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 번뜩이는 검명(劍名)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순신 장군의 살신성인은 그의 번뜩이는 검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54년 일생은 천신만고,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 1597년 정유재란 등 두 차례의 왜란을 맞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두 어깨에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고단한 삶이었다. 그러니 보통 범부(凡夫)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간난(艱難), 신고(辛苦)의 궤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세 차례의 파직과 두 차례의 백의종군으로 그의 삶은 갈가리 찢겼고 선조와 조정대신(서인 세력)과 원균(元均) 등 반대파의 세 치 혀에 휘둘렸다. 3도 수군통제사 자리에서 쫓겨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원균(元均)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자 다시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됐을 때 그는 선조에 대해서 한마디 서운한 원망도 표시하지 않았다. 쓰러지고 또 쓰러졌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늙은 어머니에 대한 효를 행하였고 먼저 가신 두 형님의 가족들을 포함한 식솔 20여명을 거두었다. 이 대목에서 그의 갸륵한 인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수군과의 23전에서 모두 전승하는 미증유(未曾有)의 기록을 세우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순국할 때까지 그 파란만장한 삶을 버틸 수 있었던 저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느 한 순간이라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격랑의 파도가 달려들어 그의 삶을 파괴시키려 했지만 그에게는 남모르게 힘을 얻는 것이 있었다. 바로 좌우명(座右銘)과도 같은 검명(劍名)이다. 수 년 전 아산 현충사를 찾았을 때 번득이는 두 자루의 장검에 새겨진 검명을 보는 순간, 나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검명은 그의 인생방향을 가리키는 방향타였고 나침반과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행적을 찾아 나섰다. 전라도, 경상도 남해안 곳곳의 격전지에서 그가 느꼈을 법한 생각의 흔적을 발견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
두 자루의 장검에 새겨진 검명이다.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즉, ‘세 척 길이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의 빛도 변하도다.’는 뜻이다. 당시 북로남왜(北虜南倭), 북방의 여진 오랑캐와 남쪽의 일본군을 맞아 싸워야 했던 장군의 정신은 이 두 검명을 되새기면서 마음을 다 잡았을 것이다. 조선의 강토를 한 치라도 침범한 원수(怨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맹서이다. 칼을 들어 하늘에 알리니 천지산하가 그 기운에 움직이며 감응(感應)했다고 표현했다.
또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는 ‘크게 한번 휘두르니 피로써 산과 강을 물들인다.’는 뜻이다. 무단 침입한 오랑캐들에 대한 나라와 백성의 한을 풀어주고야 말겠다는 의연한 결기가 담겨져 있다. 무장(武將)으로서 그의 좌우명은 오로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위국헌신(爲國獻身)과 충성보국(忠誠保國)으로 귀결된다.
아산 현충사에 보관된 장검은 1594년 4월 대장장이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어 장군에게 바친 것이다. 장군은 그 칼에 각각의 좌우명을 새겨 넣었다. 칼의 길이가 전장 197cm에 칼날만 137cm이다. 실제 이런 긴 칼을 휘두른 것은 아니고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 곁에 두고서 마음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1594년 장군은 통영 앞바다 한산도에서 운주당(運籌堂)과 수루(戍樓), 활터인 한산정(閑山亭) 등을 지어 3도 수군 통제영을 운영했다. 일본 수군은 그리 멀지 않은 부산포에 본영을 갖추고 웅천(진해), 사천, 고성, 거제 등지를 맘대로 드나들며 백성을 수탈하고 있었다. 장군은 외로울 때나 원균의 모함을 받아 화가 치밀었을 때나 조정에서 시기, 질투를 할 때마다 검명을 의연히 바라다보았다. 자칫 흩뜨려지려는 마음이 들 때에 그 검명을 다소곳이 바라보면 다시 초심(初心)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팔도 강토가 왜적에 짓밟혀 쑥대밭이 됐을 때에도 전투에 나가기 전날 밤에 일기를 쓰면서도 그 검명을 바라보면 어디에선가 오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도 맨 먼저 검명을 읊음으로써 하루가 시작되었다. 두 자루의 칼은 장군에게는 수호신(守護神)이자 보검(寶劍)이었다. 그런 장검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시절인 1963년 1월 보물 제326-1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두 자루의 칼이 보관된 곳은 한산도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 운주당은 1593년 8월15일 장군이 한산도로 진을 옮기고 이어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을 때 지은 통제영 본영이다. 지금의 제승당(制勝堂)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막료 장수들과 작전 회의 및 병사를 운영하는 곳이었다. 운주당(運籌堂)의 운주(運籌)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운주유악(運籌帷幄)에서 따온 말이다. 천막 안에서 주판알을 튕기듯 계책을 강구한다는 뜻이다. 정유재란 후에 불탄 운주당은 그 후 제승당(制勝堂)으로 다시 세워졌다. 제승(制勝)은 손자병법에서 따온 말로, ‘수인지이제류(水因地而制流)’ 물은 앞에 놓여있는 지형에 따라 물줄기를 바꾼다. ‘병인적이제승(兵因敵而制勝)’ 군대도 상대방의 형세에 따라 승리의 전술을 바꾸어야 한다. 장군이 이곳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 것도 왜적을 상대하는데 전라도 여수에서 출발해서 오는 거리와 시간의 단축을 위해서였다. 적의 예상 기동로를 막고 아군의 기동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최전방의 요충지에 진영을 설치한 것이다.
다음은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 내용이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운주당(運籌堂)이란 집을 짓고 밤낮을 그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쟁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비록 졸병이라도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와서 말하게 하여 군사적인 사정에 통하게 하였으며, 늘 싸움을 하려 할 때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교를 묻고 전략이 결정된 다음에 싸운 까닭으로 싸움에 패한 일이 없었다.”
이때 두 자루의 장검은 운주당의 한 켠을 굳게 지켰다. 장군의 주특기로 구분되는 선승구전(先勝求戰), 즉 이기는 싸움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싸움을 하는 주동권(主動權)을 가리킴이다.
1593년 가을, 장군은 한산도 진영의 수루에 올라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이란 진중음(陣中吟)을 읊었다.
수국추광모(水國秋光暮)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경한안진고(驚寒鴈陣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우심전전야(憂心轉輾夜) 가슴에 근심 가득해 잠 못 이루는 밤
잔월조궁도(殘月照弓刀) 새벽달이 칼과 활을 비추네
남해안 곳곳 요충지에 진을 친 일본수군은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언제 또 다시 불시에 기습을 해올지 모를 때였다. 조선 팔도는 일본군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바다에서나마 제해권을 장악한 장군의 어지러운 심사는 새벽달에 비친 두 자루의 칼날이 뿜어내는 섬광(閃光)으로 나타났다.
이 우국충정의 시조에 삼가현감 고상안(高尙顔 1553~1623)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고상안은 이순신과 같은 해(1576년) 문과에 급제해 각별한 인연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의 문집인 태촌집(泰村集)에 따르면 충무공 원운(原韻)에 보태어(附忠武公原韻) 운을 밟은 시조들이 잇달아 나왔다. 지금말로 화답시(和答詩)가 이어진 것이다.
갑오년인 1594년 4월 통제영에서 실시된 무과 별시 시관(試官)으로 무사를 뽑는 과거시험을 마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도원수 권율(權慄), 전라 좌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구사직(具思稷), 장흥부사 황세득(黃世得), 고성군수 조응도(趙凝道), 웅천현감 이운룡(李雲龍) 등과 함께 자리를 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이통제사의 ‘한산도 야음’ 한 수에 화답하여 통제사에게 각각 시조를 지어 바쳤다. 여기서는 장군과 친분이 깊은 고상안의 시조를 소개하려 한다.
충렬추상름(忠烈秋霜凜) 충성과 절의는 가을 찬 서리에 늠름하고
성명북두고(聲名北斗高) 명성은 북두성에 드높은데
성진소미진(腥塵掃未盡) 더러운 먼지 아직 다 쓸어버리지 못해
야야무용도(夜夜撫龍刀) 밤마다 용검을 어루만지네
장군의 진중음에 대해 고상안은 ‘더러운 먼지(왜적)를 다 쓸어버리지 못해서 밤마다 용검을 어루만진다.’며 장군의 분함과 애통함을 에둘러 표현했다.
오늘날 나라 안팎이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위험천만하게 돌아가고 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한 몸 바친 이순신 장군의 살신성인이 급하게 생각나는 때이다. 그의 사상을 지배했고 그를 그답게 만들어주었던 것은 바로 검명에 나타난 그의 좌우명으로 확인 가능하다. 모두들 저 잘났다고 목청을 높이는 소음이 가득한 가운데 미·중·일의 삼각파도와 북한 핵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한반도의 운명을 지켜줄 또 다른 좌우명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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