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 이순신처럼, 산처럼 무겁고 신중하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출사표(出師表)를 보면 한결같이 적폐청산, 통합의 키워드를 내세워 나라를 되살리겠다는 포부를 밝히지만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외교, 안보, 국방 분야에서는 불협화음의 엇박자를 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400여년 전 일본군의 기습침략으로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와 백성을 살려낸 충무공 이순신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 음력 3월 8일 한양 건천동(지금의 충무로 명보아트홀 부근)에서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 卞氏) 사이에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이내 마르는 지역으로 건천동(乾川洞)이라는 지명이 붙었는데, 우리말로는 마른내골이다. 3월 8일은 양력으로 4월 28일이 된다. 그래서 많은 지자체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꽃 피고 새 우는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옛지명) 아래 마을에는 3살 터울 동네형인 서애 류성룡(柳成龍 출생지 경북 의성)이 필동(대한극장 옆)에 살았고 이순신과 수군통제사 자리를 놓고 싸웠던 악연의 원균(元均 출생지 평택) 또한 이웃이었다. 우리에게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 저자로 유명한 허균(許筠)도 이곳 사람이다. 이순신은 10대 때 어머니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 스물한 살 되던 해 전 보성군수 방진(方辰)의 무남독녀 외동딸과 결혼하면서 무관출신인 장인의 권유로 무과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한양 건천동에서 류성룡, 원균과 함께 동네 서당을 다니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글 읽는 것보다 전쟁놀이에 더 신나했다. 목멱산 자락에서 전쟁놀이를 할 때 반드시 전투를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되곤 했다. 이순신이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 임진장초(壬辰狀草), 서간첩(書簡帖) 등 전쟁문학기록물(국보 제76호)은 그에게 문재(文才)가 탁월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어려서 서당공부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난중일기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이런 이순신을 두고 후세 사람들은 문무겸전(文武兼全)을 두루 갖춘 인재라고 일컫는다.
1590년 일본의 전국(戰國)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 결집된 세력을 나라밖으로 돌려 휘하 다이묘(大名)들에게 영지를 나눠주려는 야욕에 불탔다.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과 인도까지 넘보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바로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15만여명이 부산포에 기습상륙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13일 이순신은 정읍현감(종6품)에서 무려 7단계나 뛰어올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로 여수 좌수영 본영인 진해루(鎭海樓)에 부임했다. 오늘날 여수의 진남관(鎭南館 국보 제304호)은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1599년 4대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인 이시언(李時彦)이 정유재란 때 불에 탄 진해루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 관할 5관 5포의 군사훈련, 군기, 군량, 군선 등 전투준비태세를 엄격한 신상필벌의 자세로 점검했다. 5관은 지금의 5개 지자체인 여수, 순천, 광양, 흥양(고흥), 보성이고 5포는 수군진으로 여수 돌산도의 방답진과 고흥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이다. 이곳 수장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내내 이순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전투에 참여했다. 전라좌수영은 그래서 ‘구국(救國)의 성지(聖地)’라고 불린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바로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 난중일기에는 “거북선에서 지자, 현자총통을 시험 발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4월 13일 왜군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만 8천여명이 부산포에 기습상륙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 박홍(朴泓)과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원균(元均)은 각 진의 병선(兵船)을 바다에 침몰시키고 총통을 땅에 파묻은 뒤 허겁지겁 줄행랑을 쳤다. 이른바 청야(淸野) 작전이었다. 원균은 화급하게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이순신은 여수 진해루에서 휘하 장수들과 함께 ‘경상도(慶尙道) 부원(赴援)’, 즉 경상도로 진출해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 토론한 뒤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때 녹도 만호 정운(鄭運)과 군관 송희립(宋希立)이 “적을 토벌하는데 우리 도(道)와 남의 도(道)가 따로 있느냐. 당장 나아가자.”고 역설하자, 이순신은 조정의 출전명령을 받은 뒤 5월 7일 거제도로 출전, 옥포에서 첫 해전을 벌여 서전(緖戰)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날은 선조의 피난행렬이 개성을 거쳐 평양성에 입성한 날이다. 이순신 함대는 본영인 여수 앞바다에서 판옥선(板屋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고기잡이 어선) 46척 등 모두 85척으로 출전했다. 고성 당포 앞바다에서 기다리던 원균의 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합세해 경상-전라수군의 통합함대의 진을 갖춘 뒤였다.
물령망동(勿令妄動) 정중여산(靜重如山)!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에게 “허튼 행동을 일체 하지 말고 산처럼 무겁고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옥포에는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0여 척이 홍백기를 달고 해안에 정박해 있었고, 왜적들은 상륙해 민가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이 일제히 불을 뿜어 우레와 같았고 불화살은 날아가 왜선 26척을 순식간에 분멸시켜 검붉은 화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비규환 속에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해 거제 장목면 영등포(永登浦)를 거쳐 창원 합포(合浦 마산)에서 5척, 다음 날 고성 적진포(赤珍浦)에서 11척을 각각 불태우고 9일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로 돌아왔다. 제1차 출동에서 적함선 44척을 격침 또는 분멸시키는 대승을 거둔 것이다. 5월 말에야 이순신의 승첩을 접한 선조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의 전공을 높이 사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하계)의 품계를 내렸다.
이어 이순신은 제2차 출동을 감행,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격시켜 직충술(直衝術)로 적진을 교란시키며 각종 화포를 방포함으로써 적선을 격파해나갔다. 그 와중에 이순신은 왜군의 조총에 맞아 관통상으로 한동안 고생을 심하게 했다. 이어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적선 67척을 격침시키는 등 연승행진을 거듭했다. 6월 22일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제2차 출동의 승첩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이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하계)로 올리는 유서(諭書)를 내려 보냈다.
한껏 승기가 오른 이순신은 여세를 몰아 제3차 출동을 했다. 7월 7일 당포에 머물 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으로부터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의 일본함대가 거제 견내량(見乃梁)에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바로 후방에는 해적출신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 후속 함대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함대와 합세해 전선 48척,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을 합쳐 도합 55척의 명실상부한 조선 수군연합함대를 갖추고 왜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3척을 맞아 47척을 불사르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방면으로 허겁지겁 꽁무니를 뺐다. 남겨진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상륙했다가 먹을 것이 없자 뗏목을 만들어 뒷날 겨우 탈출했다. 마나베 사마노조(眞鍋左馬允)는 이때 자신의 아타게 부네(安宅船)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하였다. 이 7월 8일 한산대첩에서는 육전에서 쓰는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해상작전에 응용했고 ‘바다의 탱크’인 거북선을 맨 앞에 배치해 적을 몰살시킨 결과, 훗날 세계 해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한산대첩은 도원수 권율(權慄)의 행주대첩,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상계),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상계)로 승서(陞敍)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이순신 수군은 제4차 출전에 나서 9월 1일 부산포의 왜군 본진을 공격해 120여척의 적선을 분멸시켰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4차례 출전을 감행,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연전연승을 기록한 전략기지가 되었다.
이순신은 다음해인 1593년 7월 15일 경상도 지역인 한산도로 수군진을 전진 배치했다. 8월 15일에는 선조로부터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의 임명교지를 받았다. 한산도에 객사인 운주당(運籌堂 후에 제승당이 됨)을 짓고 왜병(倭兵)을 깨뜨리는 전략을 짰으며 군사에 관한한 상하의 의견을 모두 듣는 소통의 장소로 만들었다. 1597년 2월 26일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 선발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일본수군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누명을 쓴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될 때까지 3년 7개월 동안 한산도 진영을 지켰다. 사실 이 기간(1594~1596년)은 명나라-일본 간 강화협상 시기로 전쟁이 소강상태였기에 웅포, 당항포, 장문포 수륙합동작전을 빼놓고 이렇다 할 큰 전투는 없었다. 게다가 명 황제 특사인 담종인(譚宗仁)이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와 ‘왜군을 공격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 교착국면에서 이순신은 한산도 진중 무과시험을 실시했고, 남해안 곳곳에서 피난민을 활용한 둔전(屯田)을 일궜으며 염전경영과 고기잡이를 해서 군량의 자급자족 체계를 세웠다. 현재 통영의 세병관(洗兵館 국보 제305호)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5년 6대 통제사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경준(李慶濬)이 지은 것으로 이순신은 아쉽게도 살아생전 이곳을 밟지 못했다.
필자는 400여년 전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남해안 전적지를 수년째 취재하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여수의 이순신’과 ‘통영의 이순신’이 따로 있다는 느낌이었다. ‘여수와 통영은 왜 이순신 제독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갇아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이순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서울(출생지), 아산(현충사, 생가, 무덤), 부산, 사천, 고성, 마산, 진해 및 통영 한산도, 해남과 진도군 사이 울돌목, 최후를 마친 남해 노량 관음포와 시신이 가매장됐던 완도군 묘당도, 목포 고하도 등지는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유허지(遺虛址)이다. 또한 백의종군로(서울, 경기, 충남, 전북, 전남, 경남 하동-진주-합천)와 수군재건길(전남 구례, 곡성, 순천, 보성, 고흥)은 여러 지자체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작금 각 지자체는 이순신 기념축제를 각각 따로 행하는 바람에 ‘동네잔치’로 격하된 느낌이다. 이에 따라 충무공 이순신은 ‘쪼개진 군신(軍神)’으로 존재하고 있다. 통영의 문화마당에는 3척의 거북선(한강, 통제영, 전라좌수영)이 바다위에 떠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2012년 제작된 통제영 거북선 지붕에는 못과 칼 등 철침(鐵針)이 없는 밋밋한 판자 형태로 관광객을 맞고 있다. 거북선의 특징이 사라진 거북선을 보는 느낌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순신의 현창사업과 관련, 역사적으로 보면 정조대왕은 이순신 관련 자료를 모두 모아서 자신의 사금고인 내탕금(內帑金)을 내어서 이충무공전서라는 방대한 기록물을 남겼다. 이후 잊혀졌던 이순신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에 의해서 역사 밖으로 나와 광화문 동상건립, 아산 현충사 정비, 남해 노량과 관음포 사당개수, 한산도 진영 정비 및 한산대첩비 건립 등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람 앞의 촛불신세였던 나라 구하기에 앞장섰고 2만여명의 군사들과 수백만 피란민들의 구휼을 돕기 위해 개척한 둔전(屯田)과 염전(鹽田)의 흔적은 아직도 남해안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나라사랑 충심(忠心)과 부모사랑 효심(孝心 여수 자당 기거지) 및 애민(愛民)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지금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이 시점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충, 효, 애민의 정신을 기리고 드높여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다. 마침 국토부는 통영 한산도에서 여수 돌산도를 거쳐, 고흥반도까지 한려수도 관광뱃길을 만든다고 하니, 이순신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23전 23승의 전적지(戰迹地)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적극 개발해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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