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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난 노인(老人)들의 반란

category 칼럼/인생2막 시론(時論) 2016. 7. 12. 18:23


노인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 − 아프리카 기니아 속담

 

‘노인은 목소리가 커서 시끄럽다’ ‘몸에서 냄새가 난다’ ‘행동이 굼떠서 짜증난다’ ‘뭘 가르쳐줘도 잘 모른다’ ‘고집이 세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욕심이 많고 인색하다’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노인을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偏見)이 자칫 고정관념으로 굳어질까 걱정이다. 물론 ‘가진 자는 더욱더 가지려고 하고 없는 자의 것마저 빼앗으려 한다’는 마테효과(Mattew’s effect)에서 자유롭지 못한 꼴불견 노욕자(老慾者)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이 이런 부정적 이미지에 휩싸이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첨단기기의 활용에서 젊은이들에게 뒤처지기 때문일 것이다. 문명의 이기(利器)인 PC나 스마트폰 등은 오히려 노인들을 ‘고루한 뒷방 늙은이’로 더욱 거세게 몰아간다. 그러나 현역 시절부터 사무기기를 잘 다루었던 노인 가운데는 PC 문서작업은 물론이고 보고 자료인 PPT, 전문적인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까지도 척척 잘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 가운데는 거의 모든 일을 비서에게 시켰기 때문에 팩스와 이메일을 제대로 못 보내 쩔쩔매는 경우를 보았다. 운전기사 딸린 관용차를 줄곧 타온 장관 출신 정치인 A 씨(68세)는 퇴직 후 은행 ATM기 이용에 혼란을 겪었고 지하철, 버스 승차가격을 몰라 한동안 헤맸다고 털어놓았다.

 

노인들이 알아야 할 ‘마눌님’의 사인

과거에 어떤 일을 했건 간에 퇴직 후 집에서 ‘마눌님’한테 삼시 세끼 얻어먹는 ‘삼식(三食)이’가 되다 보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보장받기가 쉽지 않다. 오랜만에 소파에 앉아서 못 챙겨 본 다큐멘터리나 스포츠, 병영프로그램을 볼라치면 채널선택권을 빼앗긴 마눌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청소기를 꺼내 윙윙거리며 남편의 발을 툭툭 친다. 결국 부부싸움에 이르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시에 집에서 탈출하라!’ ‘가장 큰 실수는?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 저녁을 차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스웨덴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중 한 장면.

요즘 시니어들은 집 밖으로 내몰린다. 사진은 스웨덴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중 한 장면. ⓒ김동철

 

어느 날 마눌님으로부터 “사지가 멀쩡한데 허구한 날 술이나 마시고, 낼부터 돈 벌어와요!”라는 엄명이 떨어지면 이것은 양단간에 결론을 내자는 사인이다. 마눌님의 이런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자녀들과 불화를 겪고 짐을 싸서 가출한 사람도 몇몇 봤다.

젊을 때 가정을 지켰고 빚내서 자식들 결혼시킨 뒤 힘 빠진 이들에게 ‘황혼이혼장’이라도 날아든다면 인생 2막은 그야말로 ‘꿈의 무덤’이 될 공산이 크다.

한 조사에 따르면 노인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문제로는 생활비 문제가 26.5%로 가장 많았고 외로움 문제(23.5%), 가족 간 불화와 부양 문제(22.6%), 건강문제(13.6%), 재취업 문제(10.4%) 순으로 나타났다.

 

노인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문제.

노인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문제는 ‘생활비’와 ‘외로움’이다. ⓒ김동철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몇 군데 만들어놓아야 한다. 박사 위에 ‘밥사’와 ‘술사’가 있다고 한다. 현역시절 선후배나 친구,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잘 사준 사람은 일단 인생 2막에서 외로움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인간미’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거리로 내몰린 퇴직자들

수도권에 거주하는 B 씨(70세)는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 부근 파고다공원이나 종묘공원에 자주 나가는 편이다. 또래 노인들이 모여 일단 문화가 맞아 편한데다 가끔 콜라텍에서 ‘박카스 아줌마’와 미팅하는 재미도 쏠쏠하기 때문이다. 또 등산을 좋아하는 C 씨(67세)는 1호선을 타고 북쪽 끝까지 가서 소요산을 등반하든가, 남쪽 끝 온양온천에 가서 며느리한테 받은 용돈으로 온천욕도 하고 병천순대에 소주를 걸치고 돌아오면 하루가 다 간다고 했다. 더러 도서관을 찾아 허기진 지적 욕망을 해소하거나 노인복지관에 가서 스포츠 댄스나 노래연습 또는 악기를 다루면서 활력을 찾는 이들도 있다.

겉모습은 으리으리한 첨단 빌딩이 뽐내고 있지만 뒷골목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빈부(貧富)의 양극화(兩極化)가 너무나 큰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오늘도 퇴직자들은 거리로 내몰린다. 어디로 갈 것인가?

모더니스트 시인 김광균(1914~1995년)은 물질 문명 속에서 헤매는 현대인의 고독과 방황, 불안을 일찍이 간파했다. 1939년 6월 3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시이다.

와사등(瓦斯登)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긴―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여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구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여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먼 훗날 언젠가 ‘풍요 속 빈곤’이 오리라는 것을 미리 간파한 시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집안에 노인이 없으면 빌려라

노인은 거추장스럽고 피곤해서 피해야 할 기피대상인가?

아니다. 노인들은 나이 숫자만큼의 통찰력을 가졌다. 그 혜안(慧眼)은 하늘을 꿰뚫어보는 투시력을 가졌고 천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천리안(千里眼)으로 기능한다.

<한비자(韓非子)> ‘설림편(說林篇)’에 나오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교훈이다.

춘추시대, 오패(五霸)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 B.C. 685~643)이 어느 해 봄 명재상 관중(管仲)과 대부 습붕(隰朋)을 데리고 하북성(河北省) 내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러 나섰다.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돌아오려다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했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며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이 나타났다.

 

또 한 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모두가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이 말했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一寸)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속 일곱 자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았고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박 정승은 노모(老母)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눈물로 하직(下直)의 절을 올리자 노모가 “얘야! 네가 돌아갈 길을 잃을까봐 나뭇가지를 꺾어 표시를 해두었다”고 말했다. 박 정승은 아들을 걱정하는 노모를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국법을 어기고 몰래 모셔와 봉양을 했다. 그 후 당나라 사신이 왔는데 똑같이 생긴 말 두 필을 끌고 와 어느 쪽이 어미이고 어느 쪽이 새끼인지를 알아맞혀 보라고 했다. 만약 못 맞히면 조공(朝貢)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 박 정승에게 노모가 해답을 말해 주었다.

 

“말을 굶긴 다음 여물을 주렴. 먼저 먹는 놈이 새끼란다.”

노모의 현명함에 왕이 감동했고 그 이후 고려장(高麗葬)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야담이다.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려라!’ 그리스 속담이다. 삶의 우여곡절, 시행착오, 실패에서 배운 소중한 경험 등 노인의 지혜는 일단 존중해주어도 무방할 것 같다. 화사한 봄꽃도 아름답지만, 온갖 풍상 다 겪은 가을 단풍도 나름 운치가 있지 않을까.

 

종이비행기 날리는 노인

온갖 풍상 다 겪은 가을 단풍도 나름 운치가 있지 않을까. 노인의 능력을 무시하지 말자. ⓒlogoboom/Shutterstock

 

퇴직한 60대들은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등 사회보험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은퇴 후 벌이가 없는 데도 건강보험료가 직장 다닐 때보다 더 많이 부과되고 있는 게 첫 번째다. 이런 불합리함을 고치라고 정부(보건복지부, 건강보험공단)가 있고 여의도 국회가 있는 것이다. 선거 때만 굽신거리며 ‘한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 뿔난 노인들을 뒷방 늙은이로 취급했다가 앞으로 어떤 사단이 날지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