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리더십] 매사 원리원칙을 강조한 청렴 장군
공무원 사회에는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 영수증을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깜깜이 예산’이 있다. 이른바 특수활동비로 지난해 18개 부처에서 8869억을 썼는데 국정원(4860억원), 국방부(1783억원), 경찰청(1297억원), 법무부(285억원), 국회(80억원) 등이 사용했다. 이 깜깜이 예산은 기밀유지가 필요한 수사와 이에 준하는 국정활동에 소요되는 경비이다. 그런데 이번에 법무부와 검찰 간부들 간에 ‘돈봉투 회식’ 사건이 불거지면서 수면위로 드러났다. 게다가 신임 대통령이 사적인 회식, 강아지 사료, 치약, 칫솔 구매 등을 개인 월급에서 쓰겠다고 하자 이들 기관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동안 깜깜이 예산은 아무도 터치하지 못했으므로 허투루 쓰여졌더라도 알 수가 없었다. 국가안보와 사회 공공안녕질서를 담당하는 기관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회, 대법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미래창조과학부 등에서 무슨 깜깜이 예산이 필요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이 하루 벌이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금은 그야말로 피 같은 돈이다.
1598년 10월 순천 예교성(曳橋城)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협공하기 위해서 명나라 유정(劉綎) 제독과 바다의 진린(陳璘) 제독은 수륙연합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유정은 어쩐 일인지 약속을 어기고 작전실행을 미적거렸다. 고니시가 유정에게 뇌물로 금은보화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진린에게도 재화를 보내 탈출구를 열어달라고 애걸했다. 고니시는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자 철군하기 위해서 애가 타들어가는 상황이었다. 진린은 “퇴각하는 적장의 퇴로를 열어주면 어떻겠소.”라며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편범불반(片帆不返), 즉 “단 한척의 왜수군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면서 진린에게 강력히 반발했다. 그러자 고니시는 이순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조총과 칼 등 뇌물을 보냈다. 그러나 이순신이 “나는 임진년 이후 적을 수없이 죽이고 노획한 총과 칼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 무엇 하겠느냐.”고 하자 고니시가 보낸 사자(使者)는 머쓱해져서 돌아갔다. 진린은 “이미 적의 뇌물을 받았으니 (고니시를 놔주고) 남해의 적이나 토벌하러 가자.”며 다시 이순신을 설득했다.
이에 이순신은 “남해의 적은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이므로 눈앞의 적을 놔두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다.”면서 “명나라 황제께서 장수를 명하여 보낸 것은 우리 소국의 인명을 구해주기 위한 것인데 어찌 남해의 우리 백성을 베어죽이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황상(皇上)의 본의가 아닐 것이다.”며 논리정연하게 진린에게 답했다. 진린은 이순신의 명쾌함에 그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지 조명연합수군함대를 결성한 뒤 11월 19일 노량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왜수군의 조총을 맞아 최후를 맞이한 바로 그 해전이다. 큰 별이 바다로 떨어진 대성운해(大星隕海)의 현장은 남해 관음포 이락사(李落祠) 앞바다이다.
일찍이 율곡 이이(李珥)가 선조에게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 가운데 기국비국(基國非國) 부부일심지대하(桴腐日深之大厦)라는 말이 나온다. 곧 “이건 나라가 아닙니다. 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큰 집의 대들보와 같습니다.” 만언봉사는 1574년 선조7년 왕명의 출납을 맡는 우부승지였던 율곡이 선조에게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문이다. 이 글에서 율곡은 조선 조정과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때 이루어진 나쁜 습성과 규칙을 개혁해야 한다’면서 당대 정치가 실질적인 공(功)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상하(上下)의 신뢰, 관리들의 책임 소재와 책임감, 경연(經筵)의 운영, 인재 등용, 재해 대책, 백성의 복리 증진, 인심의 교화에 있어 실(實)이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창업이후 200년 간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쌓였던 적폐(積弊)는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숭무(崇武) 정신이 실종된 가운데 얼마 안 있어 미증유(未曾有)의 난리가 일어났으니 1592년 임진왜란이다.
매사 원리원칙을 강조했던 장군의 일생은 파란만장(波瀾萬丈),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연속이었다. ‘관행’이란 명목으로 부패를 저지르는 수많은 관료들로부터 시기와 모함을 받았다. 1579년 훈련원 봉사(종8품) 때 병조정랑(정5품)인 서익(徐益)이 자기와 친한 사람을 차례를 뛰어넘어 참군(參軍 정7품)으로 올리려 하자 이순신은 담당관으로서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정랑은 병조의 인사권 쥐고 있는 실력자였지만 이순신은 부당한 지시를 받지 않았다. 1582년 1월 장군이 발포만호(종4품)로 근무하고 있을 때 서익이 군기경차관(국방부 군기검열단장)으로 발포 진영(고흥)을 찾아 ‘군기보수불량’이란 무고(誣告)로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3년 전 이순신에게 인사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분풀이를 한 셈이다. 이 해 전라좌수사 성박(成鑮)이 발포 객사 뜰의 오동나무를 베다가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이것은 관가의 물건”이라며 직속상관의 부탁을 거절했다. 이 ‘괘씸죄’는 근무평점을 매기는 후임 수사에게 인계됐고 나중에 또 화를 당했다. 1579년 훈련원 봉사로 있을 때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기의 서녀(庶女)를 첩으로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 갓 벼슬길에 올랐는데 어찌 권세가의 집을 드나들 수 있느냐.”며 거절했다. 1582년 발포만호에서 파직되고 다시 훈련원에서 근무하게 됐다. 정승 유전(柳琠)은 이순신에게 좋은 화살통(箭筒)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자칫 뇌물이 될 수 있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어릴 적 한성 건천동(마른내 골)에서 함께 자랐던 류성룡 대감이 이순신에게 다음과 같이 귀띔했다. “이조판서 율곡 이이(李珥)가 같은 성씨(덕수 이씨)인 자네를 한번 만나보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이마저도 거절했다. “같은 성씨(덕수 이씨)여서 만날 수는 있지만 공직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판서를 만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22년 동안 무인으로서 장군의 삶은 이렇듯 원리원칙을 지켰다. 그렇다고 그가 벽창호(碧昌牛)처럼 고집이 세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깜깜이’라는 뜻은 아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온갖 미혹에서 자신을 이기고, 길이 아니면 가지 않고 말이 아니면 듣지 않는, 인간본연에 다가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옳은 일에 자기 한 몸을 선뜻 바쳐 죽을 수 있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시 중에도 지방 관리들의 뇌물수수 등 부패는 끝이 없었다. 1594년 2월 16일 난중일기다.
수령즉엄악포계(守令則俺惡褒啓) 수령들은 뇌물 받고 비리 덮어주고 포상 받게 해주었다
기망천청지어차극(欺罔天廳至於此極) 국왕의 귀를 기망하니 이것이 극에 달했다
국사여시만무평정지리(國事如是萬無平定之理) 국사가 이러니 나라가 결코 편안할 수 없다
앙옥이이(仰屋而已) 나는 그냥 천장만 바라볼 뿐이다.
오호 애재(哀哉)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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