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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예시로, 때론 계시로, 이순신의 꿈

  • 이순신(李舜臣)7년 기록 난중일기에 38회 정도 꿈 이야기를 남겨놓았다.

 

1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시상황에서 불안한 잠재의식이 꿈으로 발현된 것이리라. 그것은 때론 예시(豫示)로, 때론 계시(啓示)로 나타났다. 정유년 1597년 선조의 부산포 공격을 거역했다는 무군지죄(無君之罪)로 한성 의금부로 끌려가 고문 받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풀려난 지 11일째인 4월 11일 기록이다.

“출옥한지 매우 번거로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음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머님 생각이 나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덕이를 불러서 대략 이야기하고 또 아들 울에게도 이야기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 취한 것도 같고 미친 듯도 하여 가눌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백의종군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은 이순신은 경상도 초계의 도원수 권율(權慄) 진영으로 가기 전, 어머니에 대한 불길한 꿈을 꿨다. 그런데 며칠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4월 13일 온양 땅에 당도하고 나서 어머니(초계 변씨)의 부음을 들었다. 어머니는 여수 고음천에서 아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서해를 통해 고향 아산땅에 당도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 향년 83세로 당시로서는 꽤 장수한 편이었다.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들은 이순신은 해암(蟹岩 게바위)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시신을 수습했다.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떠났으니 꿈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5월 6일 이순신의 꿈에 나타난 두 형이 서로 붙들고 울면서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 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이날 일기에서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라고 할 정도로 비통해 했다.

 

 

백의종군 때 어머니 상을 당한 이순신. 사진=KBS 불멸의 이순신.

 

2

정유년 1597년 7월 14일.

“새벽에 내가 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한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널렸는데 혹은 밟고 혹은 목을 베기도 했다.”

백의종군의 몸이었던 이순신은 그 이틀 뒤 7월 16일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수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궤멸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1597년 8월 2일.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 징조가 있었다.”

그 다음날인 8월 3일 이순신은 진주 손경례(孫景禮)의 집에서 선전관 梁護(양호)가 가져온 선조의 교서를 받았다. 이 교서는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를 말하는데, 기복(起復)이란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상중(喪中)에는 3년(최소 24개월) 동안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나라의 필요에 의하여 상제의 몸으로 상복을 벗고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을 말한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그의 수중에는 군사, 군량, 군기 등 아무 것도 없었다.

1597년 9월 15일.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저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명량해전 바로 전날의 꿈이었다. 13대 133척의 중과부적(衆寡不敵), 절대 열세였지만 이순신은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휘하 수군들과 혼신을 다해 적을 물리쳤다. 해전을 마친 뒤 이순신은 ‘천행(天幸)’이라고 술회했다.

1591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바닷가에 거북이들이 많이 있는 꿈을 꾸었다. 이순신은 이 꿈을 통해 이전에 있던 귀선(龜船)을 새로운 거북선으로 만드는 법고창신 정신을 발휘했는지 모른다.

 

 

 

아들 면 죽음과 관련된 이순신의 현몽. 사진=KBS 불멸의 이순신

 

3

명량해전을 마친 뒤 어느 날 당시 본가인 충남 아산에 머물고 있던 막내아들 면에 대한 꿈을 꾸었다.

1597년 10월 14일.

“맑다. 새벽 2시쯤에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위로 올라가는데 말이 발을 헛디뎌서 냇물 속에 떨어지기는 했으나 쓰러지지 않았으며, 끝에 가서는 아들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고 깼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명량에서 패한 왜적이 이를 복수하기 위해 본가로 쳐들어가 아들 면을 죽였다. 이순신은 10월 14일 ‘통곡(慟哭)’이란 편지를 받았는데 막내아들 면이 죽었다는 비보였다. 셋째 아들 면은 1577년 아산에서 태어났지만 장군은 그 옆에 없었다. 당시 함경도 변방에서 여진족과 대치하던 하급 군관이었다. 변방의 아버지는 막내를 늘 그리워했고 막내는 무럭무럭 커가면서 아버지를 자주 볼 수 없음에 매우 서운해 했다.

1597년 정유년은 장군에게 가장 서럽고 고통스런 한 해였다. 막내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悲報)를 접해야 했고 4월 13일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전하는 부음(訃音)을 들어야 했다.

1597년 10월 16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10월 17일에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哭)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비통함을 정말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19일에는 고향집 종이 내려오니 그걸 보고 아들 생각이 나서 다시 통곡하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는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리고, 밤에 앉아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났다. 아직 어머니의 상중(喪中)인데다가 아들까지 잃어 그 슬픔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이 충무공의 ‘행록’. ©김동철

 

4

이순신은 아들을 죽인 왜적을 찾아내 아들의 한을 풀어줬다.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록’에 이면의 죽음에 관한 장면이 나온다.

“이면의 전사 4개월 후 이순신의 꿈에 이면이 나타나서 ‘날 죽인 적을 아버지께서 죽여주십시오!’라고 울면서 말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이 ‘네가 살아 있을 때는 장사였는데, 죽어서는 그 적을 죽이지 못 하겠다는 말이냐?’라고 하니, 이면은 ‘제가 그 놈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겁이 나서 그놈을 못 죽이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저승과 이승이 무슨 간격이 있을 것입니까?’라고 말하고는 슬피 울면서 사라졌다. 잠에서 깬 이순신이 잡혀온 일본 포로들을 조사하니, 그 중에 이면을 죽인 장본인이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그 일본군을 죽임으로 아들의 복수를 하였다.”

가족사 이외의 꿈도 꾸었다.

갑오년 1594년 2월 5일.

“새벽 꿈 속에서 명마를 타고 바위 산 꼭대기를 단숨에 뛰어 올랐다. 산꼭대기에 오르니 아름다운 산맥과 봉오리들이 동서로 뻗쳐진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어떤 미인이 혼자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운 꿈이다.”

또 “초 1일 한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나의 첩(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로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옥형스님이 기거했던 석천사 의승당. ©김동철

 

5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록에 이순신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머니 변씨가 이순신을 낳을 때 시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 1519년 조광조(趙光祖)의 기묘사화 연루)이 꿈에 나타나 “그 아이는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또 그가 태어났을 때 점쟁이가 찾아와 “이 아이는 50세가 되면 북방의 대장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고도 한다.

‘역적’ 집안으로 몰려 벼슬을 하지 않았던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李貞)은 첫째 아들을 이희신(李羲臣)으로 고대 중국의 이상적 인물인 복희씨(伏羲氏)에서 따왔다. 둘째는 이요신(李堯臣)이고 셋째가 바로 이순신(李舜臣)이다. 태평천하의 요순(堯舜)시대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신하가 되라는 아버지의 꿈과 기대를 읽을 수 있다. 막내의 이름은 치수에 능한 우왕에서 따와 이우신(李禹臣 호 여필)이다.

이순신은 죽어서도 나라 지키는 군신(軍神)이 되었다.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순천의 옥형(玉浻)이란 노승은 승병으로, 이순신을 모시고 왜적과 싸웠다.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는 충민사(忠愍祠 전남 여수시)에 눌러앉아 평생 동안 제사를 모셨다. 옥형 스님은 바다에 변고가 일어날 때마다 “이순신이 미리 꿈에 나타난다.”고 증언했다. 남도 백성들에게 이순신은 ‘바다의 신’이 된 것이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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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