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 두 번째 백의종군
갖은 모함으로 죄인이 된 이순신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굳건한 자세로 백의종군한 바 있다. 그 두번째 이야기.
1597년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선조의 체포령에 따라 한산도 진영에서 함거(轞車)에 실려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3월 4일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사헌부가 지목한 죄명은 기망조정(欺罔朝廷) 무군지죄(無君之罪), 종적불토(縱賊不討) 부국지죄(負國之罪), 탈인지공(奪人之功) 함인어죄(陷人於罪), 무비종자(無非縱恣) 무기탄지죄(無忌憚之罪)였다. 즉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쫓아가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등이었다. 이 죄목을 종합하면 이순신은 영락없는 사형감이었다. 생사여탈권을 쥔 선조가 대로(大怒)했으니 말리는 사람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칙에 충실한 이순신은 이중간첩 요시라(要矢羅)의 간계(奸計)를 믿을 수 없었기에 “부산포에 상륙하는 적을 나아가 물리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릇 전장의 전투 승패 여부는 현장 지휘관이 훨씬 더 잘 아는 터. 인사권을 가진 왕과 조정 중신들이 천리 밖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참으로 우스울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라이벌인 원균(元均)을 지원하는 서인세력은 서슬이 퍼런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순신의 명령불복종을 그대로 덮고 넘어가지 않을 태세였다. 그런데 그때 노신(老臣) 정탁(鄭琢)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순신의 죄를 사하게 하는 신구차(伸救箚)를 올려 이순신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선조는 살려주는 대신에 경상도 초계 도원수 권율(權慄)의 군영에 가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꼭 10년 전인 1587년 이순신은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근무할 때 여진족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백의종군을 당한 바 있다.
4월 1일 투옥된 지 27일 만에 특사로 풀려 나온 이순신은 하얀 소복(素服)을 입은 무등병(無等兵) 신분으로 말 한 마리에 의지한 채 숭례문(남대문)을 빠져나왔다. 조카 봉, 분, 아들 울(蔚)과 함께 이순신은 윤간의 여종 집에서 윤사행(尹士行), 원경(遠卿)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휘하 장수였던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져와서 함께 마셨다. 영의정 류성룡(柳成龍),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禧壽), 우의정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최원(崔遠), 곽영(郭嶸) 등이 사람을 보내와 문안하였다. 다음날 해거름에 이순신은 다시 남문으로 들어가 영의정 류성룡과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성룡은 이순신과 건천동(마른내골)에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형이자 ‘평생 멘토(mentor)’였다.
그 이튿날 동작나루를 건너 인덕원에서 말을 정비하고 수원 하급 병졸의 집에 도착하여 유숙했다. 이어 독산(오산) 아래에 이르러 조발(趙撥)의 접대를 받았다. 진위구로(평택)를 거쳐 냇가에서 말을 쉬게 하고 오산 황천상(黃天祥)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내은손(李內隱孫)의 집에 도착하여 따뜻한 방에서 욱신거리는 몸을 지졌더니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장군은 평소에도 만성 위장병과 신허증(腎虛症)에 시달렸다. 난중일기에 ‘몸이 몹시 불편해 땀이 온몸을 적셨다.’,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하며 밤을 새웠다.’, ‘밤 10시쯤 땀이 나 등을 적셨는데 자정쯤에 그쳤다.’, ‘자다가 땀이 너무 나서 옷을 갈아입었다.’라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선산이 있는 아산 음봉면의 어라산에 갔다가 저녁 때 외가를 거쳐 조카 뇌의 집에 이르렀다. 호송책임자인 금오랑 이사빈을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유숙케 하고 정성껏 환대하였다. 이순신은 남양 아저씨 문상(問喪)을 하고 그 길로 홍석견(洪石堅)의 집에 들렀다. 저녁나절 변흥백의 집에서 금부도사와 이야기를 하며 접대하였다. 다음날 금부도사가 먼저 온양으로 떠났다. 7일에는 충청도 예산(禮山)현 정혜사(定慧寺)의 노승 덕수(德修)가 찾아와서 이순신에게 짚신 한 켤레를 바치려 하자 “내가 산승의 초혜(草鞋)를 받을 까닭이 있나.”라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노승의 끈질긴 간청에 결국 짚신을 받고나서 노자(路資)를 쥐어보냈다.
마침 엎친 데 덮친 상황이 발생했다. 1597년 4월 12일 난중일기다.
‘어머니가 여수(고음천)에서 배편으로 안흥량(태안군)에 도착하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였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날 뛰었다. 바위 모양이 게를 닮아 해암(蟹岩 게바위)이라는 곳으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빈소마저도 오래 지킬 수 없었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李秀榮)이 남행길을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4월 16일자 난중일기에는 양세대작(兩勢大作), 남행역추(南行亦追), 호곡호곡(呼哭呼哭), 지대속사이(只待速死而)라고 적혀있다. 즉 ‘어머니 초상을 치러야 하는데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일도 급하다. 그저 꺼억꺼억 울부짖으며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라는 처절한 심경을 토로했다. 당시 부모상을 당하면 3년 동안 시묘를 했는데 죄인의 몸으로 더 이상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19일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길을 떠났다. 아들 회, 울, 면, 조카 해, 분, 완과 주부 변존서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왔다. 공주 일신역에서 잤다. 공주 정천동을 거쳐 저녁에 이산 현령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이산 동헌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해 은원(논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렀다. 4월 21일 한양에서 444리 지점인 여산을 출발하여 4월 25일 남원 숙성령에 이르렀다. 이순신은 말을 타고 하루에 12km정도씩 이동했다.
하옥(下獄)과 백의종군, 어머니의 죽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의 딱한 처지를 토로할 상대는 없었다. 그저 말 잔등에 올라타서 뚜벅뚜벅 이동하는 고행(苦行)만 계속되었다. 4월 21일 여산에 도착했다. 당시 이곳에는 하삼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여산원(礪山院)이라는 큰 여관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관노비(官奴婢)의 집에서 잤다. 아무리 생각해도 밀려오는 회한(悔恨)과 절대고독감을 물리칠 수 없었다.
‘한밤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참혹한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살려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1905~1997) 박사는 사람이 극한 절망에 처해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변화(變化)를 역설했다. 즉 어떠한 상황이 닥쳐와도 반드시 살아서 꼭 해야할 일을 하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곧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신묘한 최고의 경지’는 자벌레가 움츠리고 있는 것은 몸을 뻗어서 나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듯이 이순신에게도 이보전진(二步前進)을 위한 일보후퇴(一步後退)의 상황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4월 22일 여산에서 삼례역 역장관리의 집에 도착했다. 삼례는 조선의 9대 대로 길 중에서 6, 7번 도로가 만나는 교통요지였다. 전라도 순천, 여수, 고흥, 광양 방면과 경상도 남해, 함양, 진주, 고성, 산청, 통영 방면으로 가는 시발점이었다.
4월 22일 저녁 전주 남문 밖 이의신의 집에 도착해 유숙했다. 한성에서 전주부까지는 5백16리의 길이었다. 전주부 읍성은 전쟁의 병화(兵禍)로 사방의 문루가 불에 타서 볼썽 사나왔다. 이의신은 정5품 호조정랑을 지낸 사람으로 전남지역의 기대승(奇大升), 보성의 안방준(安邦俊) 등과 교류를 하는 사림(士林)이었다. 4월 23일 전주를 일찍 떠나 오원역에 도착해 말을 쉬게 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이때 의금부 도사가 와서 만났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는데 임실현감 홍순각(洪純慤)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그리고 옛 군관시절 우위장을 지낸 정철(丁哲)을 만났다. 정철은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여수 전라좌수영에 부임했을 때 이순신의 모친 변씨 부인의 거처와 가사를 돌본 적이 있었다. 정철은 정경달(丁景達)과 함께 장군이 하옥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구명활동을 한 인물이다.
쑥대밭이 된 남원성 주변의 피폐한 상황을 지켜본 장군은 피가 끓었다. 그리고 다시 분연히 일어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4월 25일 아침밥을 먹은 뒤 길을 떠나 운봉의 박롱(朴巃)의 집에 들어갔다. 당시 남원부에는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도원수 권율은 지휘관 회의 차 양원을 만나러 이곳에 자주 온다는 말을 박롱에게서 들었다. 이순신은 숙성령(宿星嶺)을 통해 구례로 들어갔다. 숙성령은 왜군이 남원성을 칠 때 이용한 전략요충지였다. 도원수 권율이 있는 초계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지점이다. 순천부에 도착해 체류하는 동안 정사준(鄭思竣) 등 한때 부하였던 여러 군관을 만나 해안 정보를 수집했다. 정사준은 이순신의 지휘아래 대장장이 낙안수군 이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김해 사찰의 종 동지, 거제 사찰의 종 언복 등을 데리고 대장간에서 정철(正鐵)을 두드려 화승총(火繩銃)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4월 26일 금부도사와 헤어져 홀가분한 몸이 된 이순신은 정사준을 대동하고 자신에게 호의적인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을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다. 순천에 18일 동안 체류하면서 도원수 권율의 군관 권승경과 병마사 이복남(李福男), 순찰사 박흥로, 순천부사 우치적 등 74명을 직간접으로 접촉해 적정(敵情)과 아군의 군세를 살폈다. 권율은 군관 권승경을 보내 이순신의 소식을 타진했다.
“상중(喪中)에 몸이 피곤할 터이니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그리고 이순신과 절친했던 군관 중에 한 명을 차출해서 보좌역으로 쓰도록 배려했다.
구례현 손인필(孫仁弼)의 집에서 구례현감 이원춘을 만났다. 손인필은 왜란이 일어나자 남무(南武)라는 직책으로 군수품 조달과 군사를 모아 왜군을 무찌른 관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구례지역 9개 사창(社倉 환곡창고)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의 3남 손숙남(孫淑南)은 구례 석주성 상황을 보고했다. 장남 손응남은 이후 이순신을 따라 전투에 나섰다가 순절했다. 병참물자와 군량조달이 시급했던 이순신은 손인필 일가의 협조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5월 19일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군관 이지각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위로하였다.
“일찌기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듣고 놀라 애도한다.”며 저녁에 동헌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원익은 구례현청 동헌에서 하얀 소복(素服)을 입고 이순신을 만났다. 이원익은 “임금이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하였다.”고 전했다. 이에 이순신은 “시국의 그릇된 일에 수없이 분개하고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면서 하루빨리 전투에 임하고자 하는 임전(臨戰) 계획을 밝혔다.
체찰사와 만난 이순신은 초계의 권율 원수부로 향했다. 장맛비에 행장이 흠뻑 젖고 몇 번씩 넘어지면서 겨우 석주관에 도착했다. 곁에는 차남 울(蔚)이 있었다.
6월 8일 도원수와 그 일행 10여명과 만났다. 이순신은 그날 몸이 매우 불편하여 저녁밥을 먹지 못했다. 11일에는 아들 열이 토사로 밤새도록 신음했다. 그날 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경상수사 배설, 가리포 첨사 이응표, 녹도만호 송여종, 여도만호 김인영, 사도첨사 황세득, 동지 배흥립, 조방장 김완,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남해현감 박대남, 하동현감 신진, 순천부사 우치적 등 한때 부하였던 장수들에게 편지를 썼다.
7월 18일 새벽 이덕필, 변홍달이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는 비보(悲報)를 전했다. 원균의 지휘통제 하에서 조선수군이 궤멸당한 칠천량 패전이었다. 억장(億丈)이 무너지는 비보(悲報)를 접한 이순신은 권율에게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내려가서 보고 듣고 와야겠다.”고 말하자 권율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눈치였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을 접한 선조는 부랴부랴 다시 이순신을 찾았다.
8월 3일 진주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孫景禮)의 집에 머물 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선조의 교서와 유지를 가지고 왔다. 이순신은 말없이 임명교서를 받은 뒤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숙배(肅拜)를 했다. 그러나 3도 수군통제사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다시 부여받았지만 그는 수중에 군사도, 군기(軍器)도, 군량도 없는 적빈(赤貧)의 빈털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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