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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이순신 광장의 이순신 장군상

 

 

여수의 충무공과 통영의 충무공은 다른 사람인가?

 

1591213일 이순신(李舜臣)은 정읍현감(6)에서 무려 7단계나 뛰어올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3)로 영전해 여수 좌수영 본영인 진해루(鎭海樓)에 부임했다. 오늘날 여수의 진남관(鎭南館 국보 제304)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15994대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인 이시언(李時彦)이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진해루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순신 제독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 관할 55포의 군사훈련, 군기, 군량, 군선 등 전투준비태세를 점검했다. 5관은 지금의 5개 지자체인 여수, 순천, 광양, 흥양(고흥), 보성이고 5포는 수군진으로 여수 방답진과 고흥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이다. 이곳 수장들은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내내 이순신 제독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전투에 참여했다. 전라좌수영은 그래서 구국(救國)의 성지(聖地)라고 불린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바로 하루 전인 1592412일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총통을 발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413일 왜군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8천여명이 부산포에 기습상륙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朴泓)과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은 각 진의 병선(兵船)을 바다에 침몰시키고 총통을 땅에 파묻은 뒤 허겁지겁 줄행랑을 쳤다. 이른바 청야(淸野) 작전이다. 원균은 화급하게 이순신 제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순신 제독은 여수 진해루에서 휘하 장수들과 함께 경상도(慶尙道) 부원(赴援)’, 즉 경상도로 진출해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 토론한 뒤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때 녹도 만호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있느냐. 당장 나아가자.”고 역설하자, 이순신 제독은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은 뒤 57일 거제도로 진출, 옥포에서 첫 해전을 벌여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날은 선조의 피난행렬이 개성을 거쳐 평양성에 입성한 날이다. 이순신 함대는 본영인 여수 앞바다에서 판옥선(板屋船) 24, 협선(挾船) 15, 포작선(鮑作船 고기잡이 어선) 46척 등 모두 85척으로 출전했다. 고성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의 판옥선 4, 협선 2척과 합세했다.

물령망동(勿令妄動) 정중여산(靜重如山)! 이순신 제독은 휘하 장졸들에게 허튼 행동을 일체 하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옥포에는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0여 척이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있었고, 왜적들은 상륙해 민가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불화살은 우레와 같이 날아가 왜선 26척을 순식간에 분멸시켰다. 또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해 거제 장목면 영등포(永登浦)를 거쳐 창원 합포(合浦)에서 5, 다음 날 고성 적진포(赤珍浦)에서 11척을 각각 불태우고 9일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로 돌아왔다. 1차 출동에서 적 함선 44척을 격침 또는 분멸시킨 것이다. 5월 말에야 이순신의 승첩을 접한 선조는 이 전공으로 이순신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2품 둘째등급)의 품계를 내렸다.

이어 이순신 제독은 제2차 출동을 감행, 529일 거북선을 사천해전에 처음으로 출격시켜 적진을 교란시키며 닥치는 대로 적선을 격파했다. 그 와중에 제독은 왜군의 조총에 맞아 관통상을 당했다. 이어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적선 67척을 격침시키는 등 연승행진을 했다. 622일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제2차 출동의 승첩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이에 자헌대부(資憲大夫 2품 하계)로 올리는 유서(諭書)를 내려보냈다.

 

 연전연승 이순신 전략 리더십은?

 

한껏 승기가 오른 이순신 제독은 여세를 몰아 제3차 출동을 했다. 77일 당포에 머물 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함대 73(대선 36, 중선 24, 소선 13)을 이끌고 거제 견내량(見乃梁)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바로 후방에는 해적출신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 후속 함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순신 제독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함대와 합세해 전선 48,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을 합쳐 도합 55척의 조선 수군연합함대를 갖추고 왜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3척을 맞아 47척을 불사르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방면으로 꽁무니를 뺐다. 남겨진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상륙했다가 먹을 것이 없자 뗏목을 만들어 뒷날 겨우 탈출했다. 마나베 사마노조(眞鍋左馬允)는 이때 자신의 아타게 부네(安宅船)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78일의 한산대첩은 육전에서 쓰는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해상작전에 응용한 것으로 세계 해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905년 일본해군의 군신(軍神)’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가 학익진 전법을 응용해 러시아 발틱함대를 쓰시마 해전에서 전멸시키자 서양에서는 이를 도고 턴(Turn)’ 전법이라 불렀다.

 

 

 

                                              통영 거북선. 지붕에 철침이 없어 섭섭하다

                         

 

한산대첩은 도원수 권율(權慄)의 행주대첩,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이순신 제독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2품 상계),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2품 상계)로 승서(陞敍)되었다. 이순신 제독은 제4차 출전에 나서 91일 부산포의 왜군 본진을 공격해 120여척의 적선을 분멸시켰다. 이와같이 이순신 제독은 임진왜란 첫해인 15924차례 출전을 감행,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연전연승을 기록한 전략기지가 되었다.

이순신 제독은 다음해인 1593715일 경상도 지역인 한산도로 진을 전진 배치했다. 815일에는 선조로부터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2)의 임명교지를 받았다. 한산도에 객사인 운주당(運籌堂 후에 제승당이 됨)을 짓고 왜병(倭兵)을 깨뜨리는 전략을 짰으며 군사에 관한한 상하의 의견을 모두 듣는 소통의 장소로 만들었다. 1597226일 한양으로 압송될 때까지 37개월 동안 한산도 진영에서 삼군통제사로서 근무했다. 사실 이 기간은 명-일간 강화협상 시기로 전쟁이 소강상태였기에 웅포, 당항포, 장문포 수륙합동작전을 빼놓고 이렇다 할 큰 전투는 없었다. 이 동안에 이순신 제독은 한산도에서 진중 무과를 실시했고, 남해안 곳곳에서 피난민을 활용한 둔전(屯田)을 일궜으며 염전과 고기잡이를 해서 군량의 자급자족 체계를 세웠다. 현재 통영의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56대 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경준(李慶濬)이 지은 것으로 이순신 제독은 아쉽게도 이곳을 밟지 못했다.

필자는 400여년 전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남해안 전적지를 수년째 취재를 하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순신 제독의 유비무환 정신, 국민정신 캠페인으로 승화시켜야

 

여수와 통영은 왜 이순신 제독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갇아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 이순신 제독과 뗄레야 뗄수 없는 서울, 아산, 부산, 사천, 고성, 진해, 명량대첩의 해남과 진도군, 최후의 노량해전 현장인 하동과 남해군 등지에서도 이순신 제독은 각 지자체에 의해 쪼개진 군신(軍神)’으로 존재했다. 통영의 문화마당에는 3척의 거북선(한강, 통제영, 전라좌수영)이 바다위에 떠있다. 그런데 2012년 제작된 통제영 거북선 지붕에는 못과 칼 등 철침(鐵針)이 없는 밋밋한 판자 형태로 관광객을 맞고 있다. 거북선의 특징이 사라진 거북선을 보면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인 이락사, 대성운해 

 

 역사적으로 이순신 제독의 구국(救國) 정신을 국가적으로 승화시킨 주인공은 정조(正祖)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정조대왕은 우리 열조(여러 임금들)로 하여금 중흥의 공을 이룰 수 있게 뒷받침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이다.” “이순신이 중국에 태어났다면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누가 우세할지 자웅(雌雄)을 겨루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극찬했다. 정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에 조선의 꺼져가는 운명을 구한 은인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가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아산 이순신 묘에 신도비를 세워주고,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사금고인 내탕금(內帑金)을 내서 흩어져 있던 이순신의 자료를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1795년 발간했다. 이충무공전서는 현재 통영 충렬사에 보관되어 있다.

또 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이순신 유적지를 탐사하다 보면 박 전 대통령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광화문 이순신 동상 건립은 물론이고 1960~1970년대 현충사 성역화작업, 한산도 한산대첩비 친필휘호, 노량해전 후 시신이 안치됐던 남해 관음포 이락사(李落祠) 현판과 대성운해(大星隕海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지다) 휘호, 충렬사(忠烈祠) 현판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이란 글씨도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다. 보천욕일은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태양의 먼지를 닦아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위대한 업적을 말한다. 그리고 남해 충렬사 가묘터의 식수(植樹) 등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통영 충렬사에 소장된 이충무공전서. 정조때 편찬되었다.

 

이순신 제독이 남긴 솔선수범, 선공후사, 임전무퇴, 유비무환, 살신성인의 정신은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극복할 수 있는 해답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따라서 충무공의 국난극복 정신을 국민정신 캠페인으로 승화시키는데 대한민국해군협회가 앞장서 줄 것을 제의한다. 이를 위해 해군협회는 국방부, 교육부, 문체부, 해군본부 및 각 지자체 등과 MOU를 체결해서 상생의 협력방안을 도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아산의 효행길, 통곡의 길, 이순신의 백의종군 천리길, 수군재건길, 2323승 전적지 탐방 및 한려수도 뱃길을 활용하는 역사문화탐방사업이다. 나아가 왜군의 침략본거지인 규슈 히젠 나고야성 및 도공(陶工), 대마도, 일기도, 교토, 오사카, 도쿄 등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를 탐방하는 한일 역사문화탐방사업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 제독은 인성교육의 사표(師表)로서도 빛을 발한다. 통영출신 토지의 작가 박경리(朴景利) 선생은 이순신은 시대가 도달해야할 인격의 전형이다.”이라고 말했다.

전쟁기록물로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국보 132)과 함께 국보가 된 난중일기(亂中日記 76)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가 가진 위대한 유산은 절대 파편화되고 지역화 되어 축소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고립된 섬인 한반도와 생존의 길인 무역항로의 안전한 확보를 위해서라도 이순신 제독의 편범불반(片汎不返)’, 단 한 척의 왜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바다 지킴이정신은 마땅히 존중되고 널리 전파되어야 한다.

망전필위(忘戰必危)!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는 이순신 제독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사자후(獅子吼) 목청이 들리지 않는가

 

 김동철 (교육학 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교양학부 교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