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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완승!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

  •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자 말라!”

 

‘계절의 여왕’ 5월은 늘 푸르고 상큼하다. 포근한 바람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을 살포시 녹이며 속삭인다. ‘살을 에는 동장군(冬將軍)이 제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이 따사로운 햇살을 절대 막을 수는 없는 법.’이라고. 

 

그해 5월 남해안 앞바다는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뒷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자 농부들은 씨를 뿌렸고 아낙들은 산나물을 캐느라 손을 바삐 놀렸다. 산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으려는 몸놀림은 산 자의 위대한 본능이었다. 게다가 탁 트인 망망대해는 겨우내 쫄았던 마음을 넓혀주었다. 흰 물방울 튀어 오르는 잔잔한 파도는 어부들에게 풍어(豊漁)의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때론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평화를 멀리하곤 한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정글처럼 짓밟는 자와 짓밟히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탐욕의 폭군에게 정벌은 유혹 덩어리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드넓은 땅, 명나라와 인도를 차지하기 위해서 조선을 교두보로 택했다. 한 야심가의 이런 결정은 저승의 무간지옥(無間地獄 불교에서 고통이 가장 극심한 지옥)을 방불케 한다. 당하는 자들은 목숨 부지를 위해서 가로 뛰고 세로 뛰면서 아사리판에서 몸부림친다. 그래서 전쟁은 항상 비극적이다. 그리고 이 비극을 막으려는 영웅 또한 탄생하게 마련이다.  

 

1592년 임진년 5월 7일 평화롭던 옥포 앞바다에서 일진광풍(一陣狂風)의 교전이 벌어졌다. 이 땅을 침범한 일본수군과 이를 몰아내려는 이순신(李舜臣)의 조선함대와 첫 전투가 있었다. 사실 이 전투는 총통과 불화살로 무장한 조선 수군에 의한 일방적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 등 적선 30척은 해안가에 정박중이었고 조선수군의 급습을 받자 이중 선봉 6척이 응전했으나 이내 분멸되었다. 나머지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 달아났다. 일본군은 높은 고지에서 조총을 쏘면서 필사의 저항을 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50m) 조선수군의 총통(사거리 1km)에게는 상대가 되질 못했다. 일본 전함 26척이 불태워 부서지거나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잔해는 옥포만을 뒤덮었다.  

 

첫승리!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도망치던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 파죽지세로 몰아치는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이순신의 1차 출전 중 첫전투인 옥포 해전에서 승리를 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수군에게 천군만마 이상의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충천되었다. 

 

순식간의 일진광풍 끝에 전투는 끝났다. 일본군은 언덕 위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칼을 허공에 휘둘렀다. 이순신과 그 휘하 장졸들은 승리의 기쁨 앞에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가 이겼다.” “일본군도 별거 아니다.”면서 울음을 토해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이순신 장군도 스스로 놀랐고 그 놀라움을 억지로 숨겨야 했다. 이기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전투에 임하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의 전략이 먹혀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치밀한 사전 탐방과 조류와 물길,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작전구사가 먹힌 것이다. 그리고 자신감이 팽배해졌다. 이 첫해전의 승리는 이어 23전을 모두 전승(全勝)으로 마감하는데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됐다. 손무(孫武 BC 545경~470경)가 쓴 손자병법을 공부했던 이순신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는 신념을 체화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서 싸우기를 구한다(勝兵先勝而後求戰)”는 손무의 병법을 자신의 주특기인 선승구전 전략으로 활용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개전 초인 1592년 4월 15일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적의 침입에 대한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4월 27일 조정의 허락 하에 5월 4일 전라좌수영 순천 오동포(당시 여수는 순천의 관할구역)를 출발하여 1차 출전에 나섰다.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고기잡이 어선) 46척으로 함대를 구성하고 원균이 몰고온 판옥선 1척과 그 휘하 장수들의 판옥선 3척, 함선 2척 등 합쳐 조선수군 연합함대의 진용을 갖췄다.

 

옥포해전에서 승기를 잡은 이순신 장군은 5월 8일 고성땅 적진포 전투에서는 13척 모두 분멸시켰다. 이로써 1차 출전으로 왜병선 44척을 수장시켰다. 조선수군은 전투함인 판옥선 28척과 비전투함인 협선 17척과 포작선 46척 등 모두 91척이었으나 단 한 척도 격침되지 않았다. 1차 해전을 승리로 마감한 장군이 고성 월명포(月明浦)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전라도사 최철견(崔鐵堅)으로부터 선조가 한성을 떠나 몽진(蒙塵)에 나섰다는 통첩을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바다가 뒤엎어지는 슬픔에 이순신은 엉엉 울부짖었다.

 

5월 29일 2차 출전은 사천해전부터 시작되었다. 상황이 다급하여 먼저 출정을 앞당겼는데 전선 23척을 거느리고 우후(虞侯 참모장) 이몽구(李夢龜)와 함께 출전했다. 이때 원균은 하도의 선창에 있다가 3척의 전선을 이끌고 와서 적의 상황을 장군에게 알려주었다. 이날 저녁 해질 무렵 왜적을 유인하여 사천의 모자랑포에서 교전했다.

 

 

사천왜성 천수각터에서 Ⓒ 김동철

 

‘바다의 탱크’ 거북선이 첫 출전한 해전이었다. 돌격선인 거북선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전열을 흩트려놓았다. 좌우 뱃전에 각 6개, 용머리에 1개, 선미에 1개 등 모두 14개의 천자(天字),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 총통(銃筒)이 불을 뿜었다. 사천에서 왜선 15척을 분멸시켰다. 판옥선 구조에 지붕 덮개인 개판(蓋板)을 얹었고 그곳에 칼, 송곳, 쇠못 등 철침을 달아서 단병전(短兵戰)에 능숙한 왜군의 도선(渡船)을 불허했다. 게다가 거북선 안의 조선수군(사수나 격군)은 노출이 안 되므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593년 9월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인 조진수륙전사장(條陳水陸戰事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地字), 현자(玄字)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장군은 1591년 2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자마자 거북선의 건조를 시작했다. 5~6 척을 여수의 선소와 돌산도의 방답진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는 완성된 거북선에 각종 총통을 설치하고 시험발사를 했다. 뛰어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아닐 수 없다. 2차 출전을 한 6월 2일 당포해전에서 21척, 6월 5일 당항포 해전에서 28척, 6월 7일 율포해전에서 7척 등 모두 71척을 분멸시켰다. 

 

거제 대우옥포조선소 앞바다 Ⓒ 김동철

 

 1592년 6월 14일 

“접전할 때 스스로 조심하지 못하여 적의 탄환에 맞아 비록 사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어깨뼈 깊이 상해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상한 구멍이 헐어서 궂은 물이 늘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어내지만 아직 쾌차하지 않아 민망스럽습니다.”

 

장군은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그만 적의 조총을 피하지 못하고 부상했다. 장군이 선봉장으로 솔선수범하고 휘하 장졸들이 결사적으로 덤벼들자 일본군은 율포(栗浦 거제 장목면)에서 나와 부산을 향하여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마침 역풍이 부는 것을 조선수군이 이용하여 추격전을 벌인 결과 6월 2일 당포해전에서 승리했다. 장군은 수군의 뛰어난 화력도 활용했지만 주변의 지형과 기후 조건을 잘 이용하여 승리를 구가할 수 있었다.

 

선용병자 선위불측 패적괴기소지(善用兵者 先爲不測. 敗敵乖其所之). 즉 “용병을 잘 하는 자가 먼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면 적이 가는 방향을 어그러뜨릴 수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이정(李靖)이 지은 병법서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 나오는 말이다.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하나로 이순신이 무과시험 공부를 할 때 본 서적이었다. 

 

 
한산대첩도Ⓒ김동철

 

한산도 한산대첩비 Ⓒ 김동철

 

7월 8일 제 3차 출전이 있었다. 7월 8일 한산도 해전, 7월 10일 안골포 해전을 치렀다. 임진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 장군은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인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1592년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함대는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西進)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합세하였다.

 

이에 장군은 7월 5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전라 좌우도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한 뒤 6일 출전했다.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연합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 길이 약 4km에 폭이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운신하고 전투를 벌이기에 좁은 해협이었다. 그러나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툭 터져 외양으로 나아가기 용이했다. 그래서 유인(誘引)전술을 세웠다. 대여섯 척의 조선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그들을 뒤쫓아 한산도 앞바다에까지 이르렀고 대기하던 조선 함대가 갑자기 배를 돌려 학익진(鶴翼陣)을 펼쳤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그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일본수군의 대장선인 아타게 부네, 층각대선(層閣大船) 한 척을 나포한 것을 비롯해 왜선 47척을 불사르고 12척을 나포했다.

 

 

백범 김구선생 한산도 제승당 방문 Ⓒ 김동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했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없었다.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자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이 먹을 것이 없어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무인도에서 떠돌다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자신의 배가 불타 바닷속으로 가라앉자 섬에서 할복했다. 이것이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그 유명한 한산대첩이다.

 

위업을 달성한 이순신(李舜臣)은 정2품의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李億祺)와 원균(元均)은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미국인 고문 헐버트(Hulbert)는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했다.

 

1592년 9월 17일

“무릇 전후 4차 출전을 하고 열 번 접전하여 모두 다 승리하였다 해도 장수와 군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포 전투보다 더 한 것은 없습니다. 전일 싸울 때에는 적선의 수가 많아도 70척을 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큰 적의 소굴에 늘어선 470여척 속으로 군사의 위세를 갖추어 승리할 기세로 돌진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루 종일 분한 마음으로 공격하여 적선 100여척을 깨뜨렸습니다.”

 

4차 출전인 부산포해전에서 장군이 아끼던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은 전열의 정비를 단행했다. 1593년 7월 23일 여수 본영에서 한산도로 진을 옮겨 부산포에 있는 일본군 본영 가까이 왔다. 일본수군의 남해 진출을 봉쇄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곧이어 8월 3일에는 선조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받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모두 통제하는 명실상부한 수군(水軍)통합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계급에 걸맞는 혁혁한 전과(戰果)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선조와 이순신과의 관계에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 흐른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통제사 이순신은 제 1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부산에 상륙하기 전에 쳐부수지 않았다는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의 모함을 받고 2월 한성으로 압송됐다. 선조는 대역죄로 죽이려 했으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구명탄원서인 신구차(伸救箚)를 올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백의종군길에 나섰다. 7월 16일 원균(元均)의 칠천량 패전으로 조선수군이 궤멸당하자 선조는 급히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장군은 요시라의 반간계(反間計)를 간파하지 못한 선조와 조정대신을 원망했다. 무엇보다도 현장 지휘관의 상황판단이 무시되는 것에 분노했고 허탈했다. 그러나 누란(累卵)같은 위급한 운명이 어느새 장군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선조는 수군세력이 미약하니 도원수 권율(權慄)의 진영에 합세하라는 명을 내렸다. 장군은 기절초풍, 강하게 항의했다.

 

드디어 9월 16일 13대 133이라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을 뛰어넘은 기적의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이뤘다. 1598년 8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급사하자 왜군 철군령이 내려졌다. 순천 왜성에 웅거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철군하려 할 때 장군은 편범불반(片帆不返)! “단 한척도 되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1598년 11월 19일 장군과 명나라 진린(陳璘) 제독이 이끈 조명연합함대가 남해 노량 관음포 해협에서 일본 함대와 일대 접전을 벌였다. 조선 전선 170척, 병력 1700명. 명나라 전선 128척 병력 2600명. 조명연합수군 총병력 전선 298척, 병력 4300명에 일본군 512척 병력 5만 5000명이 나라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겨뤘다. 치열한 공방이 진행되던 중 일본군이 쏜 조총 한 방이 장군의 가슴을 뚫고 나갔다. 아!….   

 

“전방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장군은 유언과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로써 7년 동안 조선 땅을 피로 물들였던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비극은 막을 내렸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