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 당쟁의 희생양, 이순신과 원균
이 세상만사,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국 사람이 답인 것 같다. 그러나 열길 물속보다 더 깊은 사람의 속을 어찌 알 것이며 드러나는 신언서판(身言書判)만으로 어찌 사람을 제대로 고를 수 있다는 말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은 차례를 뛰어넘어 유능한 무관을 선발하는 무신불차탁용(武臣不次擢用)에 의해서 우의정 이산해, 병조판서 정언신 등의 추천을 받았다. 곧 이어 인사권을 쥔 이조판서 류성룡은 이순신을 정읍현감(종6품)에서 전라좌수사(정3품)로 발령냈다. 이 파격적인 결정은 결국 역사적으로 옳은 일이 되었다. 류성룡의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다는 지인지감(知人之鑑)과 인재를 알아본 입현무방(立賢無方)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이순신이 동인 세력에 의해 추천을 받자 자연히 정철과 윤두수 등 서인세력은 원균(元均)을 밀기 시작했다. 순수한 군인들이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끌려다닌 꼴이 된 셈이다.
원균은 이순신 장군이 7년 동안 쓴 난중일기에 120여 차례나 언급되어 있다. 연도별로 보면 계사년(1593년)에 49회, 갑오년(1594년)에 46차례나 집중되어 있다. 이때는 임진왜란 초기 3년 연간이다. 대부분 원균의 떳떳하지 못하고 치졸한 모습에 대한 비난과 분노가 주를 이룬다. “음험하고 흉악한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또는 “의논에서 원 수사가 하는 말은 매번 모순이다. 참 가소롭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진도(珍島)의 지휘선이 왜적에게 포위된 것을 눈앞에서 뻔히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에 대한 비난과 함께 경상수사(원균)를 원망하고 있다. 또 죽은 왜적의 수급(首級)을 거두려고 적이 가득한 섬 사이를 들락거리는 경상수사의 군관과 가덕첨사의 사후선(伺候船 정찰탐색선)을 잡아 보냈더니 이순신에게 화를 내더라는 기록이 있다.
1593년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의 말에 따르면 명(明)의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자신에게 보낸 1천530대의 불화살을 원균 혼자서 다 쓰려고 계책을 꾸미기도 했다. 이순신에게 날 밝는 대로 나가 왜적과 싸우자고 공문을 보내놓고 다음 날 이순신이 왜적을 토벌하는 문제에 대해 공문을 써서 보내자 취기에 정신없다고 핑계를 대며 답하지 않았다. 이순신에게는 복병을 동시에 보내자고 해놓고 자신이 먼저 보내기도 했다. 이밖에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더라는 등의 비난도 있다.
또한 도원수 권율(權慄)의 질책 앞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는 원균의 모습을 두고 우습다고 비웃거나 매도(罵倒)에 가까운 비난을 숨기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문상을 보낸 것과 관련, “음흉한 원균이 편지를 보내 조문한다만 이는 도원수(권율)의 명이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원균에 대한 감정의 골은 깊었다.
1593년 4월 20일 의주로 파천(播遷)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전 이순신이 원균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적이 있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요청해 옥포해전에서 적을 물리친 후 이순신에게 두 사람 이름으로 장계를 올리자고 했다. 이순신은 “급할 게 없으니 천천히 올리자.”고 말하고는 밤에 혼자 장계를 올렸다. 이순신이 이같이 혼자 행동한 것은 지휘체계의 혼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고 적을 공격할 때도 이렇다 할 공이 없었다.”라고 썼다. 장계마저도 서로 견제하면서 써야 하는 불신의 상황이었다.
1594년 1월 18일 맑음
“새벽에 출발하였는데 역풍이 크게 일었다. 창신도에 도착하니 갑자기 바람이 순해졌다. 돛을 올리고 사량에 도착하였는데 다시 역풍이 불고 비가 크게 쏟아졌다. 사량 만호와 수사(원균)의 군관 전윤이 보러 왔다. 전윤이 말하기를 ‘수군을 거창에서 모집해 왔는데, 이 편에 들으니 원수(권율)가 방해하려 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우습구나,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함이 이러하니 한탄한들 어쩔 것 인가! 여기서 하룻밤을 묵었다.”
1594년 5월 13일 맑음
“검모포 만호가 보고하기를 ‘경상 우수사에 속한 포작(어민)들이 격군(格軍 노 젓는 군인)을 싣고 도망하다가 붙들렸는데 포작들은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 있습니다.’ 하였다. 사복(司僕)들을 보내어 붙잡으려 하였더니 원 수사가 크게 화를 내면서 사복들을 결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노윤발을 보내어 풀어주게 하였다. 밤 10시쯤부터 비가 내렸다.”
1594년 6월 초4일 맑음
“충청 수사, 미조항 첨사 그리고 웅천 혐감이 보러 왔다. 승경도(陞卿圖 벼슬의 이름을 종이에 도표로 만들어놓고 놀던 오락)를 하게 하였다. 저녁에 겸사복(兼司僕 임금의 호위무사)이 왕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그 글 가운데 ‘수군 여러 장수와 경상도의 장수가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이제부터 예전의 나쁜 습관을 모두 바꾸라.’는 말씀이 있었다. 통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는 원균이 취하여 망발을 부렸기 때문이다.”
원균이 이순신과 비교대상이 될 때 항상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것은 그 자신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1593년 7월 15일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여수(당시 순천)의 영(營)을 한산도(통영)로 옮겨왔다. 이순신은 그곳에 운주당(運籌堂)이란 작전통제소를 지었다. 운주당은 운주유악(運籌帷幄), 즉 ‘장막 안에서 작전을 계획한다.’는 뜻에서 따온 이름이다. 운주당은 그후 제승당(制勝堂)으로 이름 바뀌어 오늘날까지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이순신은 운주당의 문을 활짝 열어 소통을 했다. 졸병이라도 군사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게 했다. 전투에 앞서서는 반드시 부하 장수들과 충분히 토론하고 작전을 짰기 때문에 실패확률이 그만큼 적었다. 이른바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으로 미리 이기는 전투 환경을 만든 다음에 싸움에 임하니 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균은 그렇지 않았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원균은 좋아하는 첩을 데려다가 그 집(운주당)에서 살며, 이중으로 울타리를 하여 안팎을 막아 놓아서 여러 장수들도 그의 얼굴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술주정과 성내는 것을 일삼았고, 형벌에 법도가 없었으므로 군중에서 수군거리기를, ‘만일 왜적을 만난다면 오직 도망가는 수가 있을 뿐이다.’라고 여러 장수들은 몰래 그를 비웃었고, 또한 다시 품의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므로 호령(號令)이 행해지지 않았다.”
부하들의 신망을 받지 못하는 원균은 현장 지휘관으로서 체통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상하 좌우 혼연일체가 되어도 힘겨운 마당에 당연히 패전을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1597년 5월 8일
“元(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1597년 5월 20일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말한다.
“원균이 무고(誣告)하는 소행이 극심한데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나라가 어찌될꼬?”
영내 엄정한 군기유지와 휘하 장졸들에 대한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원칙대로 행한 이순신 군영은 정리정돈이 잘 된 ‘준비된 병영’이었다. 그런데 원균이 운주당에 첩을 데려와 살았다니! 그는 도원수 권율(權慄)에게도 밉게 보였던 모양이다.
권율은 1597년 7월 11일 부산포 공격을 주저하는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쳤다. 도원수는 현역 군최고봉인 합참의장이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 즉 해군참모총장인데 곤장형을 가했다니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려 하지 않고, 우선 안골포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 하지만,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이와는 다른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고 원균은 운주당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여 꾀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하다.”
이 같은 내용은 권율이 선조와 조정에 올린 장계와 이순신이 1597년 6월 17일자 난중일기에 쓴 내용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이때 이순신은 백의종군 상황으로 ‘무등병’, 아무런 권한이 없어 그저 돌아가는 형세를 잠자코 지켜봐야 할 때였다.
원균이 역사적으로 저평가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패한 것인데, 그때 조선수군은 궤멸당했다. 원균은 볼기에 장을 맞은 뒤 화가 치밀어 올라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전세가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와 도원수는 출전을 재촉했다. 원균은 등 떠밀려 ‘그냥’ 출전했다. 남해 제해권을 쥐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는 1592년 이순신에 의한 한산도 패전을 만회라도 하듯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기세로 1000여척을 동원, 조선 수군 160척을 겹겹이 포위했다. 야간 기습에 치열한 혼전을 벌였지만 조선전함은 모두 격침됐고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지휘관은 전사하고 1만여 조선수군은 죽거나 흩어지고 말았다. 한 장수의 분별심을 잃은 화(anger)가 조선수군의 궤멸이라는 거대한 위험(danger)을 초래한 것이다. 원균은 또 아들 원사웅(元士雄)을 데리고 참전했다가 아들마저 잃었다. 패전 후 도망가다 왜군에게 추원포(秋原浦)에서 참살당한 원균은 그 시체도 찾지 못했고 후세에 친척들이 고향인 경기도 평택시 부근에 가묘(假墓)를 만들어 주었다. 그런 연후 원균은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장본인, 패장(敗將)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이순신은 칠천량 패전 전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가지고 피난한 12척의 배를 겨우 찾아내 명량해전에서 왜군 133척을 물리친 ‘구국의 명장(名將)’이 됐다. 이처럼 극명하게 대치되는 대척점에 두 장수가 있었다.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다른 점이 많았다. 그 성격의 차이점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우선 출신성분부터 달랐다. 나이로 보면 원균이 5살이나 많았고 무과급제도 11년이나 빠른 대선배였다. 게다가 원균의 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元俊良)으로 무인 집안이었지만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은 1519년 조광조(趙光祖)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역적(逆賊) 집안’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칩거했다.
1592년 7월 15일 한산대첩을 이룬 이순신은 승승장구, 그 이듬해 8월 15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종2품)로 임명됐다. 그때 원균은 이순신 휘하의 경상우수사(정3품)였다. 사사건건 마찰이 있자 선조와 조정은 원균을 육군인 충청병마사 또 다시 전라우병사로 전출시켜 떼어놓았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1597년 2월 26일 삭탈관직된 뒤 한양으로 압송당하자 그 후임 통제사로 원균이 부임했다.
성격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이순신이 정보탐색전으로 적의 상황을 면밀히 살핀 뒤 전투에 임하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햄릿형 전략가였다면 원균은 ‘왕명이 있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 든다’는 신념을 가진 용장(勇將)이었다. 원균의 이같은 분기탱천(憤氣衝天)한 ‘저돌성’은 전장에서 때론 필요하지만 자칫 돈키호테 같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왕왕 있는 법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였던 원균은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긴급지원요청인 SOS!를 쳤다. 이순신은 조정에 경상도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부원경상(赴援慶尙) 장계를 올렸다. 5월 2일 경상도 구원에 대한 조정의 출정명령이 떨어지자 5월 7일 옥포에 첫출전했다. 그런데 경상우수영의 전선이 거의 없었다. 왜군이 육로로 경상우수영이 있는 오아포(거제도 가배량)로 쳐들어오자 원균은 우수영 병영 및 성 내외 인가에 불을 지르고 정박중인 병선 73척을 파괴, 침몰시켰다. 이른바 청야(淸野)작전이었다. 그리고 남은 전선 4척, 협선 2척을 타고 소비포(고성군 춘암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전라좌수영 이순신 함대와 합류하여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했다. 이후 경상우수영은 남해 노량으로 진을 옮긴다.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은 조정의 명령에 의해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난 뒤 원균은 적의 수급을 베어서 공적으로 삼는데 열중했으나 이순신은 적을 사살하는데 더 중점을 두었다.
이순신은 5월 7일 옥포 해전 승리로 가선대부로 승진(종2품), 6월 2일 당포해전 승리로 자헌대부 승진(정2품 하계), 7월 8일 한산도대첩 승리로 정헌대부(정2품 상계)로 연이어 승진했다. 그런데 원균은 언제나 한 수 밑의 품계에 머물렀다. 이 또한 원균의 울화를 치밀게 하는 요인이었다.
한양 조정에서는 동인과 서인의 대립에 이어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파벌이 분화되었다. 동인 세력이 강했을 때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동인-북인), 우의정 류성룡(柳成龍 동인-남인) 등에 의해 이순신은 비호(庇護)되었고 원균은 서인인 좌의정 정철(鄭澈)과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 형제의 목소리 커졌을 때 두호(斗護)를 입었다. 망국병인 조정의 당쟁 또한 변방의 장수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오호 통재(痛哉)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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