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징비록 17 –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
원균과의 불편한 동행
원균(元均)은 이순신 장군이 7년 동안 쓴 <난중일기>에 120여 차례나 언급되어 있다. 연도별로 보면 1593년(계사년)에 49회, 1594년(갑오년)에 46차례나 집중되어 있다. 이때는 임진왜란 초기 3년간이다. 대부분 원균의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또는 ‘의논에서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번 모순이다. 참 가소롭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진도(珍島)의 지휘선이 왜적에게 포위된 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경상좌위장과 우부장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경상수사(원균)를 원망하고 있다. 또 죽은 왜적의 수급(首級)을 거두려고 적이 가득한 섬 사이를 들락거리는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伺候船, 정찰탐색선)을 잡아 보냈더니 이순신에게 화를 내더라는 기록이 있다.
1593년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의 말에 따르면 명(明)의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자신에게 보낸 1530대의 불화살을 원균 혼자서 다 쓰려고 계책을 꾸미기도 했다. 이순신에게 날이 밝는 대로 나가 왜적과 싸우자고 공문을 보내놓고 다음 날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는 문제에 대해 공문을 써서 보내자 취기에 정신없다고 핑계를 대며 답하지 않았다. 이순신에게는 복병을 동시에 보내자고 해놓고 자신이 먼저 보내기도 했다. 이밖에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더라는 등의 비난도 있다.
또한 도원수 권율(權慄)의 질책 앞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원균의 모습을 두고 우습다고 비웃거나 매도(罵倒)에 가까운 비난을 숨기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문상을 보낸 것과 관련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한다만 이는 도원수의 명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에 대한 감정의 골은 깊었다.
1593년 4월 20일 의주로 파천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전 이순신이 원균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적이 있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요청해 옥포해전에서 적을 물리친 후 이순신에게 두 사람 이름으로 장계를 올리자고 했다. 이순신은 “급할 게 없으니 천천히 올리자”고 말하고는 밤에 혼자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이 혼자 장계를 올린 것은 지휘체계의 혼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고 적을 공격할 때도 이렇다 할 공이 없었다’라고 썼다. 장계마저도 서로 견제하면서 써야 하는 불신의 상황이었다.
“새벽에 출발하였는데 역풍이 크게 일었다. 창신도에 도착하니 갑자기 바람이 순해졌다. 돛을 올리고 사량에 도착하였는데 다시 역풍이 불고 비가 크게 쏟아졌다. 사량 만호와 수사(원균)의 군관 전윤이 보러 왔다. 전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에서 모집해 왔는데, 이 편에 들으니 원수(권율)가 방해하려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우습구나,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함이 이러하니 한탄한들 어쩔 것인가! 여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5월 13일 맑음
“검모포 만호가 보고하기를 ‘경상우수사에 속한 포작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하다가 붙들렸는데 포작들은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하였다. 사복들을 보내어 붙잡으려 하였더니 원 수사가 크게 화를 내면서 사복들을 결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윤발을 보내어 풀어주게 하였다. 밤 10시쯤부터 비가 내렸다.”
6월 4일 맑음
“충청 수사, 미조항 첨사 그리고 웅천 현감이 보러 왔다. 승경도(陞卿圖) 놀이를 하게 하였다. 저녁에 겸사복(兼司僕, 임금의 호위무사, 정2품)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다.”
<난중일기>로 본 이순신 vs. 원균
원균이 이순신과 비교 대상이 될 때 항상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것은 그 자신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1593년 7월 15일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여수(당시 순천)의 영(營)을 한산도로 옮겨왔다. 이순신은 그곳에 ‘운주당(運籌堂)’이란 작전통제소를 지었다. 운주당은 운주유악(運籌帷幄), 즉 ‘장막 안에서 작전을 계획한다’는 뜻에서 따온 이름이다. 운주당은 오늘날 ‘제승당(制勝堂)’이 되었다. 이순신은 운주당의 문을 활짝 열어 소통을 했다. 졸병이라도 군사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게 했다. 전투에 앞서서는 반드시 부하 장수들과 충분히 토론하고 작전을 짰기 때문에 실패 확률이 그만큼 적었다. 그러나 원균은 그렇지 않았다.
현장 지휘관으로서 체통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상하좌우 혼연일체가 되어도 힘겨운 마당에 당연히 패전(敗戰)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영내의 엄정한 군기 유지와 휘하 장졸들에 대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원칙대로 행한 이순신 군영은 정리정돈이 잘된 ‘준비된 병영’이었다. 그런데 원균이 운주당에 첩을 데려와 살았다니! 그는 도원수 권율(權慄)에게도 밉게 보였던 모양이다.
권율은 7월 11일 부산포 공격을 주저하는 원균을 불러 곤장을 쳤다. 도원수는 현역 군 최고봉인 합참의장이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 즉 해군참모총장인데 곤장 형을 가했다니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이 같은 내용은 권율이 선조와 조정에 올린 장계와 이순신이 1597년 6월 17일자 <난중일기>에 쓴 내용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백의종군 상황으로 ‘무등병’, 아무런 권한이 없어 그저 돌아가는 형세를 잠자코 지켜봐야 할 때였다.
원균이 역사적으로 저평가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것인데, 그때 조선 수군은 궤멸 당했다. 원균은 볼기에 장을 맞은 뒤 화가 치밀어 올라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전세가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와 도원수는 출전을 재촉했다. 원균은 등 떠밀려 ‘그냥’ 출전했다. 남해 제해권을 쥐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 왜 수군은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기세로 1000여 척을 동원, 조선 수군 160척을 겹겹이 포위했다. 치열한 혼전과 기습을 당한 조선 전함은 모두 격침됐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지휘관은 전사하고 1만여 전 병력은 죽거나 흩어지고 말았다.
한 장수의 분별심을 잃은 화(Anger)가 조선 수군의 궤멸이라는 거대한 위험(Danger)을 초래한 것이다. 원균은 또 아들 원사웅(元士雄)을 데리고 참전했다가 아들마저 잃었다. 패전 후 도망가다 왜군에게 추원포(秋原浦)에서 참살당한 원균은 그 시체도 찾지 못했고 후세에 친척들이 경기도 평택시 부근에 가묘(假墓)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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