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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도 점(占)을 즐겨봤다는 기록들①

 

  • 이순신 장군도 왜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불안한 심정을 달래려 점을 즐겨 본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를 앞두고 점괘를 집는 이순신. 사진=KBS 불멸의 이순신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순신 장군의 점()에 관한 기록

 

일반적으로 점(占)은 팔괘, 오행, 육효 따위로 앞날의 운수, 길흉, 화복 등을 미리 판단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자연 앞에 한없이 약하디 약한 인간은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점을 보는 것이다. 점을 통해서 피흉추길(避凶推吉), 즉 재난을 피하고 길함을 찾는다는 바람이 숨어있다. 국가 안위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점술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데,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나 선거철에 정치인, 사업가들이 점집을 찾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왜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불안한 심정을 달래려 점을 즐겨 본 것으로 추정된다. 7년의 전장기록,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직접 ‘척자점(擲字占)’을 친 대목이 17회 나온다. 이 중 14회는 직접 점을 쳤고, 2회는 맹인 점술가 임춘경(任春景)이 장군에 대해 점을 친 경우이고 점쟁이 신홍수(申弘壽)가 원균(元均)의 주역점을 본 경우가 1회이다.

척자점은 사면에 각 1, 2, 3, 4를 새긴 하나의 나무 막대인 윤목(輪木)을 던져 괘를 만들고 괘를 찾아 길흉을 확인하는 것으로 오늘날 ‘윷점’과 비슷하다. 당시 점은 양반가는 물론 서민층에서도 널리 퍼져있는 사회적 풍습이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장터에서 고독과 불안을 달래려는 이순신의 모습은 자못 인간적이서 흥미를 끌고 있다.

 

 

노승석 여해연구소장 저서인 '이순신 승리 주역으로 풀다'

 

주역을 통해 ()()를 살핀 공자

 

공자의 사상을 담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역경(易經)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공자도 점을 쳤는데, 그의 백서(帛書)주역, 요편(要篇)에서 100번 점을 쳐 70번이 맞았다고 했으니 확률이 70% 정도였다.

어느 날, 제자들이 점을 치는 공자를 비난했다.

“주역 점이나 무당이나 점쟁이의 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자가 답했다.

“후대에 나를 의심한다면 주역 점 때문일 것이다. 가는 길이 무당, 점쟁이와 비슷해서다. 그러나 그 귀결점은 다르다. 나는 주역을 통해 ‘덕(德)’과 ‘의(義)를 살필 뿐이다.”

조선 왕실에서도 천문, 지리, 기후 등을 살피는 관상감(觀象監)을 두고 점을 쳤다. 사대부는 육효와 사주 명리학으로, 백성은 토정비결로 점을 봤다. 세조는 1458년 “녹명서(사주풀이)는 유학자가 궁리하는 하나의 일”이라며 서거정(徐居正1420~1488)에게 사주풀이 책을 쓰라고 하명했다. 그래서 한국의 첫 명리서(命理書) ‘오행총괄’이 나왔지만 저자는 “사주는 못 믿을 것”이라고 썼다.

이순신의 경우 자신의 영달, 입신양명,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왜군과의 큰 전투를 앞두었을 때나 자신의 후원자인 ‘전시재상’ 류성룡(柳成龍)의 안위가 궁금할 때, 또 고향에 있는 아내와 막내아들이 걱정될 때 점을 쳤다. 필자도 조간신문을 받아들면, 먼저 오늘의 운세를 보게 되는데 좋은 괘가 나오면 기분이 좋아져 더 겸손해지려고 하고 나쁜 괘가 나오면 조심하는 정도에 맞추고 있다.

 

 

점괘가 불길하다는 '흉'이 나왔다. 사진=KBS불멸의 이순신

 

아들과 류성룡의 병세를 걱정하며 친 점

 

갑오년 1594년 7월 13일 난중일기다.

“비가 계속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떠한지 염려하였다. 척자점을 해보니 ‘군왕을 만나보는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어보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如夜得燈)’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다 좋았다.”

또 이날 류상(柳相 류성룡)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과 같다(如海得船)’는 괘가 나왔다. 또 다시 점을 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괘가 나왔다. 매우 길한 것이다. (중략) 비가 올지 갤지 점을 쳤더니 ‘뱀이 독을 내뿜는 것과 같다(如蛇吐毒)’는 괘가 나왔다. 앞으로 큰 비가 내릴 것이다. 농사일이 걱정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이순신은 막내아들 면의 병과 영의정 류성룡이 죽었다는 소문에 답답한 마음을 이기려고 점을 쳐보았던 것이다. 당시 ‘전시재상’ 류성룡은 4월과 5월에 건강이 악화되어 사직서를 여러 번 냈다. 전장을 누비고 다니며 명군과 조선군의 군량을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어 위독한 상태까지 갔다. 그래서 류성룡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순신은 류성룡을 걱정하며 점을 치기도 했지만 꿈을 꾸기도 했다. 난중일기에는 전체 꿈 기록 40회 중 류성룡 관련 꿈이야기가 4회 나온다.

“새벽 꿈에 커다란 궁궐에 도착했는데 서울인 것 같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 영의정(류성룡)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했다. 임금이 피난 가신 일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다가 ‘왜군의 형세는 이미 끝났다.’라고 말했다. 서로 일을 의논할 즈음,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계사년 1593년 8월 1일.

이순신은 그해 7월 15일 전라좌수영의 진을 한산도로 옮기고 8월 15일에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로 임명되었다. 이전까지 경상우수사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으로 수군은 효율적인 작전을 수행하는데 걸림돌이 많았다. 따라서 선조와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경상, 전라, 충청 수군을 모두 통합관리하는 수군 총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고요히 앉았다. 아내의 병세를 점쳤다. ‘승려가 환속하는 것 같다(如僧還俗)’. 다시 쳤더니 ’의심했어도 기쁜 일이 생긴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또한 병세가 좋아질지 어떨지에 대한 소식이 올지 점쳤다. ‘귀양 간 곳에서 친한 사람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를 얻었다. 이 또한 오늘 안으로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다.” 갑오년 1594년 9월 1일.

(2회에 계속)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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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