로 진출하는 것만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 명나라의 지원이 절실했다.

명나라 지원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일본군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그 최초 전투가 한ㆍ중 연합수군의 '절이도대첩'이다. '절이도대첩'은 이순신의 어떤 대첩보다도 값진 전투였다. 중국수군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싸웠기 때문이다. 빛나는 전과에도 '절이도대첩'은 아직까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시대 절이도는 녹도와 사이에 해협을 둔 지역으로 조운선이 이동하는 주요한 바닷길이었다. 지금은 행정구역 지명이 변해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라고 부른다.

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한 중국 시진핑 주석이 진린과 등자룡을 거론하면서 크게 조명 받게 됐다. 한ㆍ중 우호의 상징으로, 이 시대에 조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역사 유적이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이곳 해역으로 들어온 것은, 1598년 7월 16일 이다.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시켜 사슴과 멧돼지, 물고기로 음식을 만들어 환영 잔치를 벌였다. 진린은 이순신의 배려에 감동했다. 그 후 도독 진린은 "통제사 이순신은 천지를 다스릴 만한 재주와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전공이 있다"고 평가했다. 도독 진린은 절이도 대첩후 중국의 신종황제에게 이순신의 높은 전공과 인품을 알리어 도독 도장과 8가지 선물을 받게 했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명나라 군사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도 허락했다.

진린은 휘하에 사선 25척, 호선 77척, 비해선 17척, 잔선 9척으로 도합 128척 전선과 중국군 1만95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판옥선 85척, 협선 85척, 병력 1만6865명을 이끌었다.

이 해 7월 18일 일본군 대 선단이 고흥군 절이도 해역으로 침략을 개시하면서 해전이 시작됐다. 일본군 정탐선 3척이 선두로 절이도 해상에 나타났다. 적선 2척이 한ㆍ중연합수군과 마주치자 도망쳤다. 이순신은 진린과 한ㆍ중연합수군을 지휘하며 절이도 해상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한ㆍ중연합수군 함대 편장은 녹도만호 송여종으로 휘하에 전선 8척과, 등자룡 휘하의 전선 30척이 연합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 도도 다카토라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100척의 전선이 대거 세과시를 했다. 첨병 정탐선의 급전을 보고받은 이순신은 진린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내려다보게 했다. 그러고는 이순신은 여러 배를 거느리고 적중으로 뚫고 돌입했다. 군관들에게는 군사를 정돈하여 대열을 갖추라고 지시했다. 이순신은 일본군 전선이 다가오자 화포를 쏘아 일시에 50척의 적선을 불태웠다.

이순신은 송여종에게 녹도 일대에서 일본군 잔당 소탕을 명령했다. 복병장 녹도 만호 송여종은 전함 8척을 이끌고 나가, 적선 11척과 접전중 6척을 나포하고 왜군 69명 사살과 함께 2명을 포로로 잡았다. 7월18일부터 24일까지 7일간에 걸쳐 절이도에서 올린 전공이었다. 이순신은 절이도대첩의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전공 보고서에 진린은 적군 40명, 계유격은 적군 5명, 조선군은 적군 26명을 사살하였다고 했다. 이같이 전공보고서를 쓴 것은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유지하기 위한, 이순신의 이해와 해상진출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절이도 전공을 사실과 다르게 보고한 경위가 문제가 됐던 것이다. 이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중국군 감찰을 맡은 안찰사 감군 왕안찰이 조사에 착수했다. 왕안찰은 명나라 감군 명령을 수행하며 엄정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본명이 왕사기(王士琦)이며 자는 규숙 호는 풍서이다. 선조임금과 이순신 등과 교감을 나누는 사이었다.

절이도해전은 임진왜란 중 한ㆍ중 연합수군이 최초로 일본군을 섬멸한 해상전투이다. 절이도해전지역은 오늘날 금산면 신촌리에서 녹동 앞 바다에 이른 해역이다. 이날 조선군 지휘관은 이순신이며 명나라 지휘관은 진린으로 한ㆍ중 연합수군은 배려와 협조로 연합하여 이룬 대첩으로 보기 드문 사례이다. 난중일기에는 당시 이 부분 기록이 망실되었고, 이충무공전서에도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선조 수정실록 선조 31년 8월조에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하여,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50여 척을 불태우니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舜臣自領水軍突入賊中發火砲燒五十餘隻 賊逐還)' 라는 짧은 기록이 전부이다.

고흥해상을 완전 장악한 한ㆍ중연합수군은 계속 동진해 여수반도를 끼고 있는 순천만과 서측 광양만 수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이는 고흥 해상 지배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순천 왜교전투와 노량해전에 결정적인 승리의 초석을 만들게 된다. 이순신은 진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중국수군과 연합작전을 펴 일본의 요새인 순천 왜교성에 주둔한 고니시를 고립시킨다. 결과적으로 임진 7년 전쟁 종식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고흥 거금도 해역은 이순신이 한ㆍ중 연합 수군을 이끌고 약 3개월 정도 전사 직전까지 누비던 곳이다. 고흥 거금도는 절이도대첩의 현장으로 후세대에 물려주어야할 높은 가치를 지닌 역사유적이다.


전남이순신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