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리더십] 효자(孝子),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난리 중에도 일기에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107회나 한 효자였다. 요즘 같은 시국에 이순신의 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준다.
‘효(孝)’ 자를 파자하면 ‘노인(老)’을 ‘아들(子)’이 업고 있는 형상이다. 또 부모를 뜻하는 ‘친(親)’ 자는 어버이가 나무(木)에 올라가 서서(立) 자식들이 언제 오나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는(見)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 보리 섞인 고봉밥에 구수한 된장찌개라도 뜨끈하게 끓여놓고 자식이 어디쯤 오는 지 동구바깥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모습은 정겹다.
부모자식 간을 하늘이 맺어준 인연, 천륜(天倫)으로 부른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난리 중에도 일기에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107회나 한 효자였다. 나라에 대한 충을 보여주었던 장수로서 그의 따뜻한 인간성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어머니를 천지(天只 오로지 하늘같으신 분)라고 기술했다. 난중일기 첫날 기록에는 어머니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다.
1592년 정월 초하루,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禹臣)과 조카 봉, 맏아들 회가 와서 얘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한을 이길 수 없다.”
명절 때가 되면 아무리 힘들고, 가는 길이 멀어도 부모형제 피붙이를 찾아 나서는 것은 사람으로서 할 도리를 하는 것이리라.
1592년 5월 4일은 어머니 생일이었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날인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찾아 뵙고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될 것이다.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가슴에 품은 생각을 어찌 말로 다하랴.”
어머니의 생일날 장군은 군관 송희립(宋希立),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만호 정운(鄭運),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장군과 동명이인),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등 제장들과 함께 옥포에 웅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토벌하기 위해 1차 출정하는 날이었다. 장군은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등 함대를 이끌고 먼동이 틀 무렵 여수 좌수영을 출발, 경상도 거제지역으로 향했다. 마침 5월 4일은 일본군 15만 대군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해 한성에 무혈입성한 즈음이다. 선조는 이미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쫓겨가는 신세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이다 보니 어머니의 생일상을 제대로 차려드릴 수가 없었다.
장군은 한산도로 통제영을 옮기기 전인 1593년 5월 일흔아홉 살 노모를 전라좌수영 가까운 여수 고음천(웅천 송현마을) 정대수(丁大水) 장군의 집으로 모셔왔다. 5년 동안 모신 그곳에는 ‘이충무공자당기거지(李忠武公慈堂寄居地)’라는 비석이 서있어 초계변씨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1594년 1월 11일 흐리나 비가 오지 않음
“아침에 어머님을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고음천에 도착했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과 함께 갔다. 어머님께 배알하려 하니 어머님은 주무시고 계셨다. 큰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하여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씀을 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大雪國辱).’라고 분부하여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심정으로 탄식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나라에 대한 충(忠)을 주문하고 아들은 효(孝)로써 어머니를 극진하게 대했다. 효는 만행(萬行)의 근본이다. 장군의 효심은 곧 충심으로 이어졌다.
‘군자행기효 필선이충(君子行其孝 必先以忠).’군자는 효도를 행함에 있어 반드시 먼저 나라에 대한 충을 행한다는 충경(忠經)의 말씀대로다.
1589년 10월 류성룡(柳成龍)은 이조판서가 되었고, 그로부터 두 달 후 이순신은 정읍 현감(종6품)이 되었다. 과거 급제 후 14년 만에 현감이 된 장군은 평소 마음의 빚을 갚기로 마음먹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두 형 희신(羲臣)과 요신(堯臣)의 아들인 조카들 일이었다. 그는 어머니 초계변씨와 두 형수 및 조카와 아들, 종 등 모두 합쳐서 24명의 가솔(家率)을 데리고 갔다. 그러자 너무 많은 식솔을 데려간다며 ‘남솔(濫率)’ 즉 가속(家屬)을 많이 데려가는 것에 대한 비난이 일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이충무공행록이다.
“장군이 눈물을 흘리며, ‘내가 차라리 남솔의 죄를 지을지언정 이 의지할 데 없는 어린 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듣는 이들이 의롭게 여겼다.”
진나라 병법가 황석공(黃石公)의 말을 빌리자면 측은지심 인지발야(惻隱之心 仁之發也), 즉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나타냄이다.
다음은 류성룡의 징비록 내용이다.
“이순신의 두 형 희신과 요신은 다 그보다 일찍 죽었다. 이순신은 두 형의 어린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같이 어루만져 길렀다. 출가시키고 장가보내는 일도 반드시 조카들이 먼저 하게 해주고 친 자녀는 나중에 하게 했다.”
큰형님 희신의 아들 뇌, 분, 번, 완과 둘째 형님 요신의 아들 봉, 해를 친아들 회, 열, 면보다 먼저 장가를 보냈다. 모두 어머니를 향한 효심(孝心)일 터이다.
1576년 32세 늦은 나이로 무과급제 후 22년 동안 북로남왜(北虜南倭) 오랑캐를 방비하느라 변방생활을 했던 장군은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난중일기에 107 차례나 절절하게 술회했다. 어머니 초계 변씨(1515~1597)는 일찍 두 아들을 잃고 남편마저 먼저 보낸 뒤 의지할 곳이라곤 실질적 가장(家長)인 셋째 순신(舜臣)뿐이었을 것이다.
1595년 1월 1일 맑음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았다.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또 80세의 편찮은 어머니 걱정에 애태우며 밤을 새웠다.”
오매불망(寤寐不忘), 자나 깨나 어머님을 잊지 못하던 장군은 1596년(병신년) 10월 7일 어머님을 위로해드릴 좋은 기회를 맞았다. 82세 된 노모를 위한 수연 잔치를 여수 본영에서 차려드리게 된 것이다.
그 이듬해 초인 1597년 2월 일본군이 재침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장군은 먼저 부산포 앞으로 나가서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대비하라는 명을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의 반간계라고 여기고 출전을 거부했다. 선조는 이순신을 무군지죄 부국지죄(無君之罪 負國之罪)의 죄목으로 한성 의금부에 투옥시키고 죽이려 했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려 있을 때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은 목숨을 걸고 ‘대역죄인’을 위한 구명 탄원서인 신구차(伸救箚) 상소문(1298자)을 올렸다.
“(상략) 바라옵건대 은혜로운 하명으로써 문초를 덜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보람 있게 하시오면 성상의 은혜를 천지부모와 같이 받들어 목숨을 걸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므로 성상 앞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공신각에 초상이 걸릴 만한 일을 하는 신하들이 어찌 오늘 죄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하오리까.”
이 일로 이순신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야말로 ‘조선 최고 인권 변호사’에 의한 명 변론은 곧 천우신조(天佑神助)의 행운으로 이어졌다.
4월 1일 의금부 옥사에서 풀려나 백의종군길에 오른 장군은 경상도 초계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의 진영으로 향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말 한필에 의지하여 남대문을 나서 과천, 인덕원을 거쳐 생가가 있는 아산에 당도한 후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1597년(정유년) 4월 13일 맑음
“일찍 식사 후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길로 나갔다. 아들 울이 종 애수를 보냈을 때는 배가 왔다는 소식이 없었다.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바로 해암(蟹巖 게바위)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노모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여수에서 배를 타고 오던 길이었다.
1597년 4월 19일 맑음
“일찍 나와서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 하직을 아뢰었다.”
4월 17일 의금부 서리 이수영(李壽泳)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쳤지만 차마 어머니의 영전을 떠나지 못하다가 19일 길을 떠나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기록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도 못하고 떠나야했던 장군의 백의종군 천리길은 회한과 피눈물로 뒤범벅이 된 천형(天刑)의 가시밭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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