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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19 – 치욕의 명령서, 금토패문

이순신 장군의 일생은 모진 학대와 수모의 연속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7년 전쟁이 가져다준 주변 환경 역시 사납고 척박했다. 그러다보니 굴곡진 변곡점(變曲點)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어느 한번쯤은 꺾여서, 아니 스스로 피해서 도망이라도 칠 법한데 장군은 그렇지 않았다.

 

치욕의 순간을 마주하다

 

명나라 황제의 특사인 선유도사(宣諭都司) 담종인(譚宗仁)은 “왜군을 절대 토벌하지 말고 조선군을 모두 해체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이순신 장군 앞으로 보내왔다. 왜적이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진을 치고 있는 마당에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하늘이 놀라고 땅이 갈라지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위급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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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쌓은 성, 잘 정비된 순천 왜성. ⓒ김동철

 

 

부산 왜군 본거지인 자성대 왜성. ⓒ김동철

 

1594년 3월 6일
“맑다. 새벽에 망대에서 적선 40여 척이 거제 땅으로 건너온다고 전하였다. 당항포 왜선 21척을 모조리 불태운 일에 대한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늦게 고성 땅에서 배를 출발하였다. 순풍에 돛을 달고 거제로 향하는데 역풍이 불어 닥쳤다.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였더니 남해현령이 급히 보고를 보내왔다. 곧 명나라 군사 두 명과 왜놈 여덟 명이 명나라 담종인이 보낸 패문(牌文)을 가지고 들어왔다. 적을 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심기가 매우 괴로워져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하였다.”

 

1594년 3월 7일“맑다. 몸이 매우 괴로워 뒤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공문을 아래 사람을 시켜 만들도록 하였더니 글꼴이 말이 아니었다. 원 수사(원균)에게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내도록 하였으나 역시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내가 글을 짓고 군관 정사립(鄭思立)에게 쓰게 하여 보냈다. 오후 2시쯤 출발하여 밤 10시쯤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은 분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마음이 괴로웠다. 적을 눈앞에 두고서 적을 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이 명나라의 뜻이었기에 더욱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다 몸마저 성치 않았다. 이 무렵 이순신 장군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12일 동안 위중한 상태였다(强病十二日).

 

조카 이분(李芬)이 쓴 행록“공은 열병에 걸려 몹시 중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루도 눕지 않고 그대로 공무를 보았다. 자식들이 쉴 것을 권유했으나 오히려 ‘적과 대치하여 승패의 결단이 호흡 사이에 있는데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면 누울 수 없다’ 하고 참으며 12일 동안 앓았다.”

마침 1594년(갑오년)은 전쟁의 피폐함과 죽어 썩은 시체들로 말미암아 전염병이 돌았다. 토사, 설사가 나는 장티푸스 염병(染病)이 유행해 거리마다 시체가 산을 이뤘다. 1594년 1월 21일과 22일 <난중일기>에는 진영에서 죽은 시체 214구, 217구를 각각 거두어 묻었다고 했다. 장군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역병 환자를 구하기 위해 의원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기대할 수 없는 무망(無望)한 일이었다.

 

편범불반(片帆不返), 단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겠다!

 

금토패문과 관련해 이순신 장군은 통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1594년(갑오년) 3월 6일 도사(都指揮使司) 담종인에게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란 답서를 보냈다.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삼가 황제의 선유도사 앞에 답서를 올립니다. 왜적이 스스로 실마리를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와 죄 없는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또 한양으로 쳐들어가 흉악한 짓들을 저지른 것이 말할 수 없이 많으며,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함이 뼛속에 맺혀 이들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있습니다(서불여차적 공대일천, 誓不與此賊 共戴一天).

 

각 도의 배들을 정비하여 곳곳에 주둔하고 동서에서 호응하는 위에, 육지에 있는 장수들과도 의논하여 수륙으로 합동 공격해서 남아 있는 왜적들을 한 척의 배도 못 돌아가게 함으로써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사잔흉여얼 척로불반 의설국가지수원, 使殘兇餘孼, 隻櫓不返, 擬雪國家之讐怨) 이달 초사흗날 선봉선 200여 척을 거느리고 바로 거제로 들어가 그들의 소굴을 무찔러 씨를 없애고자 하였던 바, 왜선 30여 척이 고성과 진해 쪽으로 들어와서 여염집들을 불태우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며 또 사로잡아 가고 기와를 나르며 대나무를 찍어 저희 배에 가득 실어갑니다.

그 모습을 생각한다면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적들의 배를 쳐부수고 놈들의 뒤를 쫒아 도원수에게 보고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여 나서려는 이때, 도사 대인(大人)의 타이르는 말씀이 간절하고 극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다만 패문의 말씀 가운데 ‘일본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 귀화하지 않는 자가 없고 모두 병기를 거두어 저희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 모든 병선들은 속히 각각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왜인들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바, 거기가 모두 우리 땅이거늘(개시아토, 皆是我土) 우리더러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또 우리더러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제 고장이란 또한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위아속회본처지방운 본처지방 역미지재하소야, 謂我速回本處地方云, 本處地方, 亦未知在何所耶),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닙니다.

왜라는 것은 일본 사람인데,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들이 아직도 포악한 짓을 그만두지 아니하고, 여러 곳으로 쳐들어와 살인하고 약탈하기를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병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뜻이 과연 어디 있다 하겠습니까.

이제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속임과 거짓밖에는 아닙니다. 그러나 대인의 뜻을 감히 어기기 어려워 잠깐 얼마쯤 두고 보려 하오며, 또 그대로 우리 임금께 아뢰려 하오니, 대인은 이 뜻을 널리 타이르시어 놈들에게 하늘을 거스르는 도리와 하늘을 따르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비지역순지도 천만행심, 裨知逆順之道 千萬幸甚).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답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 삼가 올림.”

 

 

금토패문에 답신을 쓰는 이순신.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김동철

 

당시 명나라는 조선을 빼고 왜와 강화 교섭 중이었다. 그런데 감히 번방의 일개 조선 수군 장군이 명 황제의 사신에게 항의답서를 올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거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이순신 장군은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의 정신으로 이런 과감한 일을 결행한 것이다.

 

비겁한 명의 협상과 장군의 의지

 

왜와 강화 협상을 벌이던 명나라는 나라 재정이 충분치 않아 더 이상 전비(戰備) 부담을 하기에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리고 왜의 요구대로 평양 이남의 땅은 아니더라도 한강 이남의 하삼도(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는 떼어주고라도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그래도 조선이라는 완충지대는 있기 때문에 일본과 직접 부딪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바다의 이순신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금토패문이란 청천벽력 같은 문서가 나오게 된 것이다. 명군의 총사령관인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평양에서 승리하고 개성까지 내려갔을 때 황제의 기패(旗牌)를 보내 더는 왜와 싸우지 못하게 했다. 거기에 왜에 대한 두려움도 한몫했다. 특유의 거만한 자세로 왜군을 얕보던 명군은 왜군과 15차례 전투에서 2차 평양성 전투를 빼고는 모두 패배했다.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 중 명 사신이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황제 칙서를 전달하는 모습.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김동철

 

그런데 바다에서의 싸움은 달랐다. 연전연승하는 이순신 수군을 붙들어 매지 못하면 강화 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1593년 2월 도원수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루자 경략 송응창은 권율에게 패문을 보내 왜와 싸워 이긴 것을 질책했다. 또 그해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고 성 내에 살아있는 모든 백성들이 도륙 당했지만, 사신 심유경(沈惟敬)을 왜군 진영으로 보내 오히려 왜군의 만행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게 했을 정도였다. 피아(彼我)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선조실록(1594년) 3월 7일 접대도감에서 왜적에 인질로 잡혀 있는 중국 장수 담종인(譚宗仁)의 상황 등을 보고하다

 

“접대도감(接待都監)이 아뢰기를 ‘상공(相公) 담종인의 사촌 담풍시(譚馮時)가 적진으로부터 나와 어젯밤에 한양에 들어왔는데, 대략 물어보니 담종인의 교대를 재촉하는 일로 서쪽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도감으로 하여금 술자리를 마련하여 오래도록 적진 중에 있었던 괴로움을 위로하고 적진의 소식을 자세히 질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접대도감 당상인 형조판서 신점(申點)과 호조참판 성영(成泳)이 아뢰기를 ‘신들이 담풍시를 접대도감으로 맞아들여 다주(茶酒)를 접대하고 조용히 담화하면서 먼저 담유격(譚遊擊)의 침소와 식사가 편안한지를 물은 다음 무슨 일로 고 군문(顧 軍門)에게 가느냐?’고 물으니, 답하기를 ‘왜적이 바다를 건너갈 기약이 없으므로 총독(總督)에게 보고하여 자주 차인(差人)을 보내 왜적이 돌아갈 것을 재촉하라고 하기 위해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현재 왜적이 얼마나 되며 군량 비축은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군병의 수는 곳곳에 진을 치고 웅거하여 있으니 제대로 확실하게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3만∼4만 명이며, 군량은 그들의 나라로부터 계속 운반하여 많이 쌓아 두었으며 또한 집과 방을 극히 정결하게 꾸며놓고 이 나라의 사람들과 해물(海物)을 팔고 사서 편안히 앉아 잘 먹고 있다. 그들에게 별다른 번요와 해로운 일이 없으니 어찌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또한 심유경(沈惟敬)은 왜인과 마음을 같이하여 모든 논의가 있을 때마다 현소(玄蘇)와 소서행장(小西行長) 및 부통사(符通事)라고 이름 하는 사람과만 비밀히 말하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는데, 그 말하는 것은 필시 이 나라의 3도(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잘라준다는 의논일 것이다. 우리 담야(譚爺)는 이치에 의거하여 곧바로 배척하기를 ‘너희들이 반드시 속히 바다를 건너간 다음에야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때문에 왜인들이 심유경에게는 후한 뇌물을 주고 담공(譚公)은 박대하였다. 심유경은 은냥과 보물을 많이 받아 왔고 담야는 구류한 채 내보내지 아니하여 그 고통이 막심하니, 이는 반드시 심유경이 이간질을 하여 그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협상은 정치외교가들이 하는 것이고 전투는 장수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북한군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현장 지휘관들은 윗선에 “쏠까요, 말까요?”를 물어보고 있다. 그 사이에 당하는 쪽은 항상 최일선의 우리 장병들이었다. 군인의 본분은 초전박살(初戰撲殺)이다.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의 선유도사 담종인의 금토패문에 항의하는 답문을 올린 뒤 9월 29일 장문포의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수륙 합공작전을 펼쳤지만 왜군이 성 안에서 웅크리고 나오지 않아 이렇다 할 전과(戰果)는 올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장군은 10월 1일에는 영등포해전, 10월 4일에는 제2차 장문포해전을 계속해서 벌여나갔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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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인성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