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 16세기 세계 최강 조선수군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가르치는 일본과는 언젠가 해상분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 해군이 강해져야 하는 이유이자 16세기 세계 최강의 수군을 이끈 이순신의 지혜를 배울 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부산포 기습 상륙과 정유재란 때인 1598년 10월 18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7년 동안 조선 땅에서 벌어진 미증유의 전쟁이다. 도원수 권율(權慄), 삼도 순변사 신립(申砬), 이일(李鎰) 등 조선 육군 수뇌부는 일본군의 조총(鳥銃 일본말로는 철포(鐵砲) 뎃뽀)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당시 조선 육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 제도에 따라 농사짓다가 불려나온 향토병이 대부분으로 칼싸움에 숙달된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히 화승총인 조총 발사 소리에 기겁을 하고 도망가는데 익숙해서 명나라 군사들은 ‘조선군은 겁쟁이 도망병’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마찬가지로 명나라 원군(援軍)도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이나 다름없어 일본군과의 공성전(攻城戰)에서 평양성 전투를 제외하고는 모두 졌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육전에서는 매전 필패였지만 바다에서는 조선수군이 연전연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창의정신과 선승구전의 유비무환 정신이 빛을 내면서 새로운 기록을 계속 이어갔다. 이는 장군의 창의를 담은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 즉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 지식을 넓히는 것’, 다시 말해서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치지 않고 걸어서 황하를 건너지 않는다.’는 포호빙하(暴虎馮河)는 곧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꾀(智謀)를 써서 일을 성공시킨다.’는 호모이성(好謀而成)이라는 말이 나온다. 먼저 탐망으로 적의 세력을 판단한 다음에 대응 전략을 짜고 싸움에 임하는 주동권을 가진 이순신의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이 주효했다.
그중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는 ‘돌격선’인 거북선을 창제해서 함대의 맨 앞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거북선의 건조를 감조군관 나대용(羅大用)에게 맡겨 훗날 세계 해전사에 기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장군은 1592년 7월 15일 한산대첩에서 거북선을 앞세운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구사해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1554~1626)의 수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은 1591년 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로 부임하자마자 그해 3월부터 거북선 창제에 나섰다. 관하 5관(순천, 낙안, 보성, 광양, 고흥) 5포(사도, 여도, 녹도, 발포, 방답)의 군사와 군기 및 군량 점검을 하면서 신상필벌에 따라 군대를 강도 높게 조련해나갔다.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없다.’는 말은 이순신의 전라좌도 수군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이순신은 또 사람을 끌어모았다. 1577년 전라좌수사를 역임한 ‘백전노장’ 정걸(丁傑)을 찾아가 나이 차이가 31년이나 났지만 조방장(助防將 참모장)으로 모시겠다고 청했다. ‘까마득한 후배장수’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정걸은 판옥선을 만든 주역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판옥선에 철익전 및 불화살 등을 쏠 수 있는 대총통을 설치해 조선수군을 최강의 함대로 만들었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정신으로 전투에 임했던 장군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정신이다. 원균(元均)이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 눕히려는 만용(蠻勇)을 부리다 그만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일본 수군에 의해 칠천량 해전(1597년)에서 조선수군을 모두 궤멸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장군은 ‘돌격선’인 거북선의 직충(直衝)전술과 본디 육전의 포위전술인 학익진(鶴翼陣)을 바다에서 구사해 적의 허점(虛點)을 여지없이 찔렀다. 일본군의 주특기인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을 막기 위해서 지붕에 철침(鐵針)을 꽂은 거북선이라는 ‘이상한 배’를 만들었다. 또한 칼을 다루는데 이골이 난 일본군이 배에 오르기 어렵게 판옥선의 높이를 높였고 가장 자리에는 방패를 설치했다.
거북선을 앞세워 적진에 들어가 종횡무진으로 휘저으면서 각종 포를 방포(放砲)함으로써 전열을 무너뜨리는데 효과적인 전법을 구사했다. 적의 조총 사정거리(50m) 바깥에서 천자, 지자, 현자, 승자 총통 등 각종 총포로 원거리 집중 포격을 했다. 그 후 적선에 접근했을 때는 조총보다 사거리가 긴 편전, 불화살 등을 쏘아댔다. 1대 1 단병전(短兵戰)에 약한 조선수군의 약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이 입체적인 화력전은 근대 해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300년 후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한 일본 해군은 영국에서 군함을 도입하고(하드웨어) 임진왜란 때 23전 23승의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의 전략(소프트웨어)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일본 해군은 거북선과 판옥선의 합동으로 쌍학익진(雙鶴翼陣)을 펼쳐 포위한 뒤 일시 집중타를 가하는 소위 ‘살보(Salvo) 타법’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구사했다. 일본해군은 그야말로 선조들의 뼈아픈 실패에서 배우는 체험적 교훈을 얻었다. 또한 이순신의 쌍학익진(雙鶴翼陣) 전술을 더욱 발전시켜, 적의 함대를 빙 둘러 에워싸고 일제히 포사격을 하는 원진법(圓陣法)이라는 신개념의 전술을 개발했다. 일본에서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청일해전(1894~1895년)과 러일전쟁(1904~1905년)에서 학익전을 응용한 T자 진법으로 청나라 북양함대와 러시아 발틱함대를 모두 궤멸 또는 수장(水葬)시켰다.
거북선의 직충(直衝) 전법은 적의 배에 돌진해서 깨트리는 당파(撞破)전술이다. 오늘날 현대전에서 래밍(Ramming) 전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DJ, 노무현 정권 때 NLL에서 북한 경비정이 남하, 월경(越境)하면 우리 해군 경비함은 곧바로 함포사격하지 않고 적선의 측면을 밀어냈는데 그 또한 당파전술의 하나이다.
장군의 창의성은 정철총통의 개발에서도 빛났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정신이다. 장군은 왜란 초기 조선육군이 왜 조총(鳥銃 뎃뽀) 공격에 ‘무(無)뎃뽀’로 대응하다 모두 당하고 도망치는 것에 착안, 1593년 8월 정철 총통을 개발했다. 군관 정사준(鄭思竣)에게 책무를 맡겼다. 정 군관은 대장장이와 종 등 천민들과 함께 기어코 정철총통을 만들어냈다.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장군의 불치하문(不恥下問) 정신의 발현이다. 그러나 이 정철총통은 선조에게까지 진상되었지만 흐지부지 그 존재가 없어졌다. 선조는 대신 “왜군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보내라.”는 영을 내렸다.
일본수군의 함선은 아다케 부네(安宅船)와 세키부네(關船), 하야부네(快速船) 등이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천만다행인 것이 일본수군에는 총통이 없었다. 총통을 탑재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일본 함선은 재질이 약한 삼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포를 발사했을 때 반동을 이길 수 없었다. 또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 배 밑을 뾰족하게 만든 첨저선(尖底船)이었다. 조선수군은 13~16세기 고려말, 조선 초기에 왜구(倭寇)들을 때려잡느라 만든 화약무기인 총통을 계속해서 발전시킨 결과, 일본수군과의 비교우위에 설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대본영은 조선 수군을 아주 우습게 봤기 때문에 수군의 전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저 규슈 일기도와 대마도에서 부산포로 병력과 병참 물자를 실어 나르는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다. 혼슈(本州), 시코쿠(四国), 규슈(九州) 사이에 위치한 세토내해 (瀬戸内海)의 몇몇 다이묘(大名)들에게 소속되어 있던 일본수군은 이순신 조선수군의 준비된 역량에 맞설만한 전력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참으로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않은 천행(天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았던 장군은 머릿속에서 지형지물을 파악할 정도였다.
1597년 5월 백의종군 시절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는 초계(합천)를 향해 전라도 구례의 섬진강 땅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4도체찰사(총사령관) 이원익(李元翼)이 이순신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1597년 5월 24일 난중일기 기록이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 연해안 지도(낙동강 하구에서 노량에 이르는 한려수도 해역)를 그리고 싶으나 그릴 방도가 없다고 하니 본 대로 그려서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려서 보내주었다.”
이런 장군의 뛰어난 관찰력과 예지력은 1597년 9월 16일 명량대첩 때 울돌목이라는 천혜(天惠)의 지형을 발견해내고 그 지세와 물길을 적극 활용, 13대 133이란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불가능 상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을 어디 하늘이 준 행운(天幸)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을까. 이충무공전서 중 조카인 이분이 기록한 ‘행록’에 그의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전선수과 미신불사즉(戰船雖寡 微臣不死則) 비록 전선은 그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살아있는 한
불감모아의(不敢侮我矣)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해역은 중국과 일본, 미국과 러시아 등 열강의 해군력이 집결되는 격랑의 바다로 변해가고 있다. 최근 일본 해상자위대는 카나가와현 요코하마 조선소에서 4번 항공모함 ‘가가’의 진수식을 가졌다. 이즈모급(22DDH)의 2번 항공모함이다. 갑판 길이 248m, 폭 38m, 1만9천500톤(만재 2만7천 톤)이다. ‘휴가’(181)와 ‘이세’(182)보다 갑판 길이가 51m 더 길다. 대형헬기를 14대까지 탑재할 수 있고 5대가 동시에 뜨고 내릴 수 있다. ‘이즈모’(183)와 ‘가가’(184) 항모는 현 갑판으로도 F-35B스텔스전투기(수직이착륙) 10~18대와 SH-60K 대잠헬기 4~6대를 동시에 탑재하여 운용할 수 있다. 일본은 F-35A 42기 도입을 이미 확정했다. 추가로 F-35B를 도입하여 22DDH에서 운용하는 것을 검토하겠다는 방위성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일본은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항모를 운용한 경험이 있다. ‘휴가’와 ‘이세’ 항모는 2013년에 미일연합훈련을 통해 MV-22(오스프리) 등의 대형항공기 운용경험을 숙달했다. 22DDH는 스페인 경항모 후안카를로스(231m), 영국 경항모 인빈서블(209m)보다 크다. 하지만 중국항모 랴오닝(305m)보다는 작다. 중국은 다롄시 창싱다오 조선소에서 자체기술로 랴오닝함보다 배수량이 2만 톤이 큰 8만5000톤급을 건조중이다.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가르치는 일본과는 언젠가 해상분쟁을 한판 겪을 것이 확실하다. 또 중국과 이어도 분쟁도 예고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제주해군기지는 우리에게는 불침항모(不侵航母)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런데 한미연합훈련을 마친 미군 함정이 그곳에 들어왔다며 극렬 반대하는 배은(背恩)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세월호 침몰과 천안함 폭침이 미군 잠수함에 의한 것이라는 가짜 뉴스에 아직도 혹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경(卿의)은 ‘평화는 공포의 자식’이라고 했다. 힘이 없으면 먹히는 때인데, 안보 무임승차하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다. 오호 애재(哀哉)라! 이순신 장군의 할(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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