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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이순신 생가, 묘소

category 답사기행문(포토) 2016. 10. 12. 17:23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곳이다.

1706년(숙종 32) 아산 지역 유생들이 조정에 청하여 허락을 받아 세운 사당이다. 1707년 숙종이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내렸다.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은 국가기념일로 다례행사를 거행한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이 충무공 표준영정.

 

 

 

                                              

 

                               이순신 장군이 살던 고택. 21세 장인 방진(전 보성군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상주 방씨와 혼인한

                               뒤 물려받아 32세 무과급제하기까지 살던 집이다.   

 

 

      

 

 

 

 

 

 

 

 

 

 

 

 

이순신 가계도

 

 

 

 

고택 부근의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가 났을 때 마을 입구에 세워 임금이 하사한 편액을 걸어 후세 사람들에게 본받게 하였다.

이곳에는 충무공과 공의 조카 완, 4대손 홍무, 5대손 봉상 등 네 분의 충신과 8대손 효자 제빈까지 모두 다섯 분의 편액이 모셔져 있다.

 

 

 

                                      활터

 

 

 

 

어라산 중턱의 이 충무공 묘역. 현충사에서 북쪽으로 약 9km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에 있다.    

 

 

 

 

 

 

 

 

 

            2015년 봄, 현충사 강의후. 중학생들은 이순신 장군 묘소에서 장군의 정신을 기리며 참배를 했다.              

 

 

 

 

                                        이순신 장군의 묘비명.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사후 선무공신 1급, 영의정으로 증직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정경부인 상주 방씨와 합장되어 있다.

 

 

 

 

                                    생가터 부근에 있는 셋째 아들 이면의 묘소.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패한 일본군은 아산 이순신

                                    장군의 마을을 습격, 보복전을 펼쳤다. 막내아들 이면이 나서서 저항하다가 10월 14일 전사했다.

                                            

 

                                             15971014, 맑음.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거꾸러지지 않았다. (셋째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감싸 안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미처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겉봉을 대충 뜯고 (둘째 아들) 열이 겉면에 쓴 통곡두 자를 보자말자 면이 전사했음을 알아챘다. 어느 새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 또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그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의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누구에게 의지하랴.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길고 길어 1년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