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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조선 당쟁의 사분오열(四分五裂)

우리나라의 정치권 당쟁은 그 역사가 조선 선조시대로 올라간다. 당쟁은 때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정의로운 잣대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백성의 피폐한 삶을 구제하기 보다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끼리끼리 패거리 문화를 만들었다.

 

‘보수는 부패해서 망하고 진보는 분열해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프랑스 대혁명(1789~1794년) 이후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말이었다. 루이 16세는 1793년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과 무능으로 일관했다는 이유로 단두대(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나마 고통이 덜한 기요틴(guillotine)이라는 형구를 사용해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고들 했다. 부패한 절대왕권에 대한 성난 시민들의 분노가 피로써 폭발한 것이다. 

 

당시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도르 등 계몽철학자들은 시민의 저항의식을 고취시켰는데 일조했다. 특히 루소의 시민주권론, 즉 ‘모든 권한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인의식은 곧 시민혁명으로 완성됐다. 그야말로 군주민수(君舟民水)!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성나면 배를 뒤집어버린다. 이런 이치가 어디 18세기 서양에서만 있었겠는가. 세월이 흐른 작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똑똑히 목도했다.    

 

우리나라의 정치권 당쟁은 그 역사가 조선 선조시대로 올라간다. “공자 왈, 맹자 왈.” 글을 배운 유림(儒林)들 사이에서 이합집산과 사분오열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당쟁은 때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정의로운 잣대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백성의 피폐한 삶을 구제하기 보다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끼리끼리 패거리 문화를 만들었다. 권력과 재물의 달콤한 꿀맛에 취해서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몰두하다가 결국 대한제국은 1910년 지도상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급망증(急忘症)! 급하게 빨리 잊어버리는 우리 민족의 DNA도 한몫했다. 여전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모른 채 그 이후에도 나라는 좌우 이념으로, 지역적으로, 세대 간 삐걱거림과 쪼개짐으로 여전하다. 정치권에서는 동교동계, 상도동계, 친노, 비노, 친박, 비박 등 귀에 익은 말들도 다름 아닌 붕당(朋黨)의 개념이다. 게다가 중국을 조공국(朝貢國)으로 섬기는 사대주의 전통은 사드 배치를 놓고 중국에게 ‘할까요? 말까요?’를 묻는 상황으로까지 뼛속에 녹아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무덤을 박차고 나올 치욕이요 망조(亡兆)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 의미로서 지난날 당쟁의 역사 이야기를 풀어본다.

 

 

붕당을 이뤘던 조선 관료를 배출한 국립대학 명륜당. © 김동철

 

당쟁(黨爭)은 16세기 후반 조선 후기 사림(士林) 정치에서 나타난 정치 현상이다. 이 대목에서 조선의 당쟁사는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분류를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첫째, 사대부(士大夫) 정치기

고려 말 조선 초인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에 유학적 소양을 지닌 문관 관료인 신흥 사대부들이 집권한 시기를 말한다. 12세기 원나라를 통해 전래된 주자학(朱子學)은 무신정권 당시 정계에 새로 진출하던 신흥사대부들의 이념적 무기였다. 예의(禮儀)와 염치(廉恥)를 숭상하는 주자학 이론으로 권문세족(權門勢族)의 부정부패를 공격했다. 신흥사대부 가운데는 문관뿐 아니라 이성계(李成桂) 같은 신흥 무장세력도 포함된다. 이들은 행정실무자인 서리(胥吏)와 여자, 환관(宦官)들의 정치참여를 철저하게 봉쇄했다. 조선 건국초기에는 중앙집권제의 강화를 위해 군현제도를 개편하고 지방 향리를 행정 실무자인 중인(中人)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군현마다 향교를 설치해 유교 교육을 강화하고 여기서 길러진 인재들을 과거 시험을 통해 중앙관료로 불러올렸다.

 

둘째, 훈신(勳臣) 정치기

신흥 사대부들이 기득권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귀족으로 부상했다. 왕권은 철저하게 제약받았고 국가의 법제는 이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편파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런 가운데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사대부 정권을 타도했다. 이때 세조의 정란공신(靖亂功臣)이 생겼고 이후 성종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250명의 공신이 등장한다. 인사권과 언론권이 대체로 재상이나 대신들에게 있었다. 세조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을 대신할 세력으로 김종직(金宗直) 등 젊고 야심 있는 지방 사림(士林)을 정계에 불러들였다. 사대부가 문무(文武) 관료를 의미하는데 비해 사림(士林)은 유교 교양을 갖춘 독서인층(讀書人層)의 양반 지식인들이었다. 훈구파가 문장을 중시하는 사장파(詞章派)인데 비해 사림파는 주자학의 철학이념을 깊이 연구해 훈구파의 부정과 부패를 공격했다.

 

훈신정치는 세조 때부터 중종 때까지 이어지다가 중종 말기부터 명종 때까지 권신(權臣)정치가 잠시 등장했다. 공신세력이 늙어죽고 과도한 개혁을 주장하는 사림파에 염증을 느낀 왕이 사림파에게서 등을 돌린 사이 외척(外戚) 권신들이 그 틈바구니를 파고들었다.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은 중종 26년을 기점으로 한다. 이 시기는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들이 기묘사화(己卯士禍) 등으로 화를 입고 외척들의 손아귀에 정권이 넘어가는 때이다. 김안로(金安老), 윤임(尹任), 윤원형(尹元衡), 이량(李樑) 등이 외척 권신으로 이들의 집권은 아주 짧은 시기였다.

 

김안로(金安老), 윤임(尹任) 등은 세자를 등에 업고 득세를 하지만, 문정왕후에게 적자가 태어나면서 윤원형(尹元衡)과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골육간의 투쟁으로 변한다. 이 같은 외척들의 각축에서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鄭蘭貞)은 특유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며 신분 상승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셋째, 사림(士林) 정치기

명종 이후 경종까지 계속된다. 16세기 훈신세력은 네 번의 사화(士禍)를 통해 사림세력의 성장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사림파의 진출이 대세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원래 유학(儒學)은 고려 말에 백이정(白頤正)이 원(元)나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이후,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이 그 대종을 이루어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조광조(趙光祖) 등에게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들 성리학도들은 조정의 신진세력으로 부각하게 되었고, 이미 육조(六曹)에 자리 잡은 중앙의 귀족들과는 매사에 대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림파로 결집하여 적극적인 혁신의 뜻을 품고, 부패한 기성세력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 공격에 대항할 만한 이론을 가지지 못한 훈구파(勳舊派)인 중앙귀족들은 국왕을 통하여 그들의 반대파를 탄압하려 하였다.

 

이러한 대립현상은 곧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어서 갑자(甲子), 기묘(己卯), 을사사화(乙巳士禍)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렇게 사림파가 훈구파의 탄압 수단인 사화(士禍)를 극복하고 선조 대에 권력을 장악한 후에, 그들 사이에 붕당(朋黨)이 분기되어 자체 경쟁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사림파의 정계 장악으로 관직에 오를 자격자는 많아졌으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어 필연적으로 당파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익(李瀷)은 곽우록(藿憂錄)의 붕당론(朋黨論)에서 “이(利)가 하나이고 사람이 둘이면 곧 2개의 당(黨)을 이루고, 이가 하나이고 사람이 넷이면 4개의 당을 이룬다.”고 하였다.

 

명종의 외척인 심의겸(沈義謙)이 사림파를 지지한 것은 특별한 예다. 새로 국왕이 된 선조는 아직 혼인 이전이라 외척이 없었다. 그 기회를 틈타 사림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사림파는 대적할 상대가 없자, 스스로 분열하게 됐는데 이것이 당쟁(黨爭)이다.

 

율곡 이이(李珥),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 김효원(金孝元) 등 후배 사림들은 군자소인론(君子小人論)을 내세워 스스로를 ‘군자’라 칭하고 선배사림을 ‘소인’라며 공격했다. 선후배 사림의 충돌은 이미 밝힌 대로 1575년(선조 8) 김효원의 이조전랑 추천 건으로 심의겸이 반대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과도하게 다룬 서인 정철(鄭澈)의 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동인(東人)은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南人)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1598년 남인 류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화의론(和議論)에 찬동한 혐의로 탄핵을 받고 물러나자 의병(義兵)을 많이 배출한 북인이 집권해 광해군을 옹립했다. 북인은 또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렸다. 대북은 적자도 장자도 아닌 광해군의 왕통상의 약점을 의식해서 형인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이자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정통 성리학의 유교사회에서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인 폐모살제(廢母殺弟)는 반인륜적 폭정이었다. 따라서 대북정권의 전횡(專橫)에 호시탐탐 정권탈환을 노리던 서인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선조가 식량이 고갈되자 47일만에 나온 지화문. © 김동철

 

그런데 서인도 또 분화되어 공신 출신의 공서(功西)와 사림 출신의 청서(淸西)로 쪼개졌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최명길 등 공신들은 후금(後金)과 화의(和議)를 주장했지만 김상헌 등 사림들은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이같이 엇갈린 주장으로 나라는 청나라 여진족의 말발굽에 짓밟혀 콩가루가 됐다. 피난처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인조는 청태종 앞에 엎드려 세 번 절을 하고 이마를 땅바닥에 아홉 번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송파 삼전도(三田渡) 비에 적힌 대로 치욕적인 굴욕이었다. 조선 여성 수십만 명이 여진족에 납치돼 중국으로 끌려갔다.

 

이렇듯 붕당의 폐해로 왕권은 휘둘렸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도적이 되는 등 망조(亡兆)가 들었다. 역대 조선 왕들은 신권(臣權)에 의한 당쟁(黨爭)으로 왕권이 흔들리기도 했다. 

 

 

청태종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인조의 삼전도 굴욕 부조. © 김동철

 

 1. 중종(사림파와 훈구파와의 당쟁에 휘말림)

 2. 인종(대윤과 소윤의 당쟁에 휘말림)

 3. 선조(동인과 서인의 당쟁에 휘말림)

 4. 광해군(소북과 대북의 당쟁에 휘말림)

 5. 현종-숙종(서인과 남인의 당쟁에 휘말림)

 6. 경종(노론과 소론의 당쟁에 휘말림)

 

효종 대에는 국왕이 송시열(宋時烈)의 도움을 받아 북벌(北伐)을 준비했다. 그러나 효종과 송시열이 주장하는 북벌은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그 속내가 달랐다. 효종은 군사를 길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고 송시열은 사림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때는 서인 내부에서 송시열 계열의 사림세력과 김육(金堉)을 필두로 하는 청풍 김씨 외척세력이 경쟁하는 구도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金自點)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宋時烈派)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顯宗) 초까지 계속되었다.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 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己亥服制問題)가 발생하였다.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尹鑴)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禮學論議)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 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두 번째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는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인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했다.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과 관련,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1주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각각 청남(淸南), 탁남(濁南)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專橫)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경신대출척 庚申大黜陟),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 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갈리었다.

 

1689년(숙종15) 숙종은 후궁 장희빈(張禧嬪)에게서 낳은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고자 했다. 이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들이 반기를 들자 숙종은 이를 서인 타도의 기회로 이용했다.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송시열이 사사(賜死)되는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갑술환국 직후 세자의 어머니인 장희빈과 그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죽여야 한다는 노론과 이를 반대하는 소론의 대립이 있었다. 결국 숙종은 1701년에 인현왕후가 죽자 이것이 장희빈의 저주(咀呪) 때문이라며 장희빈과 그 동생 장희재(張希載)를 죽였다.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숙종은 노소론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갔다. 1716년(숙종42)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간행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시비에 대해 노론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판정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려 소론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창덕궁 임금의 옥좌. 백성의 어버이라는 임금은 백성구제에 애를 썼는가 © 김동철

 

경종 즉위 후에 노론은 자신들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경종을 퇴위시키려고 했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했다. 두 세력의 충돌은 1721년(경종 원년) 신축환국(辛丑換局)과 이듬해 임인옥사(壬寅獄事)로 나타났다. 이 두 사건으로 많은 노론사람들이 화를 입었다고 해서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한다. 이렇듯 당쟁은 예송(禮訟)같은 정책대결이나 단순한 정권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료(臣僚)가 국왕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에까지 미쳤다. 더불어 수많은 사림의 피바람을 부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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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