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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탐구] 월남전 호랑이, 채명신 장군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이웃과 사회, 국가에 좋은 영향을 남기고 가는 웰다잉

요즘 유행하는 말인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 한번 사는 인생인 마당에 누구나 한번쯤은 호의호식하면서 근사하게 살다 가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웰빙(well being)으로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잘 사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이웃과 사회, 국가에 좋은 영향을 남기고 가는 웰다잉(well dying)도 존재가치를 높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고 싶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대목에서 언뜻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임금(선조)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율곡 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전시재상 류성룡, 애민의 경세가 정약용,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義士) 등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동철

 

국립현충원에서 만난 월남전의 영웅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국립현충원은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6.25 한국전쟁에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산화(散華)한 수많은 군인과 학도병들, 그리고 오로지 나라사랑 충(忠)과 올곧은 의(義)를 지키려다 순국한 애국영령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수많은 호국영령들의 비석을 바라보면서 ‘저들처럼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릴 수 있을까.’하는 물음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잊혀지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채명신 장군(예비역 중장)이었다. 그는 맹호부대장 겸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1965~69년)을 지낸 ‘월남전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그가 장군묘역이 아닌, 사병묘역에 묻혀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이 일기 시작했다.

 

 

전사한 장병묘역을 찾아 눈물 짓는 채명신 장군.

 

사병묘역에 묻힌 장군

2013년 11월 25일 향년 88세로 별세한 장군은 돌아가시기 전에 “나와 함께 싸운 병사들 곁에 나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장군이 장군묘역에 묻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내 앞에서 죽어가던 병사들을 차마 잊을 수 없다”는 유언에 따라 월남전 전우 묘역에 잠들게 됐다. 그는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항일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1947년 월남(越南)해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5기로 입학했다. 1949년 육사를 졸업한 뒤 이듬해 6.25 전쟁 때에는 소위로 참전해 육군 5사단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쳤다. 1965년 8월~1969년 4월까지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과 맹호부대장을 맡아 4년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가했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단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지시하는 등 덕장(德將)으로서 면모를 보였다.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

국군 장성이 사병묘역에 묻힌 것은 채 장군이 처음이다. 그는 국립 현충원 2번 병사묘역에 묻혀있다. 화장한 유골을 모시는 한 평짜리 사병묘지다. 거기 잠들어 있는 1033명 가운데 971명이 베트남전에서 숨진 병사다. 장군 묘지는 8평 크기의 봉분을 쓰는 곳이다.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 “Because you soldiers rest here, our country stands tall with pride.”

 

 

1965년 주월한국군사령관에 임명된 채명신 장군이 베트남 파병길에 오르는 병사를 격려하고 있다. 오른쪽이 채명신 장군의 묘비에 적힌 문구.

 

군인의 본분은 위국헌신이라는 신념

그의 삶의 좌표는 ‘군인의 본분은 위국헌신(爲國獻身)’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뜻을 따랐다. 위국헌신,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던진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고귀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인가. 채 장군은 자신의 전공(戰功)이 부하들의 희생 위에서 이룬 것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를 치켜세우는 자리에서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를 20년 넘게 모셨던 보좌관은 “채 장군이 병사들의 죽음에 괴로워하며 막사에서 남몰래 통곡하곤 했다.”고 기억했다. 채 장군은 부하들 목숨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고 자신의 안위(安危)는 뒤로 미뤘다. 생(生)과 사(死)를 넘어선 사생관(死生觀)은 그가 웬만해선 철모를 쓰지 않으려 했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병사들은 이역만리 전쟁터에서 그런 채 장군을 마음속으로 믿고 따랐을 것이다.

 

 

장군이지만 월남전 전우 사병묘역에 잠든 채명신 장군. ©김동철

 

사생관은 필사즉생과 닮았다

망구(望九)는 아흔을 바라보는 팔십 줄의 맨 처음인 여든 한 살을 말한다. 인간 발달단계로 보면 이 나이는 황혼(黃昏)의 완성기이다. 아침에 떠오른 태양이 뜨거운 대낮 하늘 가운데 정점(頂點)에 섰다가 서산 너머로 지려는 황혼의 순간, 그 붉디붉은 장엄한 빛을 발하는 마지막 엄숙한 때이기도 하다. 채명신 장군이 보여준 사생관(死生觀)은 이순신 장군의 필히 죽고자 하면 영원히 살 것이라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그것과 꼭 닮아있다. 그리고 멋있게 물러서는 겸양지덕(謙讓之德) 또한 황혼의 빛처럼 아름답게 빛난다. ‘제2의 이순신’ 채명신 장군님 부디 편안하게 영면(永眠)하소서.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