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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밤에 읽는 이순신 시조

category 칼럼/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2017. 9. 16. 13:38

가을 밤에 읽는 이순신 시조

  • 이순신은 문무겸전의 인재이다. 임진왜란 7년 동안 23전 23승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운 무인이지만 그의 감성과 글 솜씨는 어느 문인 못잖다.

 

이순신이 지필묵(紙筆墨)을 준비해 시조를 썼던 한산도 진영의 수루(戍樓). Ⓒ김동철

 

임진년 1592년 4차 출전을 하면서 치열하게 싸웠던 그는 그 다음해 명군과 일본군 간에 강화협상이 진행됨으로써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때 짬을 내서 그는 차고 넘치는 회한(悔恨)을 진중음(陣中吟)으로 읊었다. 특히 한산도 진영의 수루(戍樓)와 뱃전에 달빛이 가득 내려앉는 날이면 어김없이 지필묵(紙筆墨)을 준비해 써내려갔다. 달빛에 빠져 새벽닭이 울 때까지 우국충정에 깊은 시름을 했다. 동헌(東軒) 마루 한 켠의 두 자루 칼이 어슴푸레 푸른 달빛을 토해냈다.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

세척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일휘소탕(一揮掃蕩) 혈염산하(血染山河)

한번 휘둘러 휩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에 물들었네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 이순신 친필. Ⓒ김동철

 

이 검명(劍名)에 보이듯이 그의 나라 향한 결기가 단단하다. 류성룡이 쓴 정충록의 발문에는 이 검명이 송나라 장군 악비(岳飛 1103~1142 시호 충무공)의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악비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군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의 등에 산하동색(山河動色)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이순신 장군도 역시 왜적을 소탕하여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서 칼에 평소 존경하던 악비의 글을 새겨 넣었다. 진충보국(盡忠報國)! 나라사랑을 담은 진중음(陣中吟)은 모두 27수로 ‘청구영언’ ‘고금가곡’ ‘가곡원류’ 등에서 호국시(護國詩)로 발견된다.

7년 전장기록 난중일기(7권)는 1962년 12월 20일 편지 모음인 서간첩(1권), 61편의 장계(狀啓)와 장달(狀達)을 담은 임진장초(壬辰狀草 1권)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됐다. 또 난중일기는 2013년 6월 18일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장군의 일상과 서정을 담은 글을 세계가 알아준 것이다. 가람 이병기는 1950년 ‘충무공의 문학’에서 “이순신의 시와 서간문, 난중일기는 그 간곡한 충정이 주옥같이 그려져 있어 무문농묵(舞文弄墨)하는 여간의 문필가 따위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문학”이라고 평했다. 영국 수상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분명 장군의 7년 전장 기록이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루에 적혀있는 한산도가. Ⓒ김동철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도월명야상수루(閑山島月明夜上戍樓)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무대도탐수시(撫大刀探愁時)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하처일성강적경첨수(何處一聲羌笛更添愁)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1795년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1593년 7월부터 한산도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우국충정의 착잡한 심회를 노래한 전장시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한산도 진영 수루(戍樓)에 남아있다. 원래 수루는 적의 동태를 살피는 망루로서 역할을 했다. 이 망루에 오르면 통영 앞바다가 푸르른 속내를 보인다. 한산대첩 현장을 가리키는 거북 등대가 있고 그 왼쪽 능선에는 한산대첩비가 우뚝 솟아있다. 한산도 진영은 장군이 1593년 7월 15일 진을 친 후 1597년 2월 26일 한성 의금부로 잡혀갈 때까지 3년 7개월을 머문 곳으로 장군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 장군은 임진년 1592년 7월 8일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왜수군 전대 59척을 분멸하거나 나포한 뒤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여수에서 이곳 한산도로 진영을 옮겼다. 한산도는 거제와 고성 사이 견내량 앞 바다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학익진(鶴翼陣) 전법을 펼쳐 왜군을 격퇴한 한산도 대첩(大捷)은 진주성대첩, 행주성대첩과 함께 임진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한산도 야음(閑山島 夜吟)

 

수국추광모(水國秋光暮) 남쪽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경한안진고(驚寒雁陣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우심전전야(憂心轉輾夜) 근심 가득한 마음에 잠 못이루는 밤

잔월조궁도(殘月照弓刀) (새벽) 잔월이 (무심히) 궁도를 비추네

 

을미년 1595년 8월 15일, 추석 즈음이다. 난중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이 날 밤 희미한 달빛이 수루에 비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시를 읊었다.”

호국충정에 잠 못 이루는 밤, 우국(憂國)의 오언절구 ‘한산도 야음’ 역시 달빛 아래 탄생했다. 그런데 그 달빛은 새벽 달로, 흐미한 잔월이 되고 말았다. 그때까지 잠을 못이루고 끙끙대던 장군의 고심과 회한이 절절이 묻어나온다. 이 시조는 한산도 제승당의 주련(柱聯)에 새겨져 있다.

 

진중음(陣中吟)

 

천보서문원 군저북지위(天步西門遠 君儲北地危)

임금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은 북쪽에 위태로운데

고신우국일 장사수훈시(孤臣憂國日 壯士樹勳時)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바다에 서약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다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수이여진멸 수사불위사(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

이 원수들을 모조리 무찌른다면 이 한 몸 죽을지라도 마다하지 않으리

 

장군은 1592년 6월 2일, 1차 출전중 적진포해전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전라 도사 최철견으로부터 선조가 의주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하고 본영(여수)으로 돌아오면서 통분한 마음을 토해냈다. 군신유의(君臣有義), 군위신강(君爲臣綱)으로 임금을 대하는 일편단심(一片丹心) 자세가 충직하다. 이 오언율시는 전 8구, 4연으로 구성된 정형시다. 우국충정을 담은 진중음으로 특히 3연 5,6구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유명한 시구다.

송시열은 이 시와 관련, “송나라 장수 악비(岳飛)가 장준에게 보낸 시처럼 충정과 용맹을 담고 있다.”고 칭송했다. 악비의 시구는 호령풍정신(號令風霆迅), 천성동북추(天聲動北陬)로 “빠른 바람 우레 같은 호령, 하늘의 소리가 북방을 진동하네.”다.

 

무제(無題)

 

소소풍우야(蕭蕭風雨夜)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경경불매시(耿耿不寐時)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회통여최담(懷痛如嶊膽) 간담이 찢어질 듯 아픈 이 가슴

상심사할기(傷心似割肌) 살이 에이듯 쓰라린 이 마음

산하유대참(山河猶帶慘) 강산은 참혹한 모습 그대로이고

어조역음비(魚鳥亦吟悲) 물고기와 새들도 슬피 우네

국유창황세(國有蒼黃勢)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인무임전위(人無任轉危)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회복사제갈(恢復思諸葛)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장구모자의(長驅慕子儀) 말 달리던 곽자의 그립구나

경년방비책(經年防備策) 원수 막으려 여러 해 했던 일들이

금작성군기(今作聖君欺) 이제 와 돌아보니 임금만 속였네

 

곽자의(郭子儀 697~781)는 (唐)나라 때 명장이다. 안사의 난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냈다. 시호는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충무(忠武)다. 이 오언율시를 지은 때는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594년 9월 3일이다. 1594년 3월 6일 조선함대가 제2차 당항포 해전을 마치고 흉도에 이르렀을 때 명나라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이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이순신 앞으로 보내왔다. 이순신은 담종인에게 당당하게 항의 편지를 썼다.

 

 

제승당 전경. Ⓒ김동철

 

증별선수사거이(贈別宣水使居怡)

 

북거동근고(北去同勤苦) 북쪽에서도 같이 고생하며 힘써 일했고

남래공사생(南來共死生) 남쪽에서도 생사를 함께 했었네

일배금야월(一杯今夜月) 한잔 술, 오늘 이 달빛 아래 나누면

명일별리정(明日別離情) 내일은 이별의 정만 남으리

 

1595년 9월 14일자 난중일기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충청수사 선거이(宣居怡)의 이별주를 나누고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황해병사로 전출되는 선거이(宣居怡)와 이별할 때 짧은 시 한 수를 지어주었다.” 선거이는 1587년 장군이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을 때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했다는 북병사 이일(李鎰)의 무고로 첫 번째 백의종군할 때 이일의 군관으로서 이순신을 옹호해주었다. 의리와 우정을 표시하고 있다.

 

무제(無題)

 

북래소식묘무인(北來消息杳無因) 북쪽 소식 아득히 들을 길 없어

백발고신한불신(白髮孤臣恨不辰) 외로운 신하 시절을 한탄하네

수리유도최경적(袖裡有韜摧勁敵) 소매 속엔 적 꺾을 병법 있건만

흉중무책제생민(胸中無策濟生民) 가슴속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건곤암참상응갑(乾坤黯黲霜凝甲) 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엉기고

관해성전혈읍진(關海腥膻血浥塵) 산하에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대득화양귀마후(待得華陽歸馬後) 말 풀어 목장으로 돌려보낸 뒤

폭건환작침계인(幅巾還作枕溪人) 두건 쓴 처사 되어 살아가리라   

 

삼천리 강토가 왜군과 명군에 짓밟혀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무인지경(無人之境)이 되었지만 훗날 고향에 돌아가 ‘두건 쓴 처사로 계곡에 누워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마음 간절하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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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