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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징비록(懲毖錄)

category 칼럼/이순신 기고 2016. 10. 5. 13:39


다시 읽는 징비록(懲毖錄)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눈앞 현실이 됐다. 북핵(北核) 때문이다.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는 가공(可恐)할만한 사태의 심각성에 둔감한 것 같다. 북한은 5차 핵실험에 이어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다 속 잠수함이나 터널, 열차 등 언제 어디서 쏠지 모르는 비대칭적 공격이므로 손자병법에 따르면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상황이다. 즉 적을 모르고 우리도 모르니(핵 방어책 부재) 매번 싸움이 위태로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설마주의에 빠져있다. 또 ‘누군가(미국, 중국) 지켜줄 것이다’는 사대주의도 팽배하다. 사대주의 못잖게 노블레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 정신의 실종은 이기주의로 극대화되고 있다. 내 마당 뒤에는 사드 등 군사시설 배치를 절대 반대한다는 님비현상이 그것이다. 북한의 핵개발 목표는 적화통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수상 처칠은 “평화는 공포의 자식”이라고 말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죽음도 무릅쓰고 극한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선주자들은 북핵 관련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존책을 분명하게 답해야 한다.


국가안위에 대한 오판(誤判)은 민족의 멸절 등 상상 이상의 참혹한 결과를 불러온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 통신사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치러가는 길을 빌려달라)를 놓고 당파적 시각에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가 결국 미증유의 참상을 불러일으켰다. 국토는 쑥밭이 됐고 죽어나는 백성들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처럼 흐르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대참극이 벌어졌다. 오늘날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북핵을 제어할 수 있는 나라는 북한에 식량과 석유공급을 해주는 중국뿐이다. 그러나 일당독재 공산국가인 중국이 가장 꺼려하는 것은 한반도가 평화통일이 됐을 때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민주국가인 대한민국과 미국의 군대와 마주하는 시나리오다. 따라서 중국은 완충역할을 하는 북한의 붕괴를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중국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속내를 찾아볼 수 있다. 


  필히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필히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중국의 통치철학은 1911년 이종오(李宗吾)가 초한지의 처세술을 정리해 놓은 후흑학(厚黑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얼굴은 두터워 뻔뻔하고 검은 속내는 음흉하다’는 후흑학은 동양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도 한다. 힘을 기를 때까지 납작 엎드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 한반도 사드배치 반대, 태평양에서 미국, 일본 및 주변국들과 대치하는 등 거침없이 상대를 협박하는 돌돌핍인(咄咄逼人)은 바로 그 맥락이다. 이 대목에서 중국은 1950년 미군을 물리치고 조선(북한)을 돕는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 기치를 걸고 중공군 50만을 보내 결국 한반도 통일을 가로막았다.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와 같은 나라이다. 중국은 1961년 북한과 조중(朝中)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북한이 존망(存亡)에 처했을 때 자동 개입하는 연계선 장치를 마련해놓았다.

1591년 2월 13일 이순신(李舜臣)은 정읍현감(종6품)에서 무려 7단계나 뛰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가 된다. 당시 왜란의 조짐이 심상치 않자 선조는 계급에 구애없이 유능한 장수를 선발해서 전방에 배치하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을 지시했다. 이때 우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이순신을 수군장수로서 발탁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 그런 혜안을 가진 류성룡의 지인지감(知人之鑑)에 감탄할 따름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도 여수에 부임해 관하 5관(순천, 흥양, 광양, 낙안, 보성), 5포(사도, 여도, 녹도, 방답, 발포)의 군선, 군기, 군량을 점검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다. 특히 비장의 첨단무기인 거북선을 창제해 지자, 현자총통을 탑재한 돌격선으로서 위용을 갖춰 왜 수군 전선을 분멸시키는데 앞장세웠다. 탐망 정보전에 능하고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주동권을 발휘한 이순신 장군의 23전23승 연승무패기록은 그를 세계 해군사에서 ‘군신(軍神)’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 선발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 왜군 15만8천여명이 줄줄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조총(鐵砲 뎃포)부대를 앞세운 왜군은 파죽지세로 달려 무(無)뎃포의 조선군을 상주(순변사 이일)와 충주 탄금대(3도 도순변사 신립)에서 일거에 격파하고 20일만에 한성에 무혈입성했다. 그때 가장 놀란 것은 선조 임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4월 30일 한양을 버리고 몽진(蒙塵)에 나선 선조는 5월 8일 평양, 7월 3일 의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에 내부(內附 망명)할 뜻을 밝혔다. 뼛속까지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신으로 가득하던 선조는 사신을 급파해 명나라 원군을 요청했다. 7월 10일 명나라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5천명의 선발대는 압록강을 건너와 17일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조총의 위력만 실감한 채 패배하고 요동으로 퇴각했다. 천군(天君)이랍시고 부린 만용의 결과였다.

선조는 또 명나라 조정에 애걸복걸한 결과, 1593년 1월 7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본진 5만명이 ‘항왜원조(抗倭援朝)’ 기치를 걸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패장 조승훈과 도체찰사 류성룡의 조선군 연합으로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명군은 불랑기포(佛狼機砲),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砲) 등 서양식 화포를 발사하여 평양성을 타격했다. 이때 승기(勝機)를 잡은 이여송은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벽제까지 남하했다. 그러나 1월 27일 고양의 여석령(礪石嶺)에 매복해 있던 왜군의 기습을 받아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혼비백산,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명군은 개성으로 물러났다가 멀찌감치 평양으로 후퇴했다. 이때 ‘전시재상’ 류성룡(柳成龍)은 이여송에게 후퇴해서는 안 되며 전열을 정비한 후 한양의 왜군 총본부를 쳐부숴야한다고 간청하며 읍소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이여송은 “군사와 말먹이를 준비도 못한 주제에 무슨 전투냐”며 류성룡에게 무릎을 꿇리고 군법으로 처벌하겠다고 협박했다.




                                            임진왜란 때 군량보급에 고생했던 서애 류성룡 대감


임진왜란은 군량전쟁이었다. 1592년 7월에 나왔다가 패하고 돌아간 조승훈 군대 5천명에게 보급한 한달치 식량은 4500석, 뒤이어 나온 이여송의 군대는 5만명으로 1년 치 군량은 무려 50만석이나 됐다. 당시 조선의 총세입이 60만석으로 보면 명군에게 좋은 곡식을 바친 다음에 조선군과 백성들에게는 태반이 썩고 상한 쭉정이가 돌아갔다. 그나마도 없어서 1594년에는 백성들 사이에서 서로 잡아먹는 인상식(人相食)이 횡행했고 전염병마저 돌았다. 7년 전쟁 내내 군량 동원에 동분서주했던 류성룡 대감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조승훈의 1차 평양성 패배로 왜군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조선에 파견된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 평양 강복산에서 강화협상을 시작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592년 9월 1일부터 50일 동안 휴전협정을 맺기로 했다. 그후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1593년 4월 8일 용산에서 두 번째 회담이 열렸다. 도체찰사 류성룡 대감은 이들이 조선강토를 가지고 찧고 까부는 거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1593년 6월 28일 진주성 2차 공방전 중에 강화교섭차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과 함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 규슈 나고야성(名護屋城)에 갔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에게 화건 7조(和件 7條)를 제시했다. 그 중 ‘조선 8도 중 북4도와 한성은 조선에게 돌려주고 남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는 일본에 할양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황제(신종)의 무능, 환관의 전횡, 이민족의 발호 등으로 재정이 고갈 상태였다. 따라서 이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는데 조선 북쪽 땅을 요동방어의 울타리로 삼는 번리지전(藩籬之戰)으로 처리할 심산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받아 조선 지배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것이었다. 명군과 군마(軍馬)의 군량조달과 분할저지에 목숨을 걸었던 류성룡은 “우리 강토의 땅은 한 자 한 치도 왜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땅을 치고 울부짖었다.


1594년 4월 명 황제 특사인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은 “왜군을 절대 토벌하지 말고 조선군을 모두 해체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이순신 장군 앞으로 보내왔다. 특유의 거만한 자세로 왜군을 얕보던 명군은 왜군과 15차례 전투에서 2차 평양성 전투를 빼고는 모두 패배했다. 그런데 바다에서의 싸움은 달랐다. 연전연승하는 이순신 수군을 붙들어 매지 못하면 강화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에 이순신 장군은 통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담종인에게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란 항의서를 보냈다.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편범불반(片帆不返)’의 정신이 충만했던 장군은 목숨을 걸고 명 황제의 지시에 분연히 맞섰다. 1593년 2월 도원수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이루자 경략 송응창은 권율에게 패문을 보내 왜와 싸워 이긴 것을 질책했다. 또 그해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고 성내 살아있는 모든 백성들이 도륙당했지만, 사신 심유경(沈惟敬)을 왜군 진영으로 보내 오히려 왜군의 만행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게 했을 정도다. 피아(彼我)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명군의 만행(蠻行) 또한 고려 때 몽고병을 능가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당(唐), 원(元), 명(明), 청(淸) 등 중국이 우리에게 저지른 작태와 횡포를 개략적으로 보더라도 약소국의 비애(悲哀)를 절감할 수 있다.

징비록에는 중국 사신 사헌이 류성룡(柳成龍)에게 “조선 백성들이 ‘왜놈은 얼레빗, 되놈은 참빗’이라고 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은 대화가 나온다. ‘되놈의 참빗’으로 말하자면 빗살이 굵고 성긴 얼레빗에 비해 대나무 참빗은 무척 가늘고 촘촘하여 한번 빗으면 남는 게 없어 명군의 수탈이 심했다는 이야기다. 명군이 조선 백성들에게 식량약탈은 기본이고 무고한 인명살상(전공을 위한 수급 채취용), 부녀자 겁탈, 토색(討索)질이 다반사였다. 명나라는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면서 내정간섭은 물론, 사신들은 온갖 뇌물을 요구했다. ‘의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수천리에 은과 인삼이 한 줌도 남지 않았고, 조선 전체가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다’고 선조실록은 전한다.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던 류성룡이 얼마나 미웠는지 1593년 4월 명군 총병 사대수(査大受)는 류성룡의 군관 사평(司評 정6품) 이충이 왜군을 사살했다고 해서 폭행해 중상을 입혔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에 따라 수로군(水路軍) 대장으로 1598년 7월 16일 전남 완도의 고금도에 도착하여 이순신의 수군과 합류했다. 진린의 임무는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서로군(西路軍) 대장 유정(劉綎) 제독과 도원수 권율(權慄)의 육군과 연합하여 순천왜성에 웅거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니시의 끊임없는 뇌물공세로 유정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다 퇴각했고, 역시 뇌물을 받은 진린도 “퇴각로를 열어주자”고 하다가 이순신의 간곡한 청에 마지못해 9월 16일 노량해전 때 조명연합수군 함대를 결성했다.

포학한 성품의 진린을 두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상(上)이 청파(靑坡)까지 나와서 진린을 전송하였다. 진린의 군사가 수령을 때리고 욕하기를 함부로 하고 노끈으로 찰방 이상규(李尙規)의 목을 매어 끌어서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역관(譯官)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재상들에게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하겠구나. 진린과 함께 군중(軍中)에 있으면 행동에 견제를 당할 것이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진린이 고금도에 내려온 지 3일만에 벌인 절이도 해전에서 그의 패악한 본색이 나왔다. 이순신이 처음 겪은 진린에 대한 장계가 선조실록 1598년 8월 13일자에 기록되어 있다.


‘멀리서 적선을 바라보고는 원양(遠洋)으로 피해 들어간 진린은 우리 군사들이 참획한 수급(首級)을 보고 그 관하(管下)를 꾸짖어 물리치고 이순신에게 공갈 협박을 가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이 마지못해 40여급을 나눠 보내주었다. 또 계유격(季遊擊)에게도 5급을 보냈다.’

진린의 명군은 조선 수군에게 행패를 부리고 백성들에게는 약탈을 일삼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이순신 장군은 진린에게 “백성들과 함께 떠나겠다”고 했다. 그러자 진린이 만류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귀국의 군사들이 나를 속국의 장수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러니 내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해준다면 서로 보존할 도리가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여 진린의 승낙을 얻어냈다.


류성룡(남인)의 피맺힌 절규인 망전필위(忘戰必危)!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는 이 외침에도 불구하고 당색이 다른 중신들은 귓바퀴로 흘러보냈다. 왜란이 끝난 뒤 우리민족 특유의 급망증(急忘症)이 도저 언제 그랬느냐듯이 태평무사하다가 채 30년도 안 돼 북쪽 오랑캐인 여진으로부터 두 차례 침범(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 끌려간 여성은 50여만명이었고 남은 백성들은 콩가루가 됐다. 300년 후 구한말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의 패악한 행동은 말할 것도 없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류성룡은 북인으로부터 주화오국(主和誤國), 즉 일본과 화해를 주도해서 나라를 망쳤다는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당한 뒤 고향 안동에 내려와 징비록(懲毖錄)을 피와 눈물로써 집필했다.


예기징이비후환(豫其懲而毖後患)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고

지행병진(知行竝進) 알면 행하여야 하며

즉유비무환(卽有備無患) 그것이 곧 유비무환 정신이다.


류성룡은 한양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이순신의 장재(將才)를 일찍 알아봤고 난세에 가장 ‘위대한 만남’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의 징비 정신은 이순신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임전무퇴(臨戰無退), 필사즉생(必死卽生) 및 백의종군 후 살신성인(殺身成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민주평통 통일시대 원고 2016.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