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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명암, 옥포승첩과 칠천량 패전

category 칼럼/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2017. 8. 18. 13:15

거제의 명암, 옥포승첩과 칠천량 패전

  • 거제도 앞바다의 해류는 일본 대마도를 거쳐 규슈로 향한다. 13세기 남해안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던 왜구들은 이 해류를 타고 거제도에 당도했다. 부산과 가까운 거제도는 일찍이 조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옥포만에 위치한 대우조선해양. 사진=김동철

 

옥포해전

 

거제의 옥포(玉浦)는 그 이름처럼 푸른빛의 바다가 일렁이고 있다. 한 여름 뙤약볕을 받은 바다는 금빛 물결로 평화롭다. 바로 이곳에서 임진년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이 벌어졌다. 왜 수군과의 첫 전투인 만큼 조선수군들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이순신(李舜臣) 장군 또한 적의 세력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손자병법에 따르면 부지피지기 일승일부(不知彼知己 一勝一負), 즉 상대를 모르고 자신을 아는 상황에서는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지는 일승일부(一勝一負)가 된다. 당나라 때 두우(杜佑)를 포함한 많은 주석가들은 이를 두고 “승률이 절반이다”라고 풀이했다.

 

 

임진왜란 주요 해전지역을 기록한 해전도. 사진=김동철

 

첫 해전의 승리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대규모 왜군이 연이어 상륙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오아포(거제 가배량)에 있던 수영 및 성 내외 인가에 불을 지르고 정박중인 병선 73척과 각종 총통과 식량을 수장시켰다. 이른바 청야(淸野)작전이었다. 그리고 판옥선 한 척에 의지한 채 겨우 피신했다. 그리고 급히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급보를 보냈다.

선조와 조정의 명에 따라 여수의 이순신 함대는 판옥선 28척과 협선 17척과 포작선 46척 등 모두 91척의 위용을 갖춰 원균과 만나기로 한 소비포(고성군 춘암리)로 떠났다. 소비포에 나타난 원균 함대는 우수영 산하 장수들이 타고 온 판옥선 4척, 협선 2척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적의 상황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물령망동(勿令妄動) 정중여산(靜重如山)! 즉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침착하게 행동하라고 명령했다. 옥포 포구에 포진한 적선은 대소선을 합해서 31척이었다. 왜 수군은 배를 정박시켜놓은 채 육지에서 약탈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침착하게 적의 함선을 향해서 노를 저어갔다. 적의 함선이 총통의 사정거리(약 1km)에 들어오자, 이순신 장군은 방포(放砲) 명령을 내렸다. 이에 판옥선 위의 포수들은 준비된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내 수십발의 대장군전, 철환과 돌덩이 등이 빗발치듯 날아갔다. 삼나무로 만들어진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는 재질이 약해 탄환을 맞는 즉시 속속 깨지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불화살이 날아가 왜선에서 어지럽게 휘날리는 깃발과 돛에 명중하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뭍에 올랐던 왜군들은 조총을 쏘면서 저항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총통과 조총 소리, 화염과 연기가 피워오르는 옥포만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었다. 조선수군은 왜 선단 31척을 분멸, 수장시켰다. 육지에서 연전연승하던 왜군은 조선수군의 기습공격에 어이없이 무너졌다. 초전박살의 사투를 벌인 조선수군은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뛸 듯이 기뻐했다. 무엇보다도 왜수군을 이겼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옥포에서 첫 해전을 승리로 장식한 이순신 함대는 다음날 고성 적진포 해전에서 13척 모두 분멸시켰다. 이로써 이순신의 1차 출전으로 왜병선 44척을 수장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조선수군의 함선은 단 한 척도 손상되지 않았다.

 

 

옥포승첩기념비. 사진=김동철

 

옥녀봉과 칠천도

 

손무는 일찍이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서 싸우기를 구한다(勝兵先勝而後求戰)”고 했다. 장군이 구사한 전략은 선승구전(先勝求戰)이었다. 1차 해전을 승리로 마감한 장군이 고성 월명포(月明浦)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전라도사 최철견(崔鐵堅)으로부터 선조가 한성을 떠나 몽진(蒙塵)에 나섰다는 통첩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옥포해전공원의 이순신 사당과 기념관 옆에는 옥포승첩을 기리는 높다란 돌탑이 우뚝 서있다. 그 건너편 옥포만에는 세계적인 조선소인 대우해양조선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이순신의 승첩지에는 오늘날 조선, 철강, 화학 등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그가 왜 그렇게 나라를 지키고자 분골쇄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옥포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고성과 거제도 사이에 옥녀봉(232m)을 이고 있는 조그만 칠천도(漆川島)가 나타난다. 칠천(漆川)이라는 이름처럼 검은 바다가 보이는 섬이다. 지금은 하청면과 연륙되어 자동차로 건널 수 있다. 정유년 1597년 7월 16일 이 칠천량 해전에서 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왜 수군에게 기습공격을 받아 조선수군이 궤멸되는 상황을 맞았다.

 


옥포기념공원에서 바라본 옥포만 풍경. 사진=김동철

 

패장으로 낙인 찍힌 원균

 

칠천량 패전이 있기 얼마 전인 정유년 7월 11일 도원수 권율(權慄)은 부산포 공격을 주저하는 원균을 불러다가 곤장을 쳤다. 도원수는 현역 군최고봉인 합참의장이고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 즉 해군참모총장인데 곤장형을 가했다.

“통제사 원균이 전진하려 하지 않고, 우선 안골포의 적을 먼저 쳐야 한다고 하지만, 수군의 여러 장수들은 이와는 다른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고 원균은 운주당(한산도)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합의하여 꾀하지 못할 것이므로 일을 그르칠 것이 뻔하다.”

권율이 선조와 조정에 올린 장계내용이다. 이때 이순신은 백의종군 상황으로 ‘무등병’, 아무런 권한이 없어 그저 돌아가는 형세를 잠자코 지켜봐야 할 때였다. 볼기에 장을 맞은 원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선조와 도원수는 부산포 출전을 재촉했다. 원균은 홧김에 출전했다. 이때 남해 제해권을 쥐려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1592년 이순신에 의한 한산도 패전을 만회하려는 듯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기세로 1000여척을 동원, 조선 수군 160척을 겹겹이 포위했다. 야간 기습에 치열한 혈전이 벌어졌고 조선전함은 거의 모두 수장됐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등 정3품의 고위 지휘관들은 전사하고 1만여 조선수군은 죽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칠천량 해전도. 사진=김동철

 

한 장수의 분별심을 잃은 화(anger)가 조선수군의 궤멸이라는 거대한 위험(danger)을 초래한 것이다. 원균은 또 아들 원사웅(元士雄)을 데리고 참전했다가 아들마저 잃었다. 패전 후 뭍에 올라 도망가다 왜군에게 추원포(秋原浦)에서 참살당했다. 조선 수군의 삼도통제사가 뭍에서 왜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아무도 그 시체도 찾지 못했고 후세에 친척들이 고향인 경기도 평택시 부근에 가묘(假墓)를 만들어 주었다. 그런 연후 원균은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장본인, 패장(敗將)으로 낙인 찍혔다.

칠천량 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에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12척의 판옥선을 몰고 한산도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 12척의 배는 장흥 회령포에 숨겨졌는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에 의해 발견되었고 꼭 두 달 뒤인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왜군 133척을 물리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 사람은 흑역사(黑歷史)의 패전지장이요, 한 사람은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구국의 명장(名將)’이 된 연유다. 이처럼 극명하게 대치되는 대척점에 두 장수가 있었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