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이순신 vs 가토 기요마사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 입력 : 2015.10.13 04:00
    [김시덕의 임진왜란 열전] 이순신 vs 가토 기요마사
    임진왜란 당시 조선, 명, 일본 세 나라의 대표선수는 누구였을까. 전쟁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달리 적절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아 스포츠의 개념을 가져온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우선 명나라의 대표선수를 꼽는 것은 쉽지 않다. 초기에는 이여송이라는 장군이 있었지만, 그는 전쟁 이듬해 명나라로 철군해버렸다. 그 뒤로도 명나라에서는 여러 장군이 빈번히 교체되었기 때문에 7년 내내 전쟁을 수행한 유력 인사를 특정하기는 곤란하다. 이번 '임진왜란 열전' 연재에서 애초에 세 나라의 인물을 비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도 여기 있다.

    명나라에 비해 조선과 일본의 대표선수는 분명하다. 이순신(李舜臣)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이 두 사람은 실제로 7년 내내 한반도에서 중요한 전투를 이끌었고, 전쟁 이후에는 각 국에서 임진왜란을 상징하는 신으로 추앙되었다. 조선과 일본 양국에는 7년 전쟁 내내 전투를 이끈 장군들이 많았지만, 특정 정파·지역·가문을 넘어 이들만큼 각 국 국민들이 공인하는 대표선수는 없다.

    이순신과 가토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직접 충돌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한반도의 남해안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주로 한반도의 동부 지역에서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에 관한 양국의 문헌을 살펴보면, 이순신과 가토는 상대방에 대해 막연한 이미지 정도는 품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인물상을 떠올릴 정도로 상대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순신과 고니시 유키나가, 사명당 유정(泗溟堂 惟政)과 가토 기요마사가 상대방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을 정도에 비하면 그렇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한 상황을 검토하면, 두 사람이 두 가지 접점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는 함경도라는 지역이고, 또 한 가지는 1597년 1월이라는 시점이다. 이순신과 가토는 모두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일파인 야인여진(野人女眞)과 충돌한 바 있으며, 1597년에 이순신이 파직된 이유는 한반도로 다시 건너오는 가토를 중간에 차단하라는 정부의 명령에 불복했기 때문이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접점에 관해서는 김응서와 고니시 유키나가 편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일본군이 합심하여 조선 수군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계략을 편 것인지, 아니면 가토에 대해 경쟁심과 적대감을 품고 있던 고니시가 정말로 유용한 정보를 조선측에 전달한 것인지에 대해 100%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 필자의 판단이다.

    이번 회에는 이순신과 가토의 첫 번째 접점인 함경도, 그리고 야인여진과의 전투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 수군 제독으로서의 업적에 대하여는 지난 400년간 기록되고 연구되고 칭송되어 왔으므로, 굳이 필자가 다시 이 문제를 다룰 필요가 없을 터다. 이 점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선생의 '이순신 평전'과 '임진왜란 해전사' 그리고 일찌기 이은상 선생이 번역한 '이충무공 전서'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훌륭한 연구서와 1차 문헌을 통해 '영웅'의 행적을 살피는 것은 유의미한 경험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이순신이 보여준 행적은 전쟁이라는 비상(非常) 시국에만 통용될 수 있는 것이며, 이를 오늘날과 같은 평시에 '이순신의 리더십'이라는 식으로 재해석하여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
    함경도의 이순신

    임진왜란 이전 이순신의 경력을 살펴보면 주로 함경도에서 활동하였음이 확인된다. 39세 되던 1583년 겨울, 지금의 함경북도 경원군에 있던 건원보(乾原堡)의 권관(權管)으로 함경도에서 이순신의 활동이 시작된다. 권관은 방어체계의 최하위 단위인 진보(鎭堡)를 지키는 종9품 무관직이다. 여기서 이순신은 여진족 수령 가운데 하나였던 울지내(鬱只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운다. 이 해에는 함경도 회령에 거주하던 여진족 수령 니탕개(尼湯介)도 봉기를 일으켰다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이 이끄는 조선군에 진압당하는 등 두만강 남북의 조선-야인여진 접경 지역에서는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지역이 녹둔도로 추정되는 곳이다. 지도 왼쪽의 붉은 사각형은 세종 때 정복 전쟁으로 확립된 육진(六鎭)이며, 가장 왼쪽의 사각형이 여진어로 오모호이(Omohoi)라고 불리는 회령(會寧)이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지역이 녹둔도로 추정되는 곳이다. 지도 왼쪽의 붉은 사각형은 세종 때 정복 전쟁으로 확립된 육진(六鎭)이며, 가장 왼쪽의 사각형이 여진어로 오모호이(Omohoi)라고 불리는 회령(會寧)이다.
    1583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순신은 3년상을 치르고 42세 되던 1585년에 지금의 함경북도 경흥에 있던 조산보 만호(萬戶)로 특진해 다시 변방으로 나갔다. 어릴 적부터 이순신과 같이 한성부 건천동에 살던 류성룡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이로써 긴밀해진 두 사람의 정치적 연대는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고 류성룡이 삭탈관직될 때까지 이어진다.

    종4품에 해당하는 만호직을 맡던 이순신은,1587년에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하게 된다. 녹둔도는 두만강이 동해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던 섬으로(현재는 러시아측 영토에 이어져서 더 이상 섬이지 않게 된 상태) 지금도 조선 사람들의 거주 흔적이 발견된다는 보고가 있다. 현재는 남한과 러시아 사이에 큰 영토 분쟁이 없지만, 만약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녹둔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

    1587년 9월, 여진족이 녹둔도를 공격했다. 녹둔도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민을 습격한 것이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여진족 추장 마니응개(亇尼應介)가 조선측을 공격해서 10명을 죽이고 160명을 생포했으며, 이순신과 이경록이 이들을 추격하여 3명을 죽이고 조선인 포로 가운데 50명을 되찾아왔다고 한다. 조선측이 패했다고 할 수 있는 이같은 결과에 대해 함경북병사 이일은 조정에 패전으로 보고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자신이 이전부터 여러 차례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요청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또 이번 전투에서도 적을 추격해서 포로 가운데 일부를 되찾아왔으니 패전이라 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이러한 항의가 받아들여져 큰 처벌을 받는 대신 백의종군을 하게 된 이순신은 1588년 1월 이일이 여진족 거주지를 공격할 때 참전하여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한다.

    이 때의 공으로 백의종군을 끝낸 이순신은 충청도 아산으로 낙향하였고, 45세 되던 1589년에 정읍 현감(종6품)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47세 되던 1591년 정3품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승진은 이 시점이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절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민웅 선생은 통설과 마찬가지로 류성룡의 전폭적 지지와 정치적 판단이 이러한 승진의 배경에 있다고 분석한다 ('이순신 평전' 66-68쪽).

    조선의 프론티어 ‘함경도’

    여기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 이전까지 이순신은 주로 함경도에서 활동하면서 여진족을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순신 뿐 아니라, 임진왜란 초기에 패전한 장수로만 기억되는 이일과 신립 역시 1583년의 니탕개 봉기를 진압하는 등 함경도 지역에서 훈공을 세웠다.

    그런데, 이들은 왜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싸우게 되었는가. 한민족과 말갈족의 연합정권인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만주와 평안도·함경도 지역에는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한족의 명나라 등이 차례로 세력을 뻗쳤다. 그리고, 아마도 말갈족의 일부였을 여진족이 기층 민족으로서 이들 지역에서 살아왔다. 발해가 멸망한 것이 926년이고, 조선이 4군6진을 세워 압록강과 두만강에 걸친 국경을 확립한 것이 세종 때인 1400년대 전기이니, 고구려·발해 시기를 제외하더라도 거의 5백년간 이 지역은 전적으로 여진족의 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1100년대 초기에 윤관이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을 공격하여 9성을 쌓은 적이 있지만, 이 지역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고려 조정이 9성을 여진족 측에 돌려준 바 있다.

    이에 비해 조선 정부는 이 땅을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일족이 대대로 함경도 지역에서 활동한 바 있다 보니, 조선 정부로서는 왕족의 발상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부터 시작하여 4군6진을 확립한 세종 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정부는 함경도를 정복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여진족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 즉 이지란과 같이 조선측에 협력한 여진족도 있었지만, 조선의 지배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 여진 세력도 많았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이 지역의 원주민이고, 조선은 남쪽에서 다가오는 침략 세력이었다.

    조선의 지배를 거부한 여진 세력은 원나라가 지배하던 모든 영역을 흡수하려 한 명나라를 지렛대 삼아 명과 조선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전개했다. 훗날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국을 세우는 아이신 기오로 누르하치의 6대조 먼터무(Mentemu)는, 오늘날의 회령에 해당하는 두만강가 오모호이(Omohoi)와 오늘날의 랴오닝 성 푸순시 신빈 만족 자치현에 있던 압록강가 허투알라(Hetu ala)를 오고가며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서 살아남고자 애썼다. 이러한 여진족 추장들의 행태를 북방 지역 특히 함경도에 대한 완전한 영유를 꾀하던 조선측으로서는 내버려둘 수 없었다. 한 때 명나라에 맞서 요동반도 공격을 계획하는 등 당시 조선은 후대와는 달리 한족 세력에 대한 공세적 태도를 버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명나라에 입공한 파아손(把兒遜)을 공격하여 1405년 살해하고, 1433년에는 먼터무를 공격했다. 먼터무가 경쟁 세력에게 살해된 뒤 그가 이끌던 부족은 압록강 북쪽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 세력에 합류했다. 그러자 조선은 1467년 건주위의 여진족을 공격해서 이만주를 살해함으로써, 압록강 남안의 조선 영토에 대한 여진족의 위협을 선제적으로 차단하였다. 1467년 조선과 함께 여진 공격에 참전한 명나라 장군이 “장정을 모두 죽이고, 노인과 아이를 모두 사로잡았다” ('여진부락에서 만주국가로' 83쪽)라고 자랑한 데에서, 이 때의 공격이 어떠한 참상을 만들어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 4군6진 '개척'이라고 부르는 15세기 전기의 대(對) 여진 전쟁은 여진족에게는 명나라와 조선이라는 양대 강국 사이에 끼어 영토와 자주권을 상실해가는 과정이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고 왕실의 조상들이 활동한 땅이었다고는 해도 대부분의 조선인에게 함경도는 낯선 곳이었고, 여진족의 저항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거셌다. 그리하여 세종 치세에 일부 신하는 함경도의 일부 지역을 포기하자고 건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건의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내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조종(祖宗)의 강토는 줄일 수 없다. 지난번에 야인들이 우리 땅을 침범 점거한 것이 이미 많았는데, 지금 또 물러 옮긴다면 이는 버리고 지키지 않는 것이다. 성보(城堡)를 널리 쌓고 민호(民戶)를 많이 모아서 지켜 막으면 될 것이다“ ('세종실록' 1427년 8월 10일).

    그리하여 세종은 건국 초기부터 시행하던 사민정책(徙民政策), 즉 남쪽의 주민을 함경도와 평안도라는 프론티어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확대한다. 이 지역 정착에 실패하고 남쪽으로 도망간 사람들을 엄히 처벌하는 등, 조선 정부는 이 지역을 영토로 편입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정부의 이러한 의지로 인해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국가와 외국과의 경계가 확립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애민정신'이라는 개념으로만 설명될 것은 아니다.

    ‘회령’이라는 접점

    조선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영토에 편입된 함경도 지역은, 일찌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 조선인, 사민정책을 통해 한반도 남쪽에서 이주한 조선인 등이 뒤섞여 불안정한 상태였다. 게다가 각종 정치적 혼란 때마다 발생하는 유배인들까지 이 지역에 보내져 불안정성이 커졌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러한 상황이었던 함경도에 진입했다.

    일찌기 누르하치의 조상 먼터무가 살았던 회령으로 피신한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가토에게 넘긴 것은 전라도 전주에서 유배온 국경인(鞠景仁)이라는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행적을 전하는 중요한 문헌인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오랑캐와의 경계인 회령이라는 성에 도착했다. 제왕은 이 곳에 있었다. 기요마사는 회령에서 4리 떨어진 경성, 조선인들은 덕원이라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이 회령이라는 곳은 일본으로 말하자면 하치조지마(八丈が嶋)·이오가시마(いわうが嶋)와 같은 유배지로 조선국 안에 있다. 3리 사방의 들판 가운데 산이 있는데, 석벽으로 성을 쌓아 도성에서 보낸 유배인들을 둔다. 주변 들판을 개간하여 조·피를 길러 산다. 그런데 그 성에 대대로 살아온 유력한 유배인들이 한 패가 되어 ”제왕은 우리에게는 누대의 적이므로 이 때를 틈타 생포하여 일본인에게 넘겨서 평소의 원한을 풀고 영화를 누리자“라고 하여 모두 생포하였다.”

    오랑캐의 도성 엔탄을 공격하는 가토 기요마사. 1801년 간행된 “에혼 다이코기” 6편 권5. 김시덕 소장.
    오랑캐의 도성 엔탄을 공격하는 가토 기요마사. 1801년 간행된 “에혼 다이코기” 6편 권5. 김시덕 소장.
    또한, 두 왕자가 도주한 경로를 팻말에 적어둔 사람도 있었음이 조선과 일본측 기록에 보이는 등 함경도에서는 조선 정부에 대한 반민(叛民) 활동이 활발했다. “어떤 사람이 숙천부(肅川府)의 기둥에, 어가는 강계가 아니라 의주로 향하였다고 적었다. 왜적이 그 땅으로 향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주상이 계신 곳을 알게 하려 한 것이리라. 어떤 사람이 이 글을 적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난민의 짓일 것이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28일).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회령에서 조선의 두 왕자를 생포한 가토 기요마사는 두만강을 넘어 야인여진과 충돌한다. 일본측 문헌에서는 이들 야인여진을 '오랑카이'라고 부른다. 당시 조선에서 북방 이민족을 가리키던 '오랑캐'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다. 원래 오랑캐는 헤이룽장성 지역에 거주하던 몽골계 부족 우량하이(兀良哈)에서 온 말이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몽골과 여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오랑캐라고 불렀다.

    조선과 '오랑캐' 여진족 세력의 접점인 회령에 도착한 가토가 두만강을 넘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경쟁상대였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서 진격을 멈추었기 때문에 자신이 만주를 통과해 명나라로 진격하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함경도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함경도 여진족의 배후에 존재하는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을 위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회령에서 가토가 통역관을 통해 조선인과 주고받았다고 하는 대화가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에 전해진다.

    “오랑캐라는 곳은 무사가 많고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오랑캐인들과 싸워서 일본인 무사의 용맹함을 그들에게 보여줘야겠다. 여기서 얼마나 들어가면 되고, 그 수는 얼마나 되는가.”
    “여기서 4리 반 정도 가면 마을이 나옵니다. 거기서 1리 정도 가면 성 13개가 있습니다. 거기서 다시 하루를 가면 오랑캐의 도성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회령인들을 앞세워 그 곳을 공격하여 일본인의 실력을 보여주어야겠다.”

    그리하여 1592년 7월, 가토는 두만강을 건넌다. 여진족과 일본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 충돌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토는 몰랐겠지만, 10년 전 이순신도 이 지역에서 몇 년에 걸쳐 여진족과 싸웠다. 서로 맞부딪힌 적이 없는 이순신과 가토는, 이처럼 여진 세력과 충돌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여진족에 대해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한다. 이순신은 녹둔도를 기습한 여진족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죄로 백의종군했고, 가토 역시 오랑캐 즉 야인여진과의 전투에 패하여 함경도로 퇴각한다. 일본측 문헌에서는 가토가 오랑캐의 도성인 엔탄을 포함하여 13개 지역을 함락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가토가 야인여진 세력에 패하였음을 감추기 위한 근거 박약한 주장일 뿐이다.

    이후 가토는 함경도에서 조선인들로부터 세금을 걷고 겨울을 나는 등, 다른 지역을 점령한 일본 장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배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 일본군 지배영역과 야인여진 세력 사이의 공백 지대인 함경도 북부에서는 윤탁연·정문부 등의 조선군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고, 이들은 1593년 초 가토 세력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이처럼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는 조선·여진·일본의 3개 세력이 복잡하게 얽히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특정 국가나 세력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경계지역으로서 두만강 연안 지역 일대의 특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모습이 구한말에도 반복되어, 오늘날에도 한국·러시아·중국 삼국의 국경선은 이 지역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