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에게 화약무기인 총통(銃筒)이 있었다②
총통은 포의 크기와 화약의 중량 그리고 사정거리에 따라 천, 지, 현, 황의 순으로 명칭을 붙였다. 천자(天字) 총통은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 총통보다 크다. 포구에 장전한 포탄에 화승(火繩 화약 심지)으로 인화하여 발사하는 방식으로, 동차(童車)라는 포가(砲架)에 장착하여 사용했다.
천자총통
현존하는 천자총통은 2점이 있다. 1555년(명종 10)에 제작된 가정을묘명천자총통(嘉靖乙卯銘天字銃筒)은 전체길이 1.31m, 통길이 1.16m, 포구 지름 12.8㎝, 무게 296㎏이다. 1813년(순조 13)에 박종경(朴宗慶)이 훈련도감(訓練都監)에서 편집, 간행한 군사기술에 관한 책인 융원필비(戎垣必備)에 따르면, 발사물로 사용하는 대장군전의 무게는 50근(약 30㎏)이며, 사정거리는 1200보(약 2.16㎞)이다. 보물 제647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진주박물관과 아산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지자총통
지자총통(地字銃筒)은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유통식(有筒式) 화포(火砲)로 길이 890mm, 내경 105mm, 외경 172mm, 무게 92kg이다. 1969년 경남 창원에서 채석작업 중 발견되어 1986년 보물 제863호로 지정되었고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재질(材質)은 주철이며, 손잡이 2개가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 포신에 嘉靖三十六年四月 日 金海都會鑄成地字重壹百肆十肆斤兩監造前柵管李大胤匠人金連右兵上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어, 1557년(명종 12) 김련(金連)이 청동으로 경남 김해에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자총통은 임진왜란 때 거북선과 판옥선 등 전선(戰船)의 주포(主砲)로 사용되었다. 발사장치는 포구장전탄(胞口裝塡彈)에 화승(火繩)으로 불을 당겨 발화 폭발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쓰이는 것은 장군전(將軍箭)이라는 쇠화살과 수철연의환탄(水鐵鉛衣丸彈)이라는 탄환이다.
현자총통
현자총통(玄字銃筒)은 1984년 6월 경남 거제군 신현읍 고현리(古縣里) 고현만(古縣灣) 수중 준설작업 중 물 속에서 건진 것으로, 1986년 11월 29일 보물 제885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길이 79cm(통신 길이 58.7cm, 약실 길이 20.3cm), 입지름 7.5cm로 진품이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조는 통신과 약실로 구분되며, 통신에 대나무와 같은 마디 8조(條)가 있고, 따로 총구에 구연대(口緣帶)가 있다. 이 화기는 임진왜란 때 사용한 화기류 중 가장 많이 사용한 것으로, 화약 4냥과 격목(檄木)의 힘으로 길이 6자 3치 7푼(약 2m), 무게 7근에 이르는 차대전(次大箭)을 발사하면 사정거리가 약 1,600m에 이른다고 한다.
황자총통
마지막으로 황자총통(黃字銃筒)은 1587년(선조 20)에 주조한 것으로 총통길이 50.4cm(통신길이 36.2cm, 약실길이 14.2cm), 구경 4cm이다. 보물 제886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임진왜란 때 사용한 화기의 하나로, 총이라기보다는 중화기에 가까우며 화약 3냥과 격목(檄木)의 힘으로 길이 6자 3치(약 2m), 무게 2.28kg에 이르는 피령전(皮翎箭 가죽날개를 단 큰 화살)을 발사하면 사정거리가 약 1,100m에 이른다고 한다.
약통 뒤에 나무 막대기를 넣을 수 있는 손잡이와 포귀(砲耳)가 있어 조준사격을 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화기에는 萬曆丁亥四月黃字重三十一斤八兩匠富貴, 즉 1587년(선조 20) 4월에 부귀라는 화포장이 제조하였다는 명문이 음각되어있다.
승자총통
한편, 승자총통은 위의 천지현황자총통과 달리 휴대용 개인 화기이다. 화약을 1냥 쓰고, 철환 15개를 발사하며 사거리는 600보에 이른다. 철환을 발사할 때는 화약과 철환 사이에 토격을 넣는다. 피령목전을 발사하기도 한다.
승자총통이 처음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583년(선조 16) 여진족 니탕개의 난 때이다. 이때 함경도 온성부사 신립(申砬)이 총통과 철환을 비 쏟아지듯 퍼부어 오랑캐를 퇴주시켜 그 공으로 임란 때까지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이때 사용된 총통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역임한 김지(金漬)가 만든 것이었다. 이 승자총통은 이순신의 장계와 일기에서도 나타나는데 남쪽 바다 수군진영에도 널리 보급되었다가 광해군 이후 사라졌다.
정철총통
이순신은 고군분투 끝에 일본군 조총의 위력을 누를 수 있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이라는 개인용 화승(火繩 화약심지) 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신이 여러 번 큰 전투를 겪어 왜군의 소총을 얻은 것이 많사온데, 항상 눈앞에 두고 그 묘법을 실험한 바 총신이 길기 때문에 총구멍이 깊고, 또 깊기 때문에 위력이 강하여 맞기만 하면 파손이 되는데, 우리의 승자(勝字)나 쌍혈총통(雙穴銃筒)은 총신이 짧고 총구멍이 얕아서 그 위력이 조총보다 못하고 그 소리도 크지 못하므로 항시 조총을 만들고자 하였던 바, 신의 군관 정사준(鄭思竣)이 그 묘법을 알아내어 낙안수군 이필종(李必從), 순천에 사는 종 안성(安成), 김해 절종 동지(同志), 거제 절종 언복(彦福) 등을 데리고 정철(正鐵)을 두둘겨 만들었습니다.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같습니다.”
계사년 1593년 8월 선조임금께 정철총통을 개발한 내용의 장계와 함께 다섯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냈다. 그러나 선조는 이 정철총통을 군기시 창고에 보내고 왜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올려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의 조총
이순신은 직접 화약무기 제조기술을 일본에서 귀화한 김충선(金忠善 사야가)에게 구체적으로 보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조총 제작기술은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었으며 1624년(인조 2) 일본에서 조총 수천 자루를 수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꾸준히 조총의 성능 개선과 양산에 힘썼으며, 1655년(효종 7)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여 훈련도감에 배속시킨 뒤 새로운 조총 제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조선에서 제작한 조총의 우수성이 대외적으로도 알려져 1657년(효종 9)에는 청나라에서 조총을 무역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호준포
한편 호준포(虎蹲砲)는 길이 60~70cm, 무게 20~25kg으로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이 발명한 소형 대포이다. 앞부분의 다리 두개에 포신이 끼어 있는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앉아 있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호준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호준포는 다른 화포에 비해 크기가 작고 무게가 가벼워 쉽게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조준 사격이 불가능하고, 사거리가 짧으며 명중률도 높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신호용 화포로만 사용되었다. 아산 현충사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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