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 탐구] 사즉생의 삶,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②
임진왜란 때 괄목할만한 활약을 한 의병장으로는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1552~1617)와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있었다.
곽재우는 벽곡찬송, 정인홍은 현실 정치의 삶
곽재우는 관군의 잇단 시비(是非)에 염증을 느꼈고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이 무고하게 죽음을 당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는 벽곡찬송(辟穀餐松)을 하면서 세상을 피했다. 그러나 지조와 의리를 강조한 ‘근본주의자’ 정인홍은 현실 정치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6년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는 뛸 듯이 기뻤다. 그토록 바라던 적자(嫡子)가 생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정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小北派)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大北波)로 나뉘었는데, 정인홍은 선조의 뜻에 거역하면서까지 상소를 올려 광해군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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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말년
광해군이 왕이 된 뒤 정인홍은 이이첨(李爾瞻)과 같이 대북파의 거두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쏠린 그 말년은 비참했다. 정인홍은 1623년 인조반정 직후 89세 고령으로 참형되었고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또한 경상도 거창과 고령에서 활약한 의병장 김면(金沔)은 만석꾼의 부호였지만 모든 식량과 재산을 의병활동에 투입해 나중에 자신의 처자들은 문전걸식(門前乞食)을 했다고 전해진다. 1592년 5월 7일 이순신 수군이 옥포해전에서 승리했다는 장계가 피난 조정에 도착했다. 그날은 선조가 평양성에 도착한 날이었다. 6월 11일 선조는 평양성을 떠나 의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연전연승 장계가 속속 도착하자, 선조와 조정은 기쁨에 환호했다. 그러나 승전 분위기도 잠시, 선조는 처량한 신세였다.
선조와 광해군
전라도를 방어하기 위한 전투는 치열했다. 6월 27일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했다. 7월 7일에는 웅치 전투에서 조선관군과 의병이 전원 전사했다. 이 즈음 세자 광해군의 분조(分朝 임시조정)가 생겨났다. 선조는 여차하면 명나라 요동으로 건너갈 셈이었으니 조선 땅에 남아 전쟁을 치를 광해군의 분조가 필요했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면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지역을 옮겨 다니면서 군대와 백성을 위무(慰撫)하고 의병활동을 격려했다. 강원도 이천에 머물던 7월에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1537~1593)에게 항전(抗戰)을 독려하는 격문(檄文)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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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패륜 정치
전라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은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강화로 들어가 조정과 호남 사이의 연락을 맡았다. 그는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광해군은 또 이조 참의 이정암(李廷馣 1541~1600)에게 황해도 연안읍성을 사수하라는 명을 내렸고 여기서 의병 500여명을 모집,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가 이끄는 왜군 5000명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런 광해군은 임진왜란 동안 분조를 맡아 근왕병 모집 등 의병활동을 도왔고 민심을 살피는 선정(善政)을 펼쳐 인기가 아주 좋았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뒤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을 저질렀다. 유교국가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무너뜨린 강상죄(綱常罪)를 지은 결과, 인조반정을 맞아 강화도에 유배됐다가 제주도에서 숨을 거뒀다.
의병장 김덕령
호남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은 억울하게 죽었다. 20대 혈기 방장한 김덕령은 김천일과 최경회의 의병군이 전멸한 뒤 담양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서인(西人)인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었던 김덕령은 1596년(선조 29) 7월 6일 충청도 홍주(홍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난을 일으키자 진압하러 가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그 일로 반란수괴(反亂首魁)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誣告)로 끝내 죽어야 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柳成龍)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尹根壽)의 형이기도 했던 서인인 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아 결국 장독(杖毒)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향년 30세였다.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곡(春山曲)’이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답답하고 억울 심정을 토해냈다.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김덕령의 죽음으로 의병(義兵)에 나서면 집안이 망한다는 인식이 퍼졌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의 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김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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