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교훈
북한은 5차 핵실험에 이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다 속 잠수함이나 터널, 열차 등 언제 어디서 쏠지 모르는 비대칭적 공격이므로 우리는 존망의 기로에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 사정은 태평하기 그지없다.
“같은 민족끼리인데 정말 핵을 쏘랴.”는 ‘설마주의’와 ‘누군가(미국, 중국) 지켜주겠지.’라는 사대주의에 흠씬 빠져있는 것 같다. 온 국민의 힘을 모아 스스로 지키려는 자강의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북핵을 막기 위한 샤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놓고 “된다.”와 “안 된다.”로 엇갈려있다. 주민들도 우리 마을 뒷산에는 절대 안 된다는 님비(NIMBY)현상에서 헤매고 있다. 이런 대한민국 현실을 보고 중국과 북한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 사드배치를 찬성하면 ‘보수꼴통’ 친미주의자, 반대하면 ‘진보 정의’ 민족주의자로 치부하니 주변국에서는 “대한민국은 자기들끼리 싸우는데는 귀신(鬼神) 같고, 나라 지키려는 데는 등신(等神) 같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해 벽두부터 ‘럭비공’ 같은 트럼프와 한판 붙어보자는 중국은 항공모함 배치로 중국 굴기(崛起)를 대변하고 있다. 종군 위안부 소녀상과 독도 문제로 일본과는 외교적 마찰이 심상찮다. 선장을 잃은 대한민국호(號)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거센 3각 파도에 갈 길을 잃은 모양새다.
이 풍전등화(風前燈火)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북핵을 제어할 수 있는 나라는 북한에 식량과 석유공급을 해주는 중국뿐이다. 그러나 일당독재 공산국가인 중국이 가장 꺼려하는 것은 한반도가 평화통일이 됐을 때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과 미국의 군대와 마주하는 시나리오다. 따라서 중국은 완충역할을 하는 북한의 붕괴를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지리적으로 입술과 이빨의 형세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게 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이다.
사드 배치문제로 한류문화와 한국산 상품을 배격하는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을 보면서 그들의 깊은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중국의 통치철학은 1911년 이종오(李宗吾)가 초한지의 처세술을 정리해 놓은 후흑학(厚黑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얼굴은 두터워 뻔뻔하고 검은 속내는 음흉하다’는 후흑학은 동양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한다. 힘을 기를 때까지 납작 엎드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를 지나 한반도 사드배치 반대, 태평양에서 미국, 일본 및 주변국들과 대치하는 등 거침없이 상대를 협박하는 돌돌핍인(咄咄逼人)은 바로 그 맥락이다. 이 대목에서 중국은 1950년 미군을 물리치고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 기치를 걸고 중공군 100만을 보내 인해전술로 결국 한반도 통일을 가로막았다.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와 같은 나라이다. 중국은 1961년 북한과 조중(朝中)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북한이 존망(存亡)에 처했을 때 자동 개입하는 연계선 장치를 해놓았다.
이런 역사와 주변 환경을 보건대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없는 한 나라의 안위는 결코 기댈 언덕이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위국헌신으로 망국 조선을 구했던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전략 리더십을 살펴보자.
1591년 2월 13일 이순신(李舜臣)은 정읍현감(종6품)에서 무려 7단계나 뛰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가 된다. 당시 왜란의 조짐이 심상치 않자 선조는 계급에 구애없이 유능한 장수를 선발해서 전방에 배치하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을 비변사에 지시했다. 이때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이자 우의정인 류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을 남해안을 방비하는 수군장수로 발탁했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천행(天幸), 천행(天幸)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동네(한양 마른내천) 형’으로서가 아니라, 인재를 바로 보고 발굴하는 혜안을 가진 류성룡의 지인지감(知人之鑑)과 입현무방(立賢無方)도 감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도 여수에 부임해 관하 5관(순천, 흥양, 광양, 낙안, 보성), 5포(사도, 여도, 녹도, 방답, 발포)의 군선, 군기, 군량을 점검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신상필벌과 애민정신이 그의 주특기였다. 특히 비장의 첨단무기인 거북선을 창제해 지자, 현자총통을 탑재한 돌격선으로서 위용을 갖춰 임진왜란 하루 전 화포발사 시험을 한 기록을 난중일기에 남겼다. 그후 수차례 왜 수군과의 전투에서 거북선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탐망 정보전에 능하고 전투를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펼치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주동권을 발휘한 이순신 장군의 23전23승은 연승무패 행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해군사에서 그를 ‘군신(軍神)’의 반열에 오르게 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발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 왜군 15만 8천여명이 줄줄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조총(鐵砲 뎃포)부대를 앞세운 왜군은 파죽지세로 달려 무(無)뎃포의 조선군을 상주(순변사 이일)와 충주 탄금대(3도 도순변사 신립)에서 일거에 격파하고 20일만에 한성에 무혈입성했다. 그때 가장 놀란 것은 선조 임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4월 30일 한양을 버리고 몽진(蒙塵)에 나선 선조는 5월 8일 평양, 7월 3일 의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에 내부(內附 망명)할 뜻을 밝혔다. 뼛속까지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신으로 가득했던 선조는 사신을 명나라에 급파해 원군을 요청했다. 7월 10일 명나라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5천명의 선발대는 압록강을 건너와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조총의 위력만 실감한 채 패배하고 요동으로 퇴각했다. 상대를 무시한 채 천군(天軍)이랍시고 부린 만용의 결과였다.
선조는 또 명나라 조정에 애걸복걸한 결과, 1593년 1월 7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본진 5만명이 ‘항왜원조(抗倭援朝 왜를 물리치고 조선을 돕는다)’ 기치를 걸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패장 조승훈과 도체찰사 류성룡의 조선군 연합으로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砲) 등 서양식 화포를 발사하여 평양성을 타격했다. 이때 승기(勝機)를 잡은 이여송은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벽제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1월 27일 고양의 여석령(礪石嶺)에 매복해 있던 왜군의 기습을 받아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혼비백산,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명군은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멀찌감치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때 ‘전시재상’ 류성룡은 이여송에게 후퇴해서는 안 되며 전열을 정비한 후 한양의 왜군 총본부를 쳐부숴야한다고 간청하며 읍소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이여송은 “군사와 말먹이를 준비도 못한 주제에 무슨 전투냐.”며 류성룡에게 무릎을 꿇리고 군법으로 처벌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승훈의 1차 평양성 패배로 왜군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조선에 파견된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 평양 강복산에서 강화협상을 시작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592년 9월 1일부터 50일 동안 휴전협정을 맺기로 했다. 그후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1593년 4월 8일 용산에서 두 번째 회담이 열렸다. 도체찰사 류성룡 대감은 양측이 만나서 조선강토를 가지고 찧고 까부는 수상한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1594년 4월 명 황제 특사인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은 “왜군을 절대 토벌하지 말고 조선군을 모두 해체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이순신 장군 앞으로 보내왔다. 특유의 거만한 자세로 왜군을 얕보던 명군은 왜군과 15차례 전투에서 2차 평양성 전투를 빼고는 모두 패배했다. 그런데 바다에서의 싸움은 달랐다. 연전연승하는 이순신 수군을 붙들어 매지 못하면 강화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생뚱맞은 소리에 이순신 장군은 통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담종인에게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란 항의서를 보냈다.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의 정신이 충만했던 장군은 목숨을 걸고 명 황제의 지시에 분연히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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