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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정여립(鄭汝立)의 난과 기축옥사(己丑獄事)

  • 선조 22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은 동인과 서인의 대립과 갈등이 깊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이 갈등이 임진왜란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으니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기축년(己丑年)인 1589년(선조 22)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났다.

 

정여립 난의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 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당시 기록을 종합하면, 정여립은 조선 중기의 끔찍한 모반자로서 성격이 포악 잔인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이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퇴관하였다. 그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원래 서인이었으나 집권한 동인에 아부하였고 스승인 이이가 사망한 뒤 그를 배반하였으며, 박순(朴淳)과 성혼 등을 비판하여 선조가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아 진안 죽도에 서실(書室)을 지어 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 무뢰배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 부윤이던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등의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서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승려였던 의연(依然) 등 기인과 모사를 끌어모았다. 또한 정감록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 즉,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말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는 또 “천하는 공물(公物)로 일정한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며 혈통에 근거한 왕위 계승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왕의 자격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며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不事二君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혁신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잡술에 능한 정여립은 장차 나라에 변이 일어나게 된다고 예언했다. 정여립은 임꺽정(林巨正)의 난이 일어났던 황해도 안악에 내려가 그곳에서 교생 변숭복(邊崇福), 박연령(朴延齡), 지함두(池涵斗)와 승려 의연(義衍), 도잠, 설청 등 기인 모사(謀士)와 사귀었다. 당시 세간에는 ‘목자(木子=李)는 망하고 전읍(奠邑=鄭)은 흥한다’는 정감록(鄭鑑錄)유의 동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정여립은 그 구절을 옥판에 새겨 승려 의연에게 지리산 석굴에 숨겨두도록 했다. 그런 뒤 변숭복, 박연령 등과 산 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위장해 자신이 시대를 타고난 인물로 여기게 했다고 한다.

 

동인-서인 징비록 관계도 ⓒ 김동철

 

또 천안지방에서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화적질을 하고 있었는데 용맹이 뛰어나 관군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정여립은 지함두를 시켜 황해도 지방으로 가서 “길삼봉, 길삼산(吉三山) 형제는 신병(神兵)을 거느리고 지리산에도 들어가고 계룡산에도 들어간다.” “정팔룡(鄭八龍)이라는 신비롭고 용맹한 이가 곧 임금이 될 터인데, 머지않아 군사를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팔룡은 정여립의 어릴 때 이름이었다.

 

이 소문은 황해도 지방에 널리 퍼졌고 “호남 전주 지방에서 성인이 일어나서 만백성을 건져,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리라.”는 말이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정치의 도리와 의(義)를 강조한 조식(曺植)의 문인이나 성리학의 주체적 해석을 강조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던 것으로 모반의 근거로 볼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에게서 그의 제자였던 안악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진안에 숨어 있다가 자결하였다. 그리고 옥남은 잡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고, 해서 사람 김세겸(金世謙), 박연령(朴延齡), 이기(李箕), 이광수(李光秀), 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하였다. 그 결과 다시 이들이 잡혀가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장살 당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정여립이 실제로 모반을 하였다고 확실히 드러난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이 서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당시에 제기되었다. 이 옥사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로 나누어진다.

 

첫째, 노비 출신인 ‘모사꾼’ 송익필(宋翼弼)이 당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 명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과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설이다.

 

 

위관 정철. ⓒ KBS 드라마

 

둘째, 당시 위관(委官 재판장)으로 있던 서인 정철(鄭澈)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이다. 서인 강경파인 정철은 평소 미워하던 동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했다. 그래서 ‘동인백정(東人白丁)’이란 말을 들어야 했다.

 

애초 영의정 유전(柳㙉), 좌의정 이산해(李山海), 우의정 정언신(鄭彦信), 판의금부사 김귀영(金貴榮) 등이 위관(委官)이 되어 관련 죄인을 문초하려 했다. 이때 고향에 있던 정철은 송익필(宋翼弼), 성혼(成渾)의 권유로 입궐해 차자(箚子 작은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정언신이 정여립의 9촌 친척이니 위관(委官)으로 적합하지 않다며 교체를 주문했다. 결국 서인 정철이 위관(委官)이 되어 심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서인의 모사꾼 송익필은 정철의 집에 묵으면서 동인 타도의 계획을 세웠다.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의 스승이었던 송익필은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으로 글을 잘했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셋째, 율곡 이이(李珥)가 죽은 뒤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라는 설이다.

 

넷째, 일부 조작된 바도 있으나, 당시 정여립이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 왕위를 물려주는 양위)에 의한 왕위계승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이다.

 

 

정언신 고문장면 ⓒ KBS 드라마

 

1589년부터 3년 동안 정여립의 사건과 관련된 국문(鞠問)이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으며,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남은 ‘반역향(反逆鄕)’이 되어 그곳 출신의 관직 등용에 제한이 가해졌다. 기축옥사의 정확한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기축옥사로 인해 이순신(李舜臣),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祺), 신립(申砬) 등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장수들을 이끌고 여진족 니탕개(尼湯介)의 난을 평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9촌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또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은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묘향산에서 끌려가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으며,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당대 저명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1590년 2월 이기, 황언윤, 방의신, 신여성 등 관련자가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을 비롯해서 이발, 이길(李洁), 이급(李汲) 세 형제와 백유양, 백진민 부자(父子), 조대중(趙大中), 유몽정(柳夢鼎), 이황종(李黃鍾), 윤기신(尹起莘) 등이 정여립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이 가운데 조대중은 억울한 희생양이었는데 관내 순찰 중 사랑하던 기생과 안타까운 이별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자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해서 울었다는 죄목으로 장살(杖殺)되었다.

 

1591년 서인은 동인인 이산해(李山海)와 류성룡(柳成龍)도 정여립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서인들의 지나친 세력 확대에 반발한 선조는 ‘간혼악철(姦渾惡撤)’ 즉 “간사한 성혼과 사악한 정철”이라며 정철(鄭澈)을 파직시켜 강계로 유배 보냈다. 그럼으로써 기축년(1589년)에 시작된 옥사(獄事)는 마무리되었다.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사미인곡 시비. 가사문학의 대가 정철은 정적을 제거하는 데 잔인함을 보였던 이중인격의 소유자였다. ⓒ 김동철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정철 등 서인에 대한 처리를 둘러싸고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다. 퇴계 이황(李滉) 계열의 남인(南人)과 남명 조식(曺植) 계열의 북인(北人)으로 동인이 다시 분화되었다. 광해군 때에 북인인 정인홍(鄭仁弘)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기축옥사 당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을 추진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기축옥사는 모반 사건으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기축옥사(己丑獄死)는 조선시대에 당쟁(黨爭)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의 첨예한 갈등은 1592년 임진왜란 발생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즉 조선 통신사 정사로 일본을 다녀온 서인 황윤길(黃允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분명히 전쟁을 일으킬 것 같다.”고 보고한 반면에 부사인 동인 김성일(金誠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쥐 눈을 가진 원숭이 같은 자로서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된다.”라고 보고했다. 결국 동인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김성일의 보고가 채택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대참화가 7년에 걸쳐 강토를 짓밟았다. 

 

기축옥사가 한창이던 1589년 12월 파견관리 차사원(差使員)을 맡아 상경하던 정읍현감(종6품) 이순신(李舜臣)은 우의정 정언신(鄭彦信) 대감이 대역죄로 의금부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면회를 신청했다. 정여립과 친하거나 편지를 교환만 해도 붙잡혀 어떤 변고를 당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평소 믿고 따랐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의리를 보이고자 했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을 때 경기 관찰사였던 정언신은 도순찰사로 여진족 공격을 지휘할 때 이순신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 관리를 권했다. 병조판서 정언신은 또 정여립 난이 있기 전인 1589년 1월 21일 비변사에서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직위고하를 묻지 말고 유능한 무신을 추천하라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 제안에 우의정 이산해와 함께 이순신을 천거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1591년 2월 1일 전라좌수사(정3품)에 제수되었다. 류성룡의 추천 이전에 이미 정언신은 이순신의 무재(武才)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군은 상경 중에 친분 있는 금오랑의 제안을 거절한 바 있다. 정여립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전라도사 조대중(曺大中)의 집을 수색하다가 압수물 중 이순신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빼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장군은 “단지 안부편지 답장이었을 뿐이고 수색품은 공물이니 사사로이 빼서는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살얼음판 위에서 장군은 당당함을 보였다.

 

‘사생유명 사당사의(死生有命 死當死矣)!’ 즉,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다.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라는 그의 사생관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이순신 친필. ⓒ 현충사

 

오늘날 국정농단 사태 재판에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파렴치한 모사꾼이나 단물을 다 빨아먹은 뒤 죽은 자에게 모든 걸 뒤집어 씌우는 정상배(政商輩)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 무엇을 엿볼 수 있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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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