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앞에서 쩔쩔 맨 일본 전국 다이묘(大名)
조선 수군대장 이순신(李舜臣)에게 혼쭐이 난 왜수군 장수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밝혔다. 그런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내로라하는 전국 다이묘(戰國大名)인 육군 장수들마저도 이순신 앞에서 쩔쩔맸다. 그 장본인(張本人)들로는 제4군대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와 제7군대장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 제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 및 그의 사위 소오 요시토시(宗義智 1568~1615) 등을 들 수 있다.
일본 내 저항세력, 규슈지역 다이묘(大名)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무사(武士)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에게 충성을 다해 일단 출전하여 승리한 뒤 공명(功名)을 세워 입신출세(立身出世)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석고(石高, 쌀 생산량)가 많은 영지(領地)를 가진 일국일성(一國一城)의 영주(領主)가 되는 게 꿈이었다. 무사들은 전투에서 자기의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햇볕 아래 이슬처럼, 바람에 날리는 벚꽃처럼 미련 없이 목숨을 버렸다. 칼날에 잘려 땅에 떨어진 머리는 동백꽃이라 불렀다.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자 앞에는 두려움이란 있을 수 없었다.
1587년 규슈 복속을 끝으로 전국을 완전히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 저항세력인 규슈지역 다이묘(大名)들을 잠재우려는 책략으로 조선침략을 구상했다. 그들에게 약탈한 조선 땅을 영지로 내려주려는 의도였다.
우선 시마즈 요시히로를 배출한 사쓰마(蕯摩)의 시마즈가(家)는 가마쿠라 막부(幕府 1336~1573) 이래 전국 다이묘로서 규슈의 최강이었다. 규슈 정복에 나선 히데요시에게 끝까지 저항한 세력가였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때 제4군(병력 1만5000명) 대장으로 초전에 강원도를 점령했다. 이후 정유재란 때인 무술년 1598년 10월 1일 사천왜성에서 명의 중로군 대장 동일원(董一元)과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을 궤멸시킨 장본인이다. 현재 사천왜성 부근에는 조명연합군 1만여명의 희생자를 모아놓은 조명연합 군총(軍塚)이 남아있다. 그런 용장 시마즈는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와 최후 결전을 벌여 가까스로 목숨만 건진 채 패퇴했다.
해로가 차단되자 뇌물공세에 나선 왜장
1598년 8월 18일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급사하자 5대로(大老)의 필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는 조선에 출병한 병력의 전원 철수를 명했다. 이에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는 거제를 거쳐 집결지인 부산으로 가려 했으나 조명수군연합군 대장 진린(陳璘 1543~1607)과 이순신(李舜臣 1545~1598)에 의해 해로가 차단되었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금은보화, 말과 칼 및 수급(首級) 등을 뇌물로 바치면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애걸했다. 뇌물공세에 마음이 움직인 진린은 궁서물박(窮鼠勿迫)! 즉 쫓기는 궁한 쥐는 뒤쫓지 말라며 이순신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편범불반(片帆不返)! 단 한 척의 왜선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진린의 허락 아래 고니시는 소형 탐망선을 띄워 사천왜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전시작전통제권이 없던 이순신은 약소국의 장수로서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쓰마의 시마즈군이 조명연합수군의 배후를 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순신은 함대를 지름 길목인 노량으로 움직였다. 거기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고니시는 필사의 혈로(血路)를 찾아 탈출해버렸다.
고니시 구출작전 중 일어난 노량해전
고니시의 구출작전에 나선 일본 함대는 사천의 시마즈, 창선도의 소오 요시토시, 부산의 데라자와 히로다카(寺澤廣高), 다카하시 나오츠쿠(高橋直次),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盛) 등으로 이들 연합함대는 300척 규모의 대선단이었다. 이들은 18일 밤 창선도와 사천선창에 집결하여 해로 100리 길인 순천왜성으로 향했다.
7년 전쟁의 최후 결전은 노량에서 일어났다. 11월 19일 새벽 2시경 양측 함대는 노량해협에서 조우하면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어두운 바다에서 접전이 일어났는데 조명연합군은 신화(薪火 기름을 잔뜩 묻혀 불붙은 나무토막)를 바다에 던져 그야말로 사위는 불바다가 되었다. 이 화공(火攻)은 겨울철 북서풍을 이용한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조선수군의 총통은 여지없이 불을 뿜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의 사선과 호선보다 더 튼튼한 판옥선을 진린(陳璘) 도독과 부총병 등자룡(鄧子龍 1531~1598)에게 내주어 함대를 지휘케 했다. 치열한 접전 결과는 19일 정오쯤에 끝났다.
전투가 끝난 뒤 현지를 답사한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은 “일본 군선 200여척이 격침됐고 왜군 사상자가 수천명”이라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적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50척의 군선을 이끌고 혈투의 현장을 벗어나 부산포쪽으로 도주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휘하의 가리포첨사 이영남(李英南),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 고덕장(高德將) 등 부장급 10여명의 조선 장수들이 전사했다. 명의 수로군에서는 등자룡 등 부장급 3명이 전사했다. 무엇보다 이순신은 한많은 생애를 마침으로써 마침내 살신성인을 이룩했다. 남해 관음포 격전지 부근 이순신의 사당인 이락사(李落祀)에는 대성운해(大星隕海)의 현판이 걸려있다. 즉 바다에 큰 별이 떨어진 것을 기억하는 곳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시마즈 요시히로는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1593~1615)를 옹호하는 서군으로서, 1600년 9월 ‘일본판 천하 판갈이 싸움’인 세키가하라 전투(関が原の戦い)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의 동군 진영을 돌파하는 무명(武名)을 떨쳤다.
다이묘들의 최후
한편 일본 내 다이묘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는 모리 테루모토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최대 병력인 3만명을 이끌고 나온 제7군 대장이었다. 모리가(家)는 일본 혼슈(本州) 남부 히로시마, 조슈번의 최대 영주로 일본 제1의 항로인 세토내해(內海)를 장악해온 전국 다이묘였다. 정유년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 300여척의 대군단을 이끌고 그가 나타났다. 겨우 1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필사즉생을 외치는 이순신의 초라한 함대와 비교했을 때 영락없는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
왜수군 세키부네 133척 가운데 31척의 선발대가 13척의 조선 수군 판옥선을 둘러쌌다. 도저히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물길, 지형, 바람, 주위환경 등을 헤아리는 전략과 그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적을 물리쳤다. 천행(天幸)이었다. 바다에 떨어진 쿠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 1561~1597)는 갈고리로 배 위로 올려진 뒤 머리는 효수됐고 몸뚱이는 토막내어졌다.
쿠루시마 미치후사는 안골포 해전을 지휘했던 마다시(馬多時)였다. 미치후사의 형 쿠루시마 미치유키(來島通之)는 임진년 1592년 7월 10일 전라좌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가 당포 (통영 미륵도) 앞바다에서 왜선 21척을 격침시킬 때 사로잡혀 참수되었다. 두 형제가 모두 이순신 수군에게 의해서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명량해전에 참전한 왜장들 가운데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1556~1630)는 중상을 입었다. 모리 테루모토는 바다에 빠졌으나 가까스로 건져져 구조되는 수모를 당했다.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의 유언에 의해 히데요리를 보좌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맹주로 추대되지만, 패전으로 영지가 스오, 나가토로 축소됐다. 양자인 모리 히데나리((毛利秀就)에게 대를 물려주고 출가해 겐안, 소즈이라 불렸다. 히데나리는 죠슈(長州) 번의 초대 번주가 됐다.
여기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영지인 사쓰마, 가고시마와 모리 테루모토의 영지인 히로시마, 조슈번은 정한론(征韓論)이 싹튼 곳으로 19세기 말, 바람 앞의 촛불같았던 대한제국의 운명에 결정타를 가한 악연의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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