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 나라를 다시 만든다, 재조산하(再造山河)
19대 대통령이 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7년(정유년) 새해를 맞아 정치적 결의를 ‘재조산하(再造山河)’라는 사자성어로 표현하였다. 재조산하(再造山河)는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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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에서는 재조산하(再造山河)의 의미에 대해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실의에 빠져 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적어준 글귀입니다.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만들지 않으면 죽을 자격이 없다는 충신(忠臣)들의 마음으로, 우리가 대한민국(大韓民國) 대개조(大改造)에 나서야 할 때임을 뜻하고 있습니다.” 라고 부연 설명했다.
‘일그러진 나라를 다시 만들겠다.’는 충정은 이해할만하나, 사료를 보면 ‘재조산하(再造山河)’라는 말은 이순신(李舜臣)이 서애(西厓) 류성룡 선생에게 적어준 글귀가 아니다. 이는 지난 2015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징비록(懲毖錄)’의 한 장면을 보고 따라한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가 사실(fact)에 기초한 상상력(fiction)의 종합물(faction)이라고 볼 때 ‘징비록’의 작가 역시 자신의 바람을 그렇게 영상 처리한 것이리라.
‘재조산하(再造山河)’는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서애(西厓) 선생 관련 업적에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황제 신종은 선조가 무능력하다고 보고, 1593년 11월 부하 사헌(司憲)을 특사로 조선에 보내 “여차하면 왕을 갈아치우도록” 명하였다. 선조 또한 신종의 뜻을 알고 사헌에게 광해군에게 양위(讓位)할 생각을 직접 표명하였다. 사헌은 1주일 동안 체류하면서 조선 내정을 점검한 결과, 서애 선생의 뛰어난 전쟁수행 능력과 우국충정(憂國衷情)에 감복한 나머지 양위계획은 없던 일로 하고, 선조에게 “류성룡에게 국정을 전임시키면 산하(山河)를 재조(再造)할 것.”이라고 말했다.
명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온 사헌의 오만방자함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안하무인 태도에 무소불위의 거만함은 조선 왕 선조와 누가 더 상석(上席)에 앉느냐를 두고 시비를 벌일 정도였다. 높은 자리, 상석은 남면(南面 남쪽을 향하여 앉음)하는 자리이다. 사헌은 자기가 남면하는 자리에 앉지 않으면 황제의 칙서만 던져놓고 돌아가겠다는 억지를 부렸다. 결국 힘없는 소방(小邦)의 군주인 선조는 남쪽에 앉아서 북면했고 사헌은 북쪽에 앉아 남면하는 자리를 차지했다. 원군(援軍)을 보내어 조선을 다시 살려준 은혜, 즉 조선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으니 조선 왕은 명나라 사신 앞에서 그저 일개 부하 정도밖에 안 됐다.
광해군 때 집권세력인 북인들에 의해 쓰여진 선조실록과 마찬가지로 인조 때 서인들이 만든 선조수정실록에도 사헌(司憲)이 황제(皇帝)의 칙서(勅書)를 가지고 다녀간 사실과 조선 조정의 대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고 있다.
1593년 계사년(선조 26년, 만력21) 윤 11월 1일(신사)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이 쇠약하여 떨치지 못할 것을 걱정한 나머지 논의가 무성하였다. 급사중(給事中) 위학증(魏學曾)이 주본(奏本 황제에게 올린 글)을 올려 조선의 일을 말한 가운데 한 조목을 보면, ‘조선이 이미 제대로 왜적을 막지 못하여 중국에 걱정을 끼쳤으니, 마땅히 그 나라를 분할하여 두셋으로 나눈 뒤 왜적을 막아내는 형편을 보아 나라를 맡겨 조치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울타리가 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사헌이 이르러 칙서를 선포하고 관소(館所)로 들어갔는데, 예모가 매우 준엄하였다. 그 이튿날 상(선조)이 사신 사헌을 관소에서 접견하고 소매 속에서 수첩(手帖)을 꺼내어 사신에게 주었는데, 그 대략의 내용은, ‘질병 때문에 나라를 다스릴 수 없으니, 대인(大人)이 주장해 주기 바랍니다.’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대신(류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명나라 사신에게 정문(呈文 상위자에게 올리는 문서)하여 본국의 사정을 차례로 진술하면서, 왕이 의리를 지키다가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고 잘못한 점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였다. 류성룡이 또 유격(遊擊) 척금(戚金)을 통하여 전위(傳位)하는 일은 매우 불가하다는 점을 은밀히 말하였다. 사헌은 이때부터 상을 대하면서 예의가 상당히 깍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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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왕위 선양(禪讓)은 배신(陪臣 조선 신하)으로서는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노야(老爺 어른)께서는 만 권의 서책을 읽어 고금의 사변(事變)에 대해 환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소방(小邦)의 형세가 바야흐로 아주 위급한데, 만약 또 군신 부자 사이에 조처함이 마땅함을 잃으면, 이는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하니, 척 유격이 그 말이 옳다고 하고는 즉시 그 종이를 촛불에 태워 없애 버렸다. 그 다음 날 공(류성룡)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사(명 사신)에게 정문(呈文)을 올려 “주상께서는 본디 왜적들이 쳐들어오게 할 만한 실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변란이 일어난 뒤에는 왜적을 막는 일을 조처한 것이 아주 상세하였다.”는 내용으로 극력 진달하니, 조사가 믿고서 받아들였다. 이날 밤에 척 유격이 또 공을 불러 말하기를, “조사의 뜻이 이미 완전히 돌아섰으니, 달리 걱정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조사(사헌)가 상과 서로 만나 볼 적에 예모(禮貌)가 더욱 공경스러웠다.
조사가 돌아감에 차부(箚付 공문서)를 공(류성룡)에게 부쳤는데, 그 속에는 ‘재조하산(再造河山)’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류성룡은 명나라의 조선 분할역치 문제를 해결해냈다. 여기서 ‘재조산하(再造山河)’란 단지 선조의 양위를 막은 좁은 의미에서 공로가 아니라, 외교와 군정 및 민심수습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활약한 공을 세워,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넓은 의미까지 포함된다. 그 후 류성룡 하면 ‘재조산하(再造山河)’가 떠오르게 되었다.
류성룡의 공훈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정읍현감(종6품)을 무려 7단계나 뛰어오른 전라좌수사(정3품)로 임명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이었다. 이 둘 사이의 위대한 만남은 한양 건천동(마른내골, 충무로) 한 동네에 살았던 인연으로 맺어졌다. 그리고 인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류성룡의 지인지감(知人之鑑)과 능력있는 인재를 과감히 발굴해내는 입현무방(立賢無方)의 인사원칙에서 ‘빛나는 군신(軍神)’이 탄생할 수 있었다. 평생 친구이자 조력자였던 류성룡(1542~1607)은 징비록에서 이순신(1545~1598)에 대한 인물평을 남겼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했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했다. 말 타고 활 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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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승병 등과 함께 한 이순신 장군. 여수 충민사 기념관 ⓒ 김동철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그의 형님 희신(羲臣)과 요신(堯臣)은 둘 다 먼저 죽었으므로, 순신은 그들이 남겨놓은 자녀들을 자신의 아들딸처럼 길렀으며, 무릇 시집 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은 반드시 조카들을 먼저 한 뒤에야 자기 아들딸을 보냈다. 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 역시 건천동에 살았는데, “류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한 것은 나라를 중흥시킨 큰 공로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순신의 파직 원인을 류성룡에 대한 반대파(북인)의 공격 때문이라고 보면서 최악의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에 실시했던 각종 군사훈련과 전술, 고기잡이와 둔전 활성화 등 경제 방안 등은 이순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멘토’ 류성룡은 ‘멘티’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 같은 병법서를 보내주는 등 둘 사이에는 난국을 헤쳐나가는데 끊임없이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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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기초가 무너지는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현장을 누비던 도체찰사(합참의장) 류성룡은 1593년 6월 제천의 청풍 한벽루에 올랐다. 때는 마침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전멸해서 참혹한 살육을 당한 즈음이었다. 또한 퇴계 이황(李滉)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던 김성일(金誠一)이 진주성 전투에서 과로사로 죽었다. 김성일은 “일본군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자신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듯 열과 성을 다해서 전장을 뛰어다녔다. 또한 의주로 파천했던 선조는 1593년 4월 1일 한양이 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장 돌아오지 않고 그 해 10월 환궁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처럼 흘러내리던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참혹한 현장밖에 없었다. 류성룡은 속으로 꾹꾹 눌러 참았던 눈물을 마침내 시 한편에 실어 쏟아냈다.
지는 달은 어렴풋이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흩어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 잠 못 이루는데
온 밤 서리 바람에 낙엽소리만 들리네.
두 해 동안 전장 속에 떠다니느라
온갖 계책 떠날 날 없어 머리에는 온통 흰 눈이네
오래 고였던 눈물, 끝없이 흘러내리고
겨우 견디는 난간에 기댄 채 북쪽만 바라보네.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피난을 갔고 조정은 동인-서인, 남인-북인으로 갈라져 적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적전분열의 양상을 보였다. 아! 조선은 정녕 없어져야 했던 나라였던가? 이 대목에서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경세가 류성룡과 전략가 이순신이 힘을 합쳐서 조선을 다시 만드는 재조산하의 작업에 착수했으면 제2의 창업 국가는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력을 키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운명은 같은 날 같이했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바로 그날 류성룡도 반대파 북인들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류성룡이 다음해 2월 안동 하회마을로 낙향해 피와 눈물로 쓴 책이 바로 ‘징비록’이다. 경계하고 삼가라는 징비(懲毖) 정신은 오늘날 풍전등화에 놓인 대한민국에게 가장 필요한 충언이자 교훈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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