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게 화약무기인 총통(銃筒)이 있었다①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鳥銃, 일본에서는 ‘철포(鐵砲)’ ‘뎃뽀’라고 부름)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조선군은 평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난리가 났을 때 소집되는 병농일치의 둔전병으로서 이렇다 할 체계적인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오합지졸의 약체였다.
조총의 위력 앞에 조선군은 속수무책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은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이후 파죽지세로 20여 일만인 5월 3일 한성에 무혈 입성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군의 위력은 실감 나고도 남는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400여 km라면 하루에 20여 km를 폭풍 돌진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천지를 뒤흔드는 조총 발사 소리에 조선군은 혼비백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조선 땅을 일순간에 무인지경으로 만든 조총의 위력 앞에 조선군은 속수무책,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해안 이순신(李舜臣)의 수전(水戰)에서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이 불을 뿜으면서 일본 수군은 연전연패, 번번이 깨지고 불탔으며 바닷속으로 수장되었다. 조선 수군에게 화약무기인 총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막강한 위력을 가진 총통을 육전(陸戰)에서 활용했더라면 조선군은 일본군의 군세에 그렇게까지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 부족해서 당한 자승자박의 비극이었다.
고려 말 최무선의 화약제조법
조선 수군에게 화약무기인 총통이 있었음은 하늘이 내린 은혜였다. 그 중심에 고려 말 무장인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이라는 인물이 있다. 1395년 4월 19일 태조실록에 실린 최무선 졸기(卒記)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되뇌는 말이 있었다.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최무선은 고려인으로서 최초로 화약제조법을 발명했다. 그는 고려 말 극성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데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했다. 최무선은 원나라 출신 염초장(焰硝匠) 이원(李元)에게서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워 1377년(우왕 3) 결국 화통도감(火筒都監) 설치 허락을 받아 화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화약의 필요성을 절감한 최무선은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들어가 각고의 노력 끝에 숯과 초석(礎石) 그리고 유황(硫黃)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숯은 지천에 널려있고 황은 유황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왜(倭)로부터 수입할 수 있었지만, 초석 즉 질산칼륨(KNO3)을 얻는 것이 문제였다. 1375년 최무선은 20년 동안의 연구 끝에 마침내 자신만의 초석제조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하였다.
1380년(우왕 8) 가을 왜구의 두목인 아지발도(阿只拔都)가 5백여 척의 군선과 2만여 명의 졸개를 데리고 전라도 진포(鎭浦 금강 하구 군산)에 침입했을 때 최무선은 화포로 무장한 군선 40여 척으로 왜구의 군선 전부를 궤멸시켰다. 진포 전투 이후 왜구의 침략은 점차 사라졌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서양에 비해 약 200년 앞서 함포 사용
세계 해전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함포의 사용은 레판토 해전(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 교황청, 에스파냐 등 신성동맹(神聖同盟) 함대가 투르크(터키) 함대를 격파한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가 서양에 비해 약 200년 앞서 함포를 사용했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총포로는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육화석포(六火石砲 완구의 일종),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등이다. 또 발사물로는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등이고 그 밖에 질려포(疾藜砲),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유화(流火), 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었다.
이순신이 찾은 화약 개발 자료
“오래된 집의 부뚜막이나 마루, 또는 온돌 밑에서 채취한 흙을 사람과 가축의 오줌 그리고 나뭇재와 섞은 후 비에 맞지 않게 쌓아 둔다. 그리고 그 위를 말똥으로 덮고 불을 지피고 나면 흰 이끼가 생기는데, 4~5개월 지난 다음 물로 씻어내고 졸이면 거친 초석이 얻어진다. 이 초석을 다시 물에 녹인 후 정제하면 화약에 사용할 수 있는 초석이 생긴다.”
이순신(李舜臣)은 임진왜란 당시 늘 화약의 부족함을 느꼈고 자체조달하기 위해서 태종실록, 세종실록 등에서 화약 개발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바로 최무선이 연구 개발한 비법을 알아낸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요는 정말로 발명의 어머니’이다.
계사년 1593년 1월 26일 이순신이 올린 장계이다.
“화약에 대해서는 백번 생각해도 달리 구할 길이 없고 다만 본영에서 구워 쓸 수밖에 없는데, 마침 신의 군관 이봉수(李鳳壽)가 그것을 제조하는 법을 알아 석 달 동안에 염초(焰硝) 1천근을 구워 내었기에 그것을 본영과 각 관포에 나누어 저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석유황이 날 데가 없어 한 백여 근쯤 내려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순신은 또 화약전문 기술자였던 감관(監官) 조효남(趙孝南)과 작전회의를 했는데 훈련도감 소속인 그는 충청도 서산 남양에서 바다 흙으로 염초를 만드는 일을 관리한 경험이 있었다.
총통과 관련 문헌상으로는 1425년(세종 7) 전라감사가 천자철탄자(天字鐵彈子) 1140개를 새로 주조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 때 지자총통(地字銃筒)과 현자총통(玄字銃筒)이 이미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2편에 계속)
'칼럼 > 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동철칼럼]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 (0) | 2017.07.28 |
---|---|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게 화약무기인 총통(銃筒)이 있었다② (0) | 2017.07.27 |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사상가, 이순신 (0) | 2017.07.27 |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명나라 수군의 군선 (0) | 2017.07.19 |
조선의 당당한 주력함선, 판옥선 (0) | 2017.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