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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제정신의 산물, 거북선

category 칼럼/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2017. 7. 11. 12:40

창제정신의 산물, 거북선

  • 임진년 1592529일, 사천해전에서 바다의 탱크거북선이 첫 출전했다. 돌격 임무를 맡은 거북선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종횡무진 전열을 흐트려놓았다. 좌우 뱃전에 각 6, 용머리에 1, 선미에 1개 등 모두 14개의 천자(天字), 지자(地字), 현자(玄字), 황자(黃字) 총통(銃筒)이 불을 뿜었다. 사천해전에서 왜선 15척을 격파 또는 분멸시켰다.

 

이순신 십경도 중 제4경 거북선 건조에 관한 그림 사진=김동철 제공

 

신이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 구조에 지붕 덮개인 개판(蓋板)을 얹었고 그곳에 칼, 송곳, 쇠못 등 철침을 달아 단병전(短兵戰)에 능숙한 왜군의 도선(渡船)을 불허했다. 거북선 안의 조선수군(사수나 격군)은 노출이 안 되므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593년 9월,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 조진수륙전사장(條陳水陸戰事狀)에는 다음과 같이 거북선의 위력이 기록되어 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地字), 현자(玄字)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다음은 임진년 1592년 6월 14일에 올린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가운데 사천해전 관련 대목이다.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別制龜船). 앞에는 용머리(龍頭)를 설치하여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口放大砲), 등에는 쇠송곳을 심었으며(背植鐵尖),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되어, 비록 적선 수백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 이기남(李奇男)으로 하여금 이 귀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 들어가 천자포(天字砲),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 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을 쏘게 한즉 산 위와 언덕 아래와 배를 지키는 세 군데의 왜적도 또한 비오듯이 철환을 함부로 쏘았습니다.”

또 당포해전 대목에서는 “왜선은 판옥선(板屋船)만큼 큰 배 9척과 아울러 중소선 12척이 선창에 나누어 묵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큰 배 위에는 층루가 우뚝 솟고, 높이는 서너 길이나 되며 밖에는 붉은 비단휘장을 쳤고, 사면에 ‘황자(黃字)’를 크게 썼으며 그 속에는 왜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가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日傘)을 세우고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먼저 거북선으로 곧장 층루선(層樓船) 밑으로 돌격한 후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위쪽으로 쏘고(仰放), 또 천자, 지자포와 대장군전을 쏘고 나서 들이받아 그 배를 깨뜨렸습니다(撞破其船). 중위장 권준(權俊)이 돌진하여 왜장이란 놈을 쏘아 맞히자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므로 사도첨사 김완(金完)과 군관 흥양 보인 진무성(陣武晟)이 그 왜장의 머리를 베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거북선과 판옥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은 함포 포격술과 당파전술로 공격한 결과, 왜군은 혼비백산 산으로 도망쳤고 나머지는 꼼짝없이 당포 앞바다의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거북선 3층 갑판의 내부도. 사진=김동철 제공

 

거북선에 관한 난중일기 기록

 

장군은 1591년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자마자 거북선의 건조를 시작했다. 선박건조 기술자인 군관 나대용(羅大用)의 건의를 받아들여 5~6척을 여수 선소와 돌산도의 방답진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9228.

거북선에 사용할 범포(帆布 돛을 만드는데 쓰는 베) 29필을 받았다.

327일 맑고 바람도 없었다.

일찍 아침을 먹은 뒤 배를 타고 소포에 갔다.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고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411일 아침에 흐리더니 늦게 갰다.

공무를 본 뒤 활을 쏘았다. 순찰사(이광)의 편지와 별록을 그의 군관 남한(南僩)이 가져왔다. 비로소 배의 포범(布帆 돛)을 달았다.

412일 맑음.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 이순신은 완성된 거북선에서 각종 총통을 시험 발사했다. 그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바로 유비무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거북선이 출전한 해전도. 사진=김동철 제공

 

1597년, 바닷속으로 수장된 거북선

 

선조실록 병신년 1596년 11월 7일자 기사이다.

“상이 이르기를 ‘귀선의 제도는 어떠한가?’하니 남이공(南以恭 후에 북인의 영수)이 아뢰기를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 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숴지니 수전(水戰)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많이 만들지 않는가?’하니 ‘전선은 가볍고 빠른 것이 상책입니다. 지금은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이지 배가 없는 것은 걱정이 아니니 바닷가에 사는 공천(公賤 공노비)과 사천(私賤 사노비)을 오로지 수군에 충당하면 국가의 계책에 좋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천해전에 처녀 출전한 거북선은 그 특유의 용맹성으로 왜수군을 상대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1597년 7월 16일 원균(元均)의 칠천량 패전으로 모두 바닷속으로 수장되었다. 1980년대 중반 해군과 2007년 경상남도가 칠천도 부근에서 거북선 잔해를 찾기 위한 노력을 펼쳤으나 별무소득이었다.

 

2323승 전승무패, 이순신 승리의 비법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1413년(태종 13) 2월 5일.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들이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

1415년(태종 15) 좌대언(左代言 좌승지) 탁신(卓愼)이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良策)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합니다.”는 상소를 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 왜구가 서남해안에서 득세하자 조정은 이미 거북선을 제조,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 귀선(龜船)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에 의하여 재탄생한 것이다. 이를 ‘창제귀선(創制龜船)’이라 한다. 즉 이미 있었던 귀선이지만 전투력을 더 높이기 위하여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모델이라는 뜻이다. 등선 백병전과 단병 접근전에 능한 왜군을 막기 위한 비책이었다.

23전 23승 전승무패, 이순신 승리의 비법을 조카 이분(李芬)은 다음과 같이 행록에 기록했다. 그는 정유년 1597년 7월 16일 원균(元均)의 칠천량 패전으로 귀선이 상실된 뒤 본영에 근무하면서 행록을 썼다.

“공(충무공)이 수영에 있을 때 왜구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본영 및 소속 포구의 무기와 기계들을 수리, 정비하고 또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한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과 송곳(刀錐)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과 칼(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아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비려 들다가는 칼과 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거북선의 직충으로 깨지는 아타케부네(안택선). 사진=김동철 제공

 

거북선의 철갑 기술

 

거북선의 철갑(鐵甲)과 관련, 현존하는 자료로는 도노오카 진자에몬(外岡甚左衛門)이 임진년에 남긴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당시 69세의 도노오카는 왜수군에 종군했는데 1592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전황기록문서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를 썼다. 7월 8일 한산대첩에 이어 7월 10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의 실전상황을 목격한 대로 충실하게 기술했다.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는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한산해전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6일에 부산포로부터 나와 바로 해협 입구에 이르러 8일에는 안골포의 오도(烏島)라는 항(港)에 들어갔다.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 오전 8시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盲船 장님배, 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 봉화시(棒火矢), 오가리마따(大狩鉢)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 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 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 6촌(약 117.6cm)의 견목(堅木)이며,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튼튼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큰 화살(大箭)로 다섯 칸(1칸은 약 1.25m), 또는 세 칸 이내까지 다가와 쏘아대는 것이다.”

이로부터 240년 뒤인 1831년에 일본의 정한위략(征韓偉略)은 거북선에 관하여 고려선전기를 인용, “적선 중에는 온통 철로 장비한 배가 있어, 우리의 포로써는 상하게 할 수가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명나라 화옥(華鈺)의 기록이다.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안설(按說)에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海防議)에서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 그것이 바로 충무공이 창제한 거북선을 가리킴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조선의 인갑기록(鱗甲記錄)은 1748년(영조 24) 경상좌도수군절도사 이언섭(李彦燮)의 장계 초본에 나온다. 거북선의 철갑을 뜻하는 내용이 국내 처음으로 등장한다. 장계는 거북선에 대한 건의문인데, 거북선과 누선(樓船)을 비교하여 거북선이 전술적으로 뛰어남을 거듭 지적하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공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누선을 거북선으로 대치할 것을 극구 주청하고 있다.

“인갑으로 덮개를 하고(鱗甲爲蓋) 그 안을 넓혔으며, 굽은 나무로 가슴을 꾸미고, 가파르고 뾰족하여 가볍고 날래니, 외양은 신령한 거북이 물 위를 달려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누선과 비교한다면 그 빠르고 둔함이 하늘과 땅의 판이함으로나 비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 인갑이 있어서 시석(矢石)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에 군사와 기계(무기)를 감추어서 재주를 떨치며 부딪쳐 나아감에 빠르기가 육군의 갑마(甲馬)와 같으니, 그것으로 선봉을 삼아 파도가 도도한 가운데로 달리어 공격하며 나는 듯이 쳐들어간다면 실로 막강한 이기(利器)이온 바, 수군이 믿는 바는 오로지 이 전함인데···.”

여기서 거북선에 입혀진 철갑의 종류는 바로 ‘인갑(鱗甲)’이다. 즉 쇠 조각을 비늘모양으로 장착한 것으로 대장간에서 단조(鍛造)된 철엽이다. 그 두께는 부력과 복원력 등을 고려하면 조선 철갑의 전형에 따라 2∼3㎜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궁궐 대문이나 산성 대문에 박힌 쇠철갑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철갑 거북선은 영어로는 ‘Iron­clad Turtle­boats’이다.

일부 학자들은 쇠판을 씌웠을 경우 철갑 위에 쇠 송곳을 부착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바다 위에서 운용하면 녹이 잘 쓸어 별로 실용성이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충무공전서에 나타난 통제영 거북선(좌)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우). 사진=김동철 제공

 

거북선은 세 종류가 있었다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속에는 거북선의 제도를 기술한 내용이 있어, 비록 후대의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지만, 거북선의 제원(諸元)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오늘날 알려진 거북선 종류는 세 종류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이다. 또 이순신 종가에도 거북선 그림 2장이 전해져 오는데, 판옥선처럼 장대(將臺)가 있는 것과 거북머리가 없는 ‘머리 없는 거북선’이 그것이다.

이충무공전서에서는 통제영 거북선이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과 유사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10여 종이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수군 훈련도에 묘사된 거북선 중 상당수가 장대가 있는 거북선이다. 적어도 19세기 이후에는 장대가 있는 거북선이 일반화되었던 것 같다.

거북선의 척수는 임진왜란 당시 을미년(1595)에 5척, 난 후 8년이 지난 1606년(선조 39)에도 5척, 그리고 1716년(숙종 42)에도 그대로 5척이나, 1746년(영조 22)에는 14척(續大典), 1808년(순조 8)에는 30척(萬機要覽) 등으로 점차 증가되었다.

이충무공전서의 안설에 의하면 선체길이(雙葉尾를 제외한 상장부분) 26∼28m, 선체너비 9∼10m, 선체높이 6∼6.5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이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은 시대에는 부합되었으나 기술의 공백으로 실패했다.

 

 

통영 중앙시장 앞 부두에 있는 거북선. 사진=김동철 제공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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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