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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탐구] 사즉생의 삶,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①

 

6월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1일은 의병의 날이다.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모집,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맞아 적을 교란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조선 땅에 상륙한 왜군의 총 병력 약 20만여 명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 1만8천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진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군민과 더불어 항전하다 전사했다. 그 후 4월 18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번대가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제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개전 초기 4~5월에 걸쳐 제4~9번대에 이르는 후속부대가 속속 상륙하여 조선 땅에 상륙한 왜군의 총 병력은 약 20만여 명에 달했다. 여기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등 왜수군 병력 약 9천명이 포함된다.

 

 

임진왜란 초기 4~5월에 걸쳐 조선 땅에 상륙한 왜군의 총 병력은 약 20만여 명에 달했다. 사진=영화 [명량]

 

태풍 앞의 촛불신세가 된 절체절명의 위기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한성을 향해 북진했다. 상륙한 지 20일 만인 5월 3일에 한성을 무혈점령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고니시는 평안도, 가토는 함경도, 구로다는 황해도로 진격하였다. 6월 14일 고니시의 평양성 함락과 가토의 함경도 점령 등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후 2개월 만에 조선 강토는 거의 유린됐다. 태풍 앞의 촛불신세가 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선조는 6월 22일 북쪽 압록강변 의주로 파천(播遷)했다. 당대 명장(名將)이라던 신립(申砬)과 참모장 김여물(金汝岉) 장군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고니시 군에게 궤멸된 뒤 강물로 뛰어들었다. 이보다 며칠 앞서 이일(李鎰)은 상주 전투에서 대패하고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의병의 함성

조선강토가 시체로 산을 이루고 핏물이 강을 만드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현장이 됐을 때, 어디선가 난데없이 커다란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의병(義兵)이었다. 낫과 도끼, 쇠스랑, 죽창을 든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왜군이 조선을 침략한 후 가장 놀란 것은 첫째, 왕이 한성을 버리고 피난 갔다는 사실과 둘째,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얀 옷을 입은 농부들이 떼를 지어 괴롭힌 것이었다. 왜군의 북상 속도가 빨랐던 만큼, 병참 보급선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요 지점에 겨우 소규모의 왜군을 배치하는 일점일로(一點一路)의 형세를 띠었는데 의병들은 그 기다란 보급선을 쑤시고 찌르고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戰)으로 대응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그린 의병 분전도. ©김동철

 

사즉생의 각오로 뭉친 의병들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아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난 의병들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사즉생(死卽生)의 사생관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 오합지졸(烏合之卒) 같은 까마귀 떼가 참 골칫덩이야!”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의병들 때문에 일본군 수뇌부는 골머리를 앓았다. 개전 초기 이순신(李舜臣)과 의병(義兵)이라는 두 돌발 변수를 만나 고전(苦戰)을 면치 못한다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은 의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각 도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 왜적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경상도에선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등이, 전라도에선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가 일어났다. 충청도에선 승병 영규(靈圭), 조헌(趙憲) 등이 일어섰다. 함경도에선 정문부(鄭文孚)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기습했다.

 

승려와 정문부가 앞장서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천민대우를 받던 승려 영규(靈圭)와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같은 승병 지휘부도 움직여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과거(科擧)시험 등용에서 소외당하고 푸대접 받던 함경도에서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준 국경인(鞠景仁)과 국세필(世弼)을 처단하고 가토 군사와 전투도 벌였다. 정문부 의병 200여명은 가토의 2만 2천명과 붙어 북관대첩(北關大捷)에서 크게 승리했다. 그래서 북관대첩비를 세웠는데 1905년 러일전쟁 때 북진하던 일본군이 함북 길주에서 북관대첩비를 발견, 일본으로 가져가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상징인 도쿄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 방치했다. 우연히 발견된 북관대첩비는 우리 정부와 민간단체의 꾸준한 반환요구로 2006년 북한 땅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 현재 경복궁 뜰에 있는 북관대첩비는 모조품(模造品)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함께 한 이순신 장군. ©김동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지식인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 조식(曺植)은 모두 현실정치를 비판했지만, 성리학(性理學)에 대한 견해는 달랐다. 이황은 주자학(朱子學)을 받아들이고 그 이론에 천착했다. 그러나 조식은 성리학 외에도 노장사상(老莊思想 무위자연을 도덕으로 삼고 허무를 우주의 근본으로 생각함)을 포용하고 그 실천에 주안점을 두었다. 즉 이황이 ‘이론의 대가’였다면 조식은 ‘실천의 달인’이었다. 이와 같은 철학적 차이로 인해서 같은 동인(東人)이라도 퇴계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南人)이 되었고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은 북인(北人)이 되었다. 남명 조식은 “성인의 뜻은 이미 앞서 간 학자들이 다 밝혀 놓았다. 그러니 지금 학자들은 모르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르친 것이다.

 

홍의장군, 곽재우

조식의 제자들은 의병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조식의 제자 가운데 임진왜란 때 괄목할만한 활약을 한 의병장으로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1552~1617)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있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상황에서 붉은 옷의 곽재우(郭再祐)는 4월 22일 경상도 의령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 의령과 함안 사이 남강 나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또 10월 진주성 전투 때 외곽에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로 왜군을 교란시켰다.

 

 

붉은 옷을 입허 '홍의장군'이란 별칭이 붙은 의병장 곽재우 동상. ©김동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에서 58세의 나이에 직접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 정인홍 휘하에는 수천 명의 군사가 몰려들었다. 관군은 이미 몰락했고 여타 군소 의병장들과 다르게 그 위세가 당당했다. 정인홍은 낙동강 수로를 막고 일본군의 병참 보급 물자의 왕래를 차단 또는 교란했다. 정인홍과 곽재우의 활약으로 경상우도는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그리고 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왜군의 남해 및 서해진출을 막았기 때문에 전라도가 온전할 수 있었다.

(2편에 계속)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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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