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해군사에 한 획을 그은 이순신과 왜장의 전투
난마(亂麻)처럼 뒤엉킨 전국시대 통일
일본 통일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가 쌀을 씻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밥을 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가 그 밥을 먹어치웠다고들 한다. 또 일본에서 영웅으로 칭하는 세 사람을 상징적으로 비교하는 이야기가 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새를 울게 만들려면? 오다 노부나가는 새에게 울라고 명령을 한 다음 그래도 울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칼로 목을 베어버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갖 방법을 써서 울도록 만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처럼 오다 노부나가는 불같은 성격으로 난마(亂麻)처럼 뒤엉킨 전국시대에서 통일의 가닥을 잡았으나 통일을 목전에 두고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변을 당한 것이다.
천하의 대권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규슈를 정복하고 대마도주인 소오(宗)씨에게 조선의 복속을 요구토록 명령했다. 이어 1590년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을 함락시켜 오슈(奧州)를 평정함으로써 마침내 일본 통일을 완수했다.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는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허성(許筬) 등 조선 사절단을 데리고 쥬라쿠다이(聚樂第)에서 히데요시를 접견케 했다. 그때 히데요시는 조선 사절단에게 정명향도(征明嚮導)를 요구했다. 즉 명나라를 치러 가는데 조선은 앞장서 길을 안내하라는 것이었다. 뼛속까지 존명사대(尊明事大) 의식을 가졌던 선조 임금과 조선 조정은 일언지하에 반대했다. 히데요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 침략을 선언했다.
히데요시는 규슈 사가(佐賀)현 동마쓰라(東松浦) 반도 끝에 나고야(名護屋城) 성을 축조하고 전국 다이묘(大名)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1592년 4월 13일 15만 8천여명의 대군이 폭풍처럼 연이어 부산포에 상륙한 것이다. 제1군부터 제9군까지 병력은 15만 8800여명이었는데 총대장은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는 갓 스무살짜리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3~1655)였다. 평생 전쟁을 업으로 삼은 사무라이들의 예리한 칼과 장창 그리고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앞세운 일본군 앞에 조선 육군은 추풍낙엽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전해진 조총은 당시 최신예 무기로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놓는 ‘게임 체인저’였다.
이순신과 직접 전투를 벌였던 왜수군 대장들
임진왜란 개전 20일만인 5월 3일 한성이 함락됐고 6월 14일 평양성이 무너졌다. 선조는 6월 11일 평양성을 빠져 나와 압록강변 의주를 향해 머나먼 몽진(蒙塵)의 길을 떠났다. 일본군의 전광석화같은 발 빠른 움직임 속에서 조선 강토는 속절없이 무너져 밟히고 찢기고 피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남해 바다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준비된 전략가’ 이순신(李舜臣) 장군에 의해 왜수군은 연전연패 당했다. 조선수군의 총통 공격 앞에 왜수군 전선들은 깨지고 불타고 가라앉았다.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대 걸림돌은 이순신(李舜臣)의 조선수군이었다.
이순신과 직접 전투를 벌였던 왜수군 대장들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1563~1631),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1542~1600),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1556~1630), 쿠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1561~1597)와 그의 형 도쿠이 미치유키(得居通幸 1557~1592),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 1557~1612) 등이다. 또 육군 장수로는 제4군대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 제7군대장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 및 제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와 그의 사위인 대마도 도주 소오 요시토시 등이다.
왜수군 병력은 총 9450명 정도였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일본 전국에서 새로 건조된 아타케부네와 세키부네 등 전함은 700여척, 화물선과 보조선 등을 합치면 총 2000여 척으로 추정된다.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의 본국 병참지원을 막는 조선수군을 없애려는 책략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 수군에 의해 남해제해권을 상실함으로써 서해를 통한 금강, 한강, 임진강, 대동강, 압록강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무엇보다도 곡창지대인 전라도 공략에 차질이 빚어져 조선에 출병한 왜군의 식량문제가 불거졌다. 왜군은 기아와 전염병 및 조선의 혹독한 추위에 출병 1년만에 병력의 3분의 1 정도를 손실했다.
16세기 세계 해군사에 한 획을 긋는 대승부전
이순신과 왜수군 장수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승부전이었다.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는 같은 하늘 아래서는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이었기 때문에 전의가 더욱 불타올랐다. 이같은 상황에서 조선 수군 명장(名將)과 왜 수군 용장(勇將)들과의 한판 대결은 16세기 세계 해군사에 커다란 한 획을 긋는다.
우선 왜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이순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연으로 맺어진 사이다. 자웅(雌雄)을 겨뤄보자는 도전장을 먼저 던진 쪽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다.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국난 극복에 진력하던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침략하는 자에게 응징의 철퇴를 내렸다. 그것이 바로 임진년 1592년 7월 8일의 한산대첩이다.
와키자카는 한산해전 바로 전인 1592년 6월 3일 경기도 용인에서 1600여명의 기마 병력으로 전라감사 이광(李珖)이 이끄는 남도근왕군(南道勤王軍) 5만명을 기습 공격해 단숨에 격파하는 무용을 기록했다. 이 승전보를 접한 히데요시는 와키자카에게 급히 남쪽으로 내려가서 이순신을 격파하라고 명령했다.
7월 와키자카는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등과 함께 왜수군 연합함대에 편성되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척, 구키 요시타가의 제2진 40여척,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가 합세한 총 150여척의 연합함대였다. 그런데 용인전투에서 승리를 한 그는 의기양양한 상황에서 이순신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단독으로 출진했다. 대소선 73척을 이끌고 출전한 와키자카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에 걸려 견내량을 빠져 나오자 좌우 양쪽에 포진해있던 조선 수군 함대의 학익진(鶴翼陣) 전법에 걸려 대패했다. 73척 가운데 59척을 잃었고 왜장의 갑주를 벗어던진 채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이 해전에서 해적 출신 와키자카 사베에(脇坂左衛兵)와 와타나베 시치에몬(渡邊七右衛門)은 전사하고 마나베 사마노죠(眞鍋左馬允)는 한산도로 상륙했다가 할복자살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에는 “와키자카 장군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단독으로 출전했고 결국 유인책에 말려 쉽게 패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와키자카의 단독 출전으로 패전을 한데다 와키자카의 행방마저 분명하지 않은 데 통분하고 있던 구마노 해적 출신의 구키 요시타카는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9천명의 수군을 이끌고 이순신에게 패한 일본 수군을 구원하려 한산 해전 다음날 7월 9일 출전하였으나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李舜臣)에게 또 대패하고 야반도주,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안골포(진해시 웅동면) 해전에서 왜수군은 42척의 전함을 잃었다.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
1592년 7월 15일 안골포 해전과 관련 이순신 장군이 선조에게 올린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이다.
“11일에는 새벽에 다시 돌아와서 포위해 보았지만 왜적들은 허둥지둥 닻줄을 끊고 밤을 타서 도망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날 싸움하던 곳을 살펴보니 죽은 왜적의 시체들을 열 두 곳에 쌓아놓고 불태웠는데 아직도 타다 남은 뼈와 손발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으며 안골포 성 안팎으로는 흘린 피가 땅에 가득하여 곳곳이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왜적들의 사상사 수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 연구가 가타노 쓰기오(片野次雄)가 쓴 ‘이순신과 히데요시’에는 안골포에서 왜군 측 사상자수는 2500여명으로 추산했다.
이순신 장군과의 애증에 대한 기록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583년 시즈카다케(賤ケ岳) 전투에 참가해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명성을 얻어 그 공으로 히데요시로부터 1585년 아와지 스모토번의 3만석 영지를 하사받았다. 왜란이 끝난 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을 위한 일본통일 전쟁인 세키가하라(關ケ原) 결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 그 공훈으로 1609년 이요쿠니의 오즈번주로 석고(石高 쌀수확량) 5만3000석을 받았다. 원래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이었으나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도쿠가와에게 미리 동군으로 갈 의사를 밝혔고 전투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아서 전투가 끝난 후에도 참수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쿠가와와 상당히 가까워졌다고 한다.
구키 요시타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수군 총대장으로 임진왜란 개전 1년 후 층루선인 신형 아타케 부네(安宅船)를 개발했고 이 신형 대선을 전군에 보급했다. 이전의 층루선이 포장마차형이었다면 신형은 판자로 밀폐시켜 방어력이 강화된 2, 3층짜리였다. 히데요시는 연이은 왜수군이 이순신에게 패하자 왜수군 최고의 지장(智將)인 구키를 내세워 조선수군의 궤멸을 꾀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구키는 해적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섬겨 대전투군단을 조직할 수 있었다. 1578년 11월 구키는 노부나가의 명령에 따라 철갑의 거선 6척을 증강시켜 그때까지 압도적인 우세를 자랑하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 수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전국 제1위의 수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해 패전 후 자결했다.
가토 요시아키는 16세 때까지 말 거간꾼을 따라 다니다가 1583년 시즈카다케(賤ケ岳) 전투에 참가 ‘칠본창(七本槍)’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1600년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도쿠가와의 동군에 붙어 이요 24만석의 다이묘로 출세했다. 다카마스성(高松)을 축조하고 도쿠가와의 시종을 겸했다.
도도 다카도라는 정유년 1597년 명량해전에서는 이순신에게 대패하여 군선 31척을 잃었다. 1598년 도요토미가 죽자 조선을 침략하였던 원정군의 철수를 통할하였다. 그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선봉장으로 무공을 세운 그는 도쿠가와의 신망을 얻고 도합 32만 951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와키자카는 한산도 해전 참패를 분풀이하려는 듯 계사년 1593년 6월 22~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해 성안의 민군관민의 도륙에 앞장섰다. 전공으로 사체에서 코와 귀를 베어 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조선에 들어온 와키자카는 7월 16일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와 함께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야간에 기습해 거의 섬멸시켰다. 그리고 1597년 8월 13~15일 남원성 전투에서 민군관민의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본국의 히데요시 앞으로 보냈다.
와키자카는 일본에서는 같은 칠본창인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561~1624)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1562~1611)에 지명도가 한참 떨어지는 장수이지만 나름 ‘감히’ 이순신 장군에게 도전장을 던졌던 ‘용장’으로 기록되었다. 전란이 끝난 뒤 와키자카는 그의 가보(脇坂家譜)에 이순신 장군과의 애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다.
‘내가 가장 두려운 자는 이순신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미워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내가 가장 흠모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자도 이순신이다. 내가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자도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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