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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과 이순신의 ‘천년의 의리’

category 칼럼/이순신 기고 2017. 4. 11. 15:09

류성룡과 이순신의 천년의 의리

류성룡의 징비(懲毖)와 이순신의 사즉생(死卽生) 정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달 29일 경북 안동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대감의 고택인 충효당을 찾았다. 반 총장은 방명록에 유서 깊은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 충효당을 찾아 우리 민족에 살신성인의 귀감이 되신 서애 류성룡 선생님의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투철한 사명감을 우리 모두 기려 나기기를 빕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류성룡 대감은 임진왜란(1592~1598) 7년 동안 전시재상으로서 45천여 명의 명나라 원군(援軍) 식량조달에 동분서주했던 공직자의 표상으로 남아있다. 또 점령군 행세를 했던 경략 송응창과 경리 양호의 갑질에 때론 맞서 주장하고 때론 엎드려 울면서 나라의 분할을 막기 위해 분골쇄신한 외교관이었다. 조선이 빠진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에서 하삼도(충청, 경상, 전라도)는 자칫 일본에게 넘어갈 뻔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일본어를 국어로 쓰는 일본의 속국으로서 나라 정체성은 이미 잃어버렸을 것이다.

 

                              피와 눈물로 쓴 류성룡의 징비록.

 

류성룡 대감은 망조(亡兆)가 든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애쓴 경세가이자 외교가였지만 7년 전쟁이 끝날 무렵 토사구팽됐다. 15981119일 영의정 류성룡은 일본과 화의를 주장해 나라를 망쳤다는 주화오국(主和誤國) 혐의(?)로 북인들(정인홍, 이이첨)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 당했다. 마침 그날은 이순신 장군이 남해 노량 앞바다에서 순천왜성을 탈출, 바닷길로 도망가려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잡으러 나갔다가 왜군의 조총에 피격돼 순국한 날이다. 동네(한양 건천동) 형인 류성룡과 이순신, 두 사람은 만날 때도 역사적이었지만 헤이질 때도 역사적이었다.

왜란 전인 15912월 우의정 겸 이조판서로 인사권을 쥔 류성룡 대감은 정읍현감(6)이던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3)7단계나 높이 올려 파격 승진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간들의 빗발치는 반대가 있었지만 왜란의 조짐이 보이는 위중한 때에 선조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 품계를 뛰어넘어 유능한 장수를 변방에 기용함)을 선언했다. 그리고 대신들에게 유능한 장수의 추천을 맡겼다. 이 대목에서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가적 면모를 꿰뚫어본 류성룡 대감의 지인지감(知人之感)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누란(累卵)의 조선은 없어졌을 것이다.

바다에서는 2323이순신의 외로운 싸움이 이어졌고 땅에서는 류성룡의 분골쇄신이 계속됐다. 자강파인 경세가류성룡과 전략가이순신의 의기투합으로 재조산하(再造山河)가 이뤄졌다면 조선 후반기는 빛나는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최고의 멘토와 멘티인 류성룡과 이순신. KBS 역사저널 그날.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다음과 같이 징비를 정의했다. 예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고, 지행병진(知行竝進) 알면 행하여야 하며 즉유비무환(卽有備無患) 그것이 곧 유비무환 정신이다.

7년 전쟁으로 조선은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 토봉와해(土崩瓦解)의 콩가루가 됐다. 당시의 잘못을 징계하고 후일의 후환을 두려워한다는 게 징비정신인데 조선은 채 30년도 못 되어 다시 여진족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인조는 송파 삼전도에서 청태종과 군신관계를 맺고 삼배구고두의 치욕적인 항복의 예()까지 올렸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될 때까지 조선은 외국의 정세에 캄캄했고 자강(自彊)의 노력에 소홀했다. 대신 선조 때 등장한 동인과 서인의 붕당은 다시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당리당략을 위한 당파싸움으로 긴 세월을 보냈다. 간혹 이원익, 김육 같은 애민정신의 소유자들이 대동법을 통한 민생고 해결에 나섰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외척의 세도정치에 휘둘리던 조선후기는 청나라의 속국으로서 열강의 낚싯밥이 되었다. 결국 일본의 끈질긴 정한론(征韓論)의 희생양이 되었다. 존명사대(尊明事大)의 소중화(小中華)임을 자부했던 문치주의조선은 어느 날 열강의 무력 앞에 바람처럼 날아갔다. 영락없는 허깨비였다.

 

 

                                                강릉 오죽헌 앞 율곡 이이 동상.

 

임진왜란 발발 20년 전 이율곡은 만언봉사에서 군량과 군비, 군사도 갖춰지지 않은 조선을 기국비국(其國非國)! 이것은 나라도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지금 우리는 북핵위협과 열강에 둘러싸인 동북아의 지정학적 운명에서 탈출할 만큼 자강(自彊)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