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18 – 선조와 이순신의 애증
역사에 ‘만약’이 있다면…
임진왜란 초(1592~1593년) 이순신은 바다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 왜 수군을 수장시켰다. 그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올라갔다. 그러나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파천한 왕,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 요동 땅으로 건너가려 했던 무능한 군주로 알려져 있었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있을 수 없지만, 가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새로운 지혜를 주기도 한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살아남고 7년 전쟁의 온갖 풍상을 몸으로 때운 영의정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나라를 다시 만들었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까?
이른바 두 영웅이 나라를 다시 만드는 ‘재조산하(再造山河)’에 관한 이야기다. 전시 재상(宰相)이었던 ‘경세가’ 류성룡이 주창했던 작미법(作米法, 공물 대신 토지결에 따라 쌀로 세금을 냄), 속오군(束伍軍, 양반에게도 군역을 주어 천민과 함께 편성한 군대) 제도 및 정병(精兵)을 만들고자 했던 ‘기무 10조’의 개혁 등은 너무 멋진 아이디어였다. 특히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망전필위(忘戰必危)의 징비(懲毖)정신’은 백미(白眉)로 꼽힌다.
이순신을 인정했던 선조
선조도 처음에는 이순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발발 약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13일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로 임명되었다. 일개 정읍현감(종6품)에서 무려 7단계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의 나이 47세, 요즘으로 말하면 육군 소령이 졸지에 해군 소장이 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종6품의 현감에서 정3품의 수사로 무려 일곱 품계를 뛰어넘은 이순신의 파격적인 진출을 두고 세찬 반대 의견들이 있었다.
이렇게 이순신은 육군에서 해군으로 보직 변경이 됐고 그것도 몇 단계나 높은 특진이었으니 인사권자인 선조의 은혜라 할 만하다. 이즈음 선조는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등을 남해안 요충지 방어 장수로 보내게 된 것이다.
선조의 파천에 통곡한 이순신
1592년 적진포해전에서 왜선 13척을 분멸(焚滅)시키고 돌아온 장군은 선조가 북쪽으로 몽진(蒙塵)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분루(憤淚)를 삼켰다. 우국충정을 그려낸 장군의 시조다.
동궁북지위(東宮北地危) : 동궁 전하는 북쪽 변경에서 위험에 처해있다
고신우국일(孤臣憂國日) : 외로운 신하는 날마다 나랏일 걱정하네
장사수훈시(壯士樹勳時) : 장사들은 공을 세울 때이다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 : 산들에 맹서하니 초목이 알아준다
수이여진멸(讐夷如盡滅) : 이 원수들을 다 죽일 수 있다면
수사부위사(雖死不爲辭) : 비록 죽을지라도 사양하지 않으리
1597년 2월 26일 선조와 이순신의 관계가 깨졌다. “감히 변방의 장수가 왕명을 거역하다니 잡아다가 죽여야겠다.” 선조는 대로(大怒)했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삭탈관직된 이순신은 3월 4일 한양으로 압송돼 의금부에 갇혔다. 세 가지 죄목에 해당됐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한 죄(欺罔朝廷 無君之罪), 둘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막지 않은 죄(從賊不討 負國之罪), 셋째는 남의 공을 가로채고 무함(誣陷)하여 죄에 빠뜨린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奪人之功 陷人於罪 無忌憚之罪)였다.
억울함에 잠 못 이루었을 장군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한 것은 현장 지휘관으로서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의 말만 믿고 출동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요시라의 반간계(反間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정하고 군대를 동원할 때는 장수가 단독으로 행해야 한다. 진퇴에 조정이 견제하면 공을 이루기 어렵다(出軍行師, 將在自專, 進退內御, 則功難成).”
손자병법의 손무(孫武)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전쟁의 형세가 이길 수 없으면 임금이 반드시 싸우라고 해도 싸우지 않는 것이 옳다(戰道不勝 主曰必戰 無戰可也).”
요시라의 첩보를 처음 접한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도원수 권율(權慄)과 조정 대신들은 이순신 탄핵에 열을 올렸다. 특히 윤근수(尹根壽)는 이순신을 탓했고 대신 원균(元均)을 그 자리에 보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급기야 선조는 성균관 사성인 남이신(南以信)을 한산도로 내려 보내 진상을 파악하라고 했다. 남이신이 전라도에 도착하자, 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있다면서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서인(西人)인 남이신은 조정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 나온 기록이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해도(海島)에서 7일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는데 만일 우리 군사가 쳐들어갔더라면 청정을 잡아올 수 있었을 것인데 순신이 머뭇거려 그만 호기를 놓쳤다.”
“요시라는 다시 김응서를 찾아가 ‘청정이 벌써 상륙했는데 조선에선 왜 막아서 잡지 않았는지 매우 안타까웠다’고 하고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잡아와서 국문하기를 청했다. 좌의정 김응남(金應南)도 ‘원균이 먼저 싸우러 나갔는데 순신이 구하지 않았다’ 하고, 급기야 1월 27일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고 대신 원균을 통제사로 삼았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자 기록
“서인인 윤두수(尹斗壽)는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싸움에 나가기 싫어 한산도로 물러가 지키고 있는 바람에 큰 계책이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니 이에 대하여 신하들로서 누가 통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순신은 조용한 것 같지만 거짓이 많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선조실록 1597년 2월 4일일자 기록
“사헌부에서 이순신은 나라에 막대한 은혜를 입어 순서를 뛰어넘어 한껏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온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고 바다 가운데서 군사를 끼고 앉아 이미 다섯 해를 보냈습니다. 마침내 적이 바다를 덮고 밀려와도 길목을 지켰다거나 선봉을 막아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배반하고 나라를 져버린 죄가 큽니다. 붙잡아다 신문하고 법대로 국문하여 벌을 내려야 합니다.”
전쟁 상황 판단을 할 때 ‘왜군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조정 대신들의 탁상공론과 현지 지휘관의 상황 판단은 훨씬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장군은 닭이 울 때까지 잠을 못 이루는 나날이 많았다.
외롭고 힘든 영웅, 시대를 안고가다
선조는 조급했다. “어서 빨리 왜놈을 처단하란 말이야!” 저간의 사정을 읽고 있던 전라도 병마사 원균이 1597년 1월 22일 선조에게 “부산 앞바다에서 일거에 왜선을 제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서장(書狀)을 올렸다. 선조는 5일 후 1월 27일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임명했다.
절체절명의 군사작전을 기획할 때 군최고통수권자의 의중을 파악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조선 전체의 안위(安危)를 생각해서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인가? 왜란 초기 동인으로서 이순신을 두호했던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가 되고 류성룡과 갈라섰다. 그런 이산해와 윤두수, 윤근수 형제는 원균을 엄호했다.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 한 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삼도수군통제사를) 원균으로 대신해야겠다.”
원균은 소원대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고 그해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는 수모를 겪고 전사했다. 선조는 급하게 이순신을 다시 찾았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이 사람의 모책(謀策)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선조는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는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에서 미안함을 밝혔다. 이리 깨지고 저리 으깨진 이순신의 몸과 마음은 형체만 남아있었다. ‘아! 영웅은 외롭고 어려운 직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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