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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백성은 누구인가?

category 칼럼/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2017. 5. 29. 14:13

[이순신 리더십] 백성은 누구인가?

백성이란 참으로 오묘한 존재이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권력자와 백성의 관계는 ‘금수저’와 ‘흙수저’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었다.

 

 

김홍도 풍속화 벼타작 ⓒ 김동철

 

공자의 시경(詩經 305편의 시모음) 시구편(鳲鳩篇)에는 ‘왕이 백성을 골고루 사랑해야 된다.’는 뜻을 뻐꾸기(鳲)와 비둘기(鳩)에 비유해서 읊어 놓았다. 현실의 부조리를 기술한 후에 이에 있어야 할 당위, 곧 왕이 백성을 골고루 사랑하고 주인으로 여기는 정치와 세상을 바라고 있다. 공자 말대로, “지극히 천하고 어디에도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이 바로 백성들이요(至賤無告者小民也), 높고 무겁기가 산과 같은 것도 또한 백성이다(隆重如山者亦小民也).”

 

우리는 지금 ‘성악설’을 주창했던 순자(苟子)의 군주민수(君舟民水)론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군왕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라.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성난 파도나 거센 물살이 되어 배를 엎어지게도 한다. 언뜻 ‘무지렁이’로 보이는 백성은 때론 하늘같은 절대군주도 하루아침에 갈아치울 수 있을 만큼의 괴력을 가졌다. 

 

백성이란 참으로 오묘한 존재이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권력자와 백성의 관계는 ‘금수저’와 ‘흙수저’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세자가 되면 왕위를 승계 받았고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면 평생 노예가 되었다. 재벌의 아들로 태어나면 금수저를 물고 나오는 것이고 지게꾼의 아들로 태어나면 그에 맞게 빈한(貧寒)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금이나 별 다름이 없다. 양반 가문에서는 과거를 통해서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탔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양반 출신이어야 했다.

 

오늘날 신분상승을 위해 스펙 쌓기에 여념 없는 청년층에서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모두가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모두가’라는 대목에 거짓이 섞여있음으로 그 말은 공염불이 되기에 딱 맞다. 그런 입은 백 번이라도 꿰매버려야 옳다.

 

우리가 가진 경제체제가 자본주의인 이상,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 박사는 ‘마태복음 효과(Matthew effect)’를 주장했다. 즉 본문 29절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에서 나온 이론이다. 민초들이 잘 살고 못사는 운명의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꽤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을 바꿔보자는 진보학자들은 사회주의 개념을 들여와서라도 기존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완하고 바꾸어나갈 것을 충고하고 조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은 하나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기득권자들은 보신(保身)을 위한 온갖 입법로비에 매달린다. 여전히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나 기득권층은 평등과 분배라는 단어를 극렬 싫어한다. 이 좁은 나라에 국회의원 수가 300명이라는 것부터가 ‘비정상’이고 거기에 주인 완장을 차고 호가호위하는 일부 보좌관들의 기세등등을 당장 뿌리 뽑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는 ‘부실 국가’가 될 것 같다.  

 

세종실록에서 왕가(王家)에 주는 과전법(科田法) 제정과 관련, “왕의 아들, 왕의 형제, 왕의 백부나 숙부로서 대군(大君)에 봉한 자는 3백 결, 군(君)에 봉한 자는 2백 결, 부마(駙馬)로서 공주의 남편은 2백 50결, 옹주의 남편은 1백 50결이요, 그밖의 종친은 각기 그 과(科)에 의한다.”고 되어있다. 절대군주제 시대, 왕가 사람들은 그 신분에 따라 논과 밭의 크기가 정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을 일궈서 곡식을 수확하는 등의 노동력은 천민(賤民)인 공사노비(公私奴婢)가 담당했다. 소유와 경작은 엄연히 따로 놀았다.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인목대비를 왕비에서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임)를 탓하고 반정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던 인조는 반정의 명분을 제공해준 정명공주(선조와 인목대비의 딸, 영창대군의 누이)에게 사은(謝恩)의 뜻으로 8천 76결의 절수(折受)를 내려주었다. 절수란? 벼슬아치가 나라로부터 녹봉(祿俸)으로 토지나 결세(結稅)를 떼어 받는 것이다. 인조는 그 뒤에도 인목대비에게 자신의 효성(孝誠)을 증명하려는 듯 딸 정명공주에게 온갖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기존 살림집의 증축은 물론이고 수많은 노비와 토지를 하사했다. 심지어 전라도의 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등 섬에 있는 땅까지 하사했다.

 

 

빛나는 정치라는 뜻의 정명공주가 쓴 서예 '화정' ⓒ 김동철

 

‘떠오르는 태양’ 여진족(후금, 뒤에 청나라)과 ‘지는 해’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했던 광해군과는 달리, 인조는 선조와 마찬가지로 뼛속까지 존명사대(尊明事大 명나라를 상국으로 극진히 모심)를 고집했다. 그러다가 후금과 청나라로부터 침공을 두 번이나 당했고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절을 세 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바닥에 짓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게 힘없는 약소국의 설움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다. 경상감사 박문수(朴文秀)가 1728년(영조 4년)에 ‘영안위방(永安尉房 정명공주를 가리킴)이 경상도 내에서 절수 받은 토지가 8천 76결이나 됩니다.’라고 보고한 대목이 있다. 8천 76결을 지금의 평수로 환산하면 약 5천만 평에 달한다. 당시 한양 도성의 면적을 약 600만 평으로 잡는다면 어마어마한 면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백성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명종 때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온 글이다. 모든 원(員 수령)이 된 자는 으레 민가의 과일나무를 일일이 적어두고 그 열매를 거두어들이는데, 가혹하게 하는 자는 그해 흉년이 든 것도 상관하지 않고 거두어들이는 데에 반드시 그 수효를 채웠으므로 백성들이 그것을 괴롭게 여겨 그 나무를 베어버리는 자가 생겼다.

 

어잠부(魚潜夫)가 김해에 살 때에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어내는 사람을 보고 부(賦)를 지었다.

황금자번(黃金子蘩) 황금 같은 열매가 많이 달리니

이사기향(吏肆其饗) 벼슬아치가 토색질을 멋대로 하여

증과배징(增顆倍徵) 수량을 늘려 갑절로 거두어 들이고

동조편추(動遭鞭捶) 걸핏하면 매질하니

처원주호(妻怨晝護) 아낙은 원망하면서 낮에 지키고

아제야수(兒啼夜守) 어린 것은 울면서 밤에 지킨다

자개매숭(玆皆梅崇) 이것이 다 매화 탓이니

시위우물(是爲尤物) 매화가 근심거리가 되었구나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됐던 절대군주시대 백성들은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는 게 소원일 정도로 궁핍했다. 그래서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한 채,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어 남의 것 슬쩍하다가 그만 ‘목구멍이 포도청’이 된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군주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실용적 비전을 가지고 앞으로 다가올 걱정거리인 원려(遠慮)를 깊이 깨달았다면 백성들의 삶이 그렇게 피폐하고 척박해지지는 않았으리라. 나라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의 공물, 납세부담을 덜어주려는 애민(愛民)정책이 사실상 부재한 조선시대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은 한낱 꿈속의 옛날 이야기였다. 특히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貢納) 등 과중한 세금으로 백성의 고혈(膏血)을 빨아먹는 부패한 탐관오리와 아전, 향리 등 하급관리들에게 염증을 느낀 백성들은 애초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정심이 없었다.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 김동철

강진으로 유배되었던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시골 현장의 실상을 보면서 잘못 되어가는 세상에 대한 통분과 한탄을 읊었다. 조선에서는 차별(신분과 지역)이 있었는데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 3도 백성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천대받아, 중앙의 관계에 진출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유배의 땅이었다. 다산은 그런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그런 사회적 질곡(桎梏)을 해결하려는 간절한 뜻을 ‘하일대주(夏日對酒)’, 즉 여름날 술을 마시며 읊은 시에 담았다.  

 

서민구엄억(西民久掩抑) 서쪽 지방 백성들 오랜 세월 억압받아    

십세애잠신(十世簪紳) 십세토록 벼슬 한 장 없었네                      

외모수원공(外貌雖愿恭) 겉으로야 공손한 체하지만                             

복중상윤균(腹中常輪囷) 마음속에는 언제나 불만이었네                        

칠치석식국(漆齒昔食國) 옛날에 일본이 나라 삼키려 했을 때                    

의병기준준(義兵起踆踆)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서민독수수(西民獨袖手) 서쪽 백성들이 수수방관했음은                        

득반량유인(得反諒有因) 참으로 그럴만한 이유 있었네     

 

 

창의토왜도. 정문부가 부역한 자를 처형하는 장면 ⓒ 김동철

 

임진왜란 중 정말 함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592년 7월 함경도 회령(會寧) 아전이었던 국경인(鞠景仁)과 그 숙부 국세필(鞠世弼), 정말수(鄭末秀) 등이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를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투항했다. 그리고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가 현지에서 근왕병을 모으지는 않고 망나니짓을 일삼자 이들을 포박해서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 국경인은 이 공로로 가토에 의하여 판형사제북로(判刑使制北路)에 임명되어 회령을 통치하면서 이언우(李彦祐), 전언국(田彦國) 등과 함께 횡포를 자행하다가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격문을 받은 회령유생 신세준(申世俊)과 오윤적(吳允迪)의 유인에 붙잡혀 참살되었다. 의병을 모아 기습 게릴라 전술로 가토 군을 무찔렀던 의병장 정문부의 승전기록을 담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2006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서 가져와 북한에 건네주었다. 

 

무릇 백성이란 누구이던가.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에서 백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유교국가에서 백성은 ‘왕의 백성’이 아니다. 민심무상(民心無常), 즉 백성들의 마음은 일정함이 없어 절대로 어느 한 곳에 붙박이로 붙어 있지 않는다. 백성들의 마음은 유혜지회(惟惠之懷)라 해서, 오로지 은혜롭게 정치하고 혜택을 베푸는 정책을 펴내는 사람에게 향한다. 그가 어느 민족이든, 그가 어느 나라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임진왜란 7년 기록에는 왜군이 점령했던 남해안의 왜성 부근에서 우리 백성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농사와 고기잡이를 하면서 왜장(倭將)에게 세금을 내고 나머지를 가지고 살았다는 내용이 심심찮게 나온다.

 

 

한양 도성이 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피난중인 선조. KBS 드라마 징비록

 

1592년 4월 30일 선조가 왜군에 쫓겨 한양 도성을 떠나 파천(播遷)길에 오르자 민심이 이반했다. 분기탱천(奮起撐天)한 백성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왕을 원수(怨讐)로 여겼다.

 

류성룡(柳成龍)의 서애집(西厓集) 기록이다.

“임금의 행차가 성을 나서니 난민들이 맨 먼저 장례원(掌隸院 노비 판결부서)과 형조(刑曹)를 불질렀다. 이 두 곳에는 공사노비(公私奴婢)의 문서(노비 증명서)가 있는 까닭이다. 또 내탕고(內帑庫 왕실 개인금고)에 들어가 금과 비단 같은 것을 끌어냈으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불질러 하나도 남겨둔 것이 없었다. 역대로 내려온 보화와 귀중품, 문무루(文武樓)와 홍문관에 쌓아둔 서적, 승문원 일기가 모두 타버렸다. 또 임해군(臨海君)과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의 집을 불살랐다. 모두 왜적이 오기 전에 우리 백성들에 의해 불타버렸다.”

 

또 종묘 각실(各室)의 인보(印寶)와 의장(儀仗)은 모두 버렸으며, 문소전(文昭殿,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를 모신 사당)의 위판(位版)은 지키던 관원이 땅에 파묻어 버리고 도망갔다. 이후 문소전의 제례(祭禮)는 마침내 없애고 거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왕실의 큰 제사를 지낼 때 제사를 지내는 격식이 까다로운데 그걸 대대로 기록한 책들이 하나도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이든 신하들의 희미한 기억에만 의존하여 제사를 아주 검소하게 지내게 됐다.

 

이로 인해 무수한 역사적인 자료와 더불어 노비문서들도 다 불타버렸고 나중에 실록을 기록할 사초(史草) 같은 게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여기저기 자료들을 긁어모아 날짜부터 뒤죽박죽인 선조실록(광해군 때)과 선조수정실록(인조 때)이 집권세력(북인, 서인)의 이해득실이 가미된 입김마저 작용하면서 겨우 만들어졌다. 자고로 노도(怒濤)와 같은 백성의 함성은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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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