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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도 점(占)을 즐겨봤다는 기록들②

이순신 장군도 왜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불안한 심정을 달래려 점을 즐겨 본 것으로 추정된다.(1부에서 이어집니다)

 

이충무공전서 편찬에 참여했던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나오는 척사점.

 

이순신이 친 척자점, 난중일기의 기록

 

“날씨가 흐렸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점은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如弓得箭)’였다. 다시 점을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如山不動)’는 것이었다. 바람이 순조롭지 못했다. 홍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 잤다.” 갑오년 1594년 9월 28일자 난중일기다.

이때가 바로 체찰사 윤두수(尹斗壽)가 기획하고 도원수 권율(權慄)이 지원한 거제도 장문포 수륙합동작전이었다. 권율의 명에 의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이 이순신의 판옥선을 타고 장문포에 상륙해 적을 치려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곽재우, 김덕령 들과 함께 약속한 뒤에 군사를 수백명을 뽑아 상륙하여 산으로 오르게 하고 선봉을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거리며 도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느지막하게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정박하면서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들은 갈팡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서로 분주하는데, 육군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다시 배로 내려왔다. 칠천량에 돌아와 진을 쳤다.”

갑오년 1594년 9월 4일 자 난중일기다. 이 수륙합동작전은 왜군이 호응하지 않고 진영에 머무르는 바람에 왜선 2척을 격파하는 등 이렇다 할 전과(戰果)가 없었다. 그래서 선조와 조정에서는 이 전투의 결과를 놓고 윤두수, 권율, 이순신 등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순신이 친 척자점에 따르면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적이 꽁꽁 숨어서 대적하려 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새벽에 꿈을 꾸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고 나는 관을 벗고 있었다. 함께 민종각의 집으로 가서 이야기하다가 깼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갑오년 1594년 11월 8일.

 

 

당시 척사점을 칠 때 활용했던 윷.

 

영의정이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은 류성룡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순신도 관을 벗었다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이다. 이순신은 그 꿈을 꾼 뒤 나흘 만인 11월 12일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선조에게 보고되었고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그때 선조는 원균을 옹호했다. 조정에서도 이순신은 공로를 과장한 비겁한 장수이나 원균은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의견이 나왔다. 13일에는 류성룡이 질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에 이어 9월에 있었던 장문포 해전의 결과에 대해 비판이 일었다.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洪履祥)이 당시 작전을 추진한 체찰사 윤두수, 도원수 권율, 통제사 이순신이 서로 패전사실을 감추고 허위보고를 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사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느 한 곳에 이르러 영의정 류성룡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동안 둘 다 의관을 벗어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놓았다. 얼마 후 비바람이 억세게 퍼붓는데도 꼼짝 않고 조용히 이야기 하는 동안, 만일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빈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겠는가를 되풀이 하며 걱정하다가 말할 바를 알지 못했다. 일찍이 들으니 영의정이 천식에 심하게 걸렸다고 했는데 잘 나았는지 모르겠다. 척자점을 쳐 보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라는 괘가 나왔다. 또 오늘 어떤 길흉의 조짐을 들을지 점쳤더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이 괘는 매우 좋다.” 병신년 1596년 1월 12일.

 

 

아름다운 천년의리, 류성룡과 이순신. 사진= KBS역사저널 그날

 

둘 다 의관을 벗었고 비바람까지 심하니 좋지 않은 상황이 생겼다는 것을 암시한다. 류성룡은 건강상 문제로 사직서를 몇 번 썼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왜군 본영인 부산포를 치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이 때는 명일간의 강화협상 중이어서 조선군 단독으로 왜군을 치지 말라는 명황제 선유도사(宣諭都司) 담종인(譚宗仁)의 금토패문(禁討牌文)이 이순신에게 전달된 상황이었다. 이순신과 류성룡 두 사람은 꿈에서도 북로남왜(北虜南倭), 즉 북쪽 여진 오랑캐와 남쪽 왜적의 공격을 걱정하는 모습이 평생 멘토와 멘티답다. 경세가와 전략가로서 이 둘이 전후 조선을 다시 만드는 재조산하(再造山河)의 주인공이 되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옥중에서도 일기를 쓰는 이순신.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친 점에 관한 기록이 상당량 있다. 사진=KBS 불멸의 이순신.

 

장님 임춘경을 통해 본 점

 

명나라와 일본 간 강화협정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병신년 1596년 1월 일기에는 왜적이 다시 나타날지 걱정하며 친 점의 결과가 보인다.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일어날지 어떨지 점을 쳤다.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如車無輪)’이었다. 다시 점을 쳤더니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如見君王).’이었다. 모두 좋고 길한 괘였다.” 병신년 1596년 1월 10일.

“또 오늘 사이에 어떤 길흉의 조짐이 있을지 점을 쳤다.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과 같다(如貧得寶)’이었다. 이 괘는 아주 길하구나.” 병신년 1596년 1월 10일.

“일찌기 영의정이 가래가 끓어서 숨이 차는 병에 걸려 많이 아프다고 했는데 나아 평안해졌는지 알 수 없구나. 척자로 점을 쳤다.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如風起浪).’이었다.” 1596년 1월 12일.

“신홍수가 와서 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水雷) 둔(屯)인데 천풍(天風) 구(姤)로 변했으니 이는 용(用)이 체(體)를 이긴 것이라 아주 흉하다고 했다.” 정유년 1597년 5월 12일.

 

 

길흉화복은 인간의 힘을 떠나있음을 아뢰는 이순신의 글.

 

이때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상태로 도원수 권율의 진영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이순신 대신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그해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왜수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조선 함대를 거의 궤멸시키고 자신은 물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및 1만여명의 조선수군이 몰살당했다.

“장님 임춘경(任春景)이 와서 내 운수를 본 것, 추수(推數)를 말했다.” 무술년 1598년 5월 10일, 11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무술년 1598년 2월 18일 고금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7월 16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이순신 진영 옆에 진을 치면서 조명수군연합군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조총에 맞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진충보국 살신성인의 큰 별이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 떨어진 것이다. 장님 임춘경이 어떤 운수를 말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점을 본 6개월 후 장군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은 노량해전 직전인 1598년 11월 15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이순신이 주고 받은 편지내용으로 중국 청산도(靑山島) 진린 비문에 새겨진 내용이다.

“저(진린)는 밤에는 천문을 보았고 낮에는 사람의 일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동방의 대장별이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아 공(이순신)에게 화가 미칠 것 같습니다. 공께서 어찌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왜 무후(武候 제갈공명)의 예방법을 쓰지 않으십니까?”

“저(이순신)는 충성이 무후만 못합니다. 덕망도 무후만 못합니다. 재주도 무후만 못합니다. 세 가지 모두 다 무후만 못하니 제가 비록 무후의 법을 써도 어떻게 하늘이 들어주겠습니까?”

이순신의 사생관은 인생필유사(人生必有死), 사생필유명(死生必有命)이다. 즉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일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다는 것이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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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