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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위천(以民爲天)의 사상가, 이순신

category 칼럼/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2017. 8. 14. 12:09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사상가, 이순신

연일 계속되는 폭염 속에 짜증나는 뉴스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최근 뉴스 몇 가지

 

뉴스 1] “‘’기 밥그릇을/ ‘’난히 챙기니/ ‘’번도/ ‘민 편인 적이 없음이/ ‘연하지 않은가.” 자유한국당 5행시 짓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작으로 뽑힌 작품이다. 그 뜻은 여전히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갑의 자세를 비꼰 국민들의 쓴소리일 터이다.

뉴스 2]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잘 만난 ‘금수저’ 재벌 2, 3세 사장의 갑질 논란이다.

뉴스 3] 재판부 등에 로비명목으로 100억원의 부당수임료를 챙긴 혐의(변호사법 위반)로 구속기소된 부장판사 출신 최모(46) 변호사에게 징역 6년과 추징금 43억1250만원이 선고됐다.

뉴스 4] ‘공짜 주식사건’의 장본인인 모 검사장 출신에게 징역 7년, 벌금 6억원, 추징금 5억원이 선고됐다. 시세차익으로 얻은 120억 원대의 ‘주식대박’은 무죄선고.

뉴스 5] 폭우로 물난리가 났는데 외유 갔던 지방 도의회 의원이 국민들을 레밍(lemming)이라 지칭, 물의를 일으킴. 레밍은 맹목적으로 우두머리 쥐를 따라가 집단자살하는 나그네쥐를 뜻한다.  이 모든 게 안하무인의 고자세, 황금만능주의에 젖어있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정부의 선의와 간극

 

순자(荀子 BC 298~ BC 238)의 성악설(性惡說)을 따른다면, 인간의 심성은 본디 악하기 때문에 그 감성적 욕망을 방임하면 사회적 혼란이 생긴다. 따라서 외부의 가르침이나 예의에 의해서 수양되어져야 한다고 점잖게 타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저 교육이나 수양 정도로 안 되는 게 오늘날의 비상 상황이고 보면, 순자의 사상을 따른 법가의 대표자인 한비자(韓非子, BC 280∼ BC 233)의 주장대로 외부의 형벌에 의한 통제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동물이어서 자율 규제에 기대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동네 편의점 주인은 “차라리 가게를 접고 내가 알바를 뛰는 게 낫겠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년도 알바의 최저임금 시급이 7530원으로 확정된 데 따른 소규모 경영자로서 답답한 심경을 밝힌 것이다. 정부는 2020년 시급 1만원 시대 달성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공언했다. 무엇인가 위아래가 엇박자를 내며 삐걱거리는 것만 같다. 알바생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겠다는 정부의 선의(눈물 닦아줌)와 그 비용을 도저히 감당할 여력이 못 돼 폐업을 할 수밖에 없다는 편의점 주인의 고백(눈물 흘림)간의 간극이 너무나 커 보였기 때문이다.

100억원대 고액 수임료와 7530원의 알바생 시급, 이 두 가지 사안은 양극화가 심화된 우리나라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천민자본주의의 천국이 되어 버렸다. 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모두들 순간 눈속임에 홀려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한다.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이 혼탁한 과정을 통해서 가본들, 그 끝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공멸(共滅) 길로 마감할 것이다. 배려와 상생은 사치스런 사어(死語)에 불과하다.

 

 

맹자가 얘기한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란,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정치는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하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인데 그 요체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맹자(孟子 BC 371~ BC 289)는 제나라 선왕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백성들이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지내면 왕도(王道)의 길은 자연히 열리게 된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정되지 않아도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만 가능한 일이다. 일반 백성은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방탕하고 편벽되며 부정하고 허황되어 이미 어찌할 수가 없게 된다. 백성들이 죄를 범한 후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고 대답했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의 양혜왕(梁惠王) 상편에 나오는 말로,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말한다. 즉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맹자는 항산이 없는 사람은 항심이 없기 때문에 어떤 나쁜 짓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특히 교육에 있어 도덕(道德)을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에 삼정(三政)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삼정이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세 분야의 국가 정책을 말하는데, 이 중요한 정책이 무너져 힘없는 백성들만 착취를 당했다. 죽은 사람에게 군포(軍布, 군역 대신 내는 베)를 징수하는 것이 ‘백골징포(白骨徵布)’요, 갓난아이에게 징수하던 것이 ‘황구첨정(黃口簽丁)’이다.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1803년 전남 강진에 유배됐을 때 일이다. 한 남자가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困厄)을 받는다”며 스스로 자신의 남근(男根)을 잘랐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들고서 관아의 문을 들어가려 했지만 아전에 의해 문전박대(門前薄待) 당했다.

사연은 이렇다. 부부는 사흘 전 아이를 낳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방(吏房)이 핏덩이를 군적(軍籍)에 편입하고 부부의 소를 토색(討索)질 해갔다. 그러자 남편은 ‘남근을 잘못 놀려 자식에게 못할 짓을 했다’며 자해한 것이다. 이렇듯 백성들은 관아 탐관오리(貪官汚吏)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포악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시대였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양물(陽物)을 잘랐을까. 이 말을 전해들은 다산은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에 지필묵을 꺼내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를 지었다. 한여름 날 술잔을 앞에 놓고서 험한 세상인심에 한탄하면서 눈물지었다. 하일대주(夏日對酒)에 나오는 시다.

 

 

정약용의 시 '애절양'을 그린 박행보 화백의 그림. 사진=김동철 제공

 

종년역작고(終年力作苦) 일 년 내내 힘들여 일을 해도

증막비기신(曾莫庇其身) 제 몸 하나 가릴 길이 없고

황구출배태(黃口出胚胎) 뱃속에서 갓 태어난 어린 것도

백골성회진(白骨成灰塵) 백골이 진토가 된 사람도

유연신유요(猶然身有徭) 그들 몸에 요역이 다 부과되어

처처호추민(處處號秋旻) 곳곳에서 하늘에 울부짖고

원혹지절양(冤酷至絶陽) 양근까지 잘라버릴 정도니

차사양비신(此事良悲辛)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다산은 지방 벼슬아치들의 ‘갑질’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당시 강진 지방에서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수탈하는 학정(虐政)을 담은 칠언절구(七言絶句)를 남겼다. 탐진촌요(耽津村謠)에 실려 있는데 탐진은 강진의 옛 지명이다.

 

면포신치설양선(棉布新治雪樣鮮) 새로 짜낸 무명이 눈결같이 고왔는데

황두래박이방전(黃頭來博吏房錢) 이방 줄 돈이라고 황두(하급관리)가 뺏어가네

누전독세여성화(漏田督稅如星火) 누전(장부에 미기록된 밭) 세금 독촉이 성화같이 급하구나

삼월중순도발선(三月中旬道發船) 삼월 중순 세곡선이 한양으로 떠난다고

 

백성의 삶이야 어떻게 됐던 간에 중앙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나라는 하루가 다르게 썩어 가는데 조정은 끼리끼리 붕당(朋黨)을 만들어 치고받고 피 터지게 싸웠다. 지방의 하급관리들은 ‘굶주린 늑대’가 되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냈다. 과다한 공물(貢物) 상납과 가렴주구(苛斂誅求)의 과도한 징세(徵稅) 등으로 백성들은 허리가 휘어지고 골이 빠질 정도였다. 왕 중심의 전제군주제에서 백성들의 존재는 희미했다. 오로지 탐욕한 양반들에게 먹잇감이 되는 호구(虎口)’로서 역할을 할 뿐이었다.

 

백성의 절규

 

임진왜란 7년, 기아와 질병으로 인구도 줄어들어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농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고 땅과 집을 잃은 일부 농민들은 도적떼가 되어 산속으로 들어갔다. 조선시대에 잦은 민란(民亂)은 호구지책을 제대로 챙길 수 없는 백성들이 택한 마지막 절규이자 시위였다.

‘사흘 굶어 남의 담 타고 넘지 않는 자 없다’는 말처럼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난리가 터지자 백성들은 피난민이 됐고 경작지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씨를 뿌리지 않았으니 곡식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은 정한 이치.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서 백성들의 목구멍에 풀뿌리조차 들어가지 못하자, 급기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인상식(人相食)이 자행돼 처참한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여기에 역병까지 번져 나라는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모두 떨어져 내리는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남해안에서 활동하던 수군 이순신(李舜臣)은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 애를 많이 썼던 인물이다.

 

 

한산도 진영에서 백성들과 함께 하는 이순신. 사진=김동철 제공

 

계사년 1593126일 장계

“지금 본영(여수) 경내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 영남의 피난민들이 200여 호 이상 되는데 각각 임시로 살 수 있도록 하여 겨울을 지나게 하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구호할 물자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비록 사변이 평정된 뒤에는 제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당장 눈앞에서 굶주리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습니다. 이에 신이 살펴본 바 피난민들이 농사지을 만한 땅으로 돌산도 만한 곳이 없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들어가 농사짓게 하여 목마구민(牧馬救民)하면 양편이 다 편리할 것입니다.”

 

갑오년 159429일 난중일기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는데 돼지고기를 가져왔다. 그에게 당항포에 적선이 드나든 일을 묻고 또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는 참담한 상황에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물었다.”

양식 문제는 군대라도 해서 더 나을 게 없었다.

이순신은 군량 조달을 위해서 물고기를 잡아 쌀로 바꾸었다.

 

을미년 1595219

“송한련이 와서 말하기를 ‘고기를 잡아 군량을 산다’고 했다.”

1595년이면 명나라와 일본 간의 휴전협상이 벌어지던 때이다. 그래서 이렇다 할 치열한 전투는 없었다. 그 때 이순신은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아 곡물로 바꾸어 군량으로 삼았다.

 

 

한산대첩비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 이순신이 소금굽기와 고기잡이를 한 현장이다. 사진=김동철 제공

 

을미년 1595124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 7000여 두름을 싣고 왔기에 김희방의 무곡선(貿穀船 곡식을 사러 가는 배)에 계산하여 주었다.”

 

병신년 159619

“오수가 잡은 청어 360 두름을 받아 군관 하천수에게 주어 곡식을 받아 오게 했다.”

남해안 연해 지방에는 염호(鹽戶 소금 만드는 집)가 있었는데 난리 통에 모두 흩어져버렸다. 소금 생산이 없어지자 이순신은 직접 소금가마를 제조하고 소금을 구워냈다. 그 돈으로 군량이나 군복감을 사서 부하들에게 옷을 지어주었다.

 

을미년 1595517일과 519일 난중일기

“오늘 쇳물을 부어 소금 굽는 가마솥 하나를 만들었다”

 

병신년 1596211

“보성의 계향유사(繼餉有司 원호담당자) 임찬이 소금 50섬을 실어 가지고 나갔다.”

 

병신년 1596118

“아침부터 종일 군복을 말았다.”

 

 

한양으로 압송되는 이순신을 그린 십경도 중 하나.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다. 사진=김동철 제공

 

병신년 1596123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 더 주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도 진영에서 부하들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했고 진영을 따라다니는 피난민들에게도 먹고살 수 있도록 사랑을 베풀었다.

서로 어려울 때 나눴던 그 사랑은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이 한산도 진영에서 체포되어 한성으로 붙잡혀갈 때 길거리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함거(轞車)를 붙잡고 “장군이 안 계시면 우리는 죽습니다.”라며 울부짖었다. 또한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 고금도에서 아산까지 그 운구(運柩)가 지나는 길에 선비들은 제문(祭文)을 지었고 백성들은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냈다.

본디 백성은 유혜지회(有惠之懷)한 존재이다. 즉 자신들에게 혜택을 주는 자, 그게 적이든 아군이든 그 누구이든 간에 자신을 거둬주는 사람을 따르게 마련이다. 공자의 시경(詩經)에 따르면 “지극히 천하고 어디에도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이 바로 백성이요(至賤無告者小民也), 높고 무겁기가 산과 같은 것도 또한 백성이다(隆重如山者亦小民也).”라고 했다.

이순신은 전쟁터에서 백성과 함께 동고동락을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백성이 있어야 전쟁도 할 수 있고 나라도 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즉 백성을 하늘처럼 잘 떠받들어야 한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사상가였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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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