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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전투와 논개①

category 칼럼/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2017. 7. 6. 12:26

진주성 전투와 논개①

경남 진주성 입구에는 변영로가 지은 ‘논개시비가 푸르른 남강을 뒤로 하고 서있다. 성안에는 논개를 모신 사당 의기사(義妓祀)가 있다. 촛불에 흔들리는 논개의 넋을 위로하려는 국악의 음조가 애달프다.

 

 

경남 진주성 입구에 서있는 변영로가 지은 ‘논개’ 시비. 사진=김동철 제공

 

논개(論介) _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남강 쪽으로 내려가면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껴안고 강물로 뛰어들었다는 의암(義岩)이 있다. 세월은 흘러흘러 한 기생의 아리따운 모습은 햇볕에 바랜 역사가 되었고 그 의로운 기상은 달빛에 젖어 신화가 되었다.

논개는 진주목의 관기(官妓)로 계사년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이듬해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왜장을 유인하여 순국한 의기(義妓)로 알려져 있다. 200년 후 진주성을 찾은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촉석루 회고’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 불렀다.

 

오랑캐의 바다를 동으로 바라보며/ 숱한 세월 흘러/ 붉은 누각 우뚝이/ 산과 언덕을 베고 있네/ 그 옛날 꽃다운 물위론/ 가인의 춤추는 모습 비추었고/ 단청 매긴 기둥엔/ 길이 장사가 남아 있네/ 전장 터로 봄바람 불어/ 초목을 휘어감고/ 황성에 밤비 내려/ 안개 낀 물살에 부딪히네/ 지금도 영롱한 영혼이/ 남아 있는 듯/ 삼경에 촛불 밝히고/ 강신제를 올리네

 

 

남한강에서 바라본 진주성 모습. 사진=김동철 제공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

 

비록 천민 계급이었지만 사사로움을 떨치고 나라사랑에 분연히 뛰어든 그 의기로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이 즈음이다. 명망가입네 하는 남정네들의 찢기고 구겨진 이력을 보노라면 더욱 더 논개의 의기가 그리워진다.

촉성문을 지나니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가 내방객을 맞이한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경상도관찰사 김성일(金誠一), 단성현감 조종도(趙宗道), 종사관 이로(李魯)를 기리기 위해 1963년에 세운 비다. 비문은 1960년 중재(重齋) 김황(金榥)이 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조 임진년 5월에 문충공 학봉 김성일은 영남초유사로 진양성에 이르러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와 정의공 송암 이로와 함께 촉석루에 오르다. 때는 왜란으로 강토에 선지피 낭자하니 벼슬아치는 모두 달아나고 군사와 백성은 흩어졌다. 성안이 텅 비어 쓸쓸하고 강물만 예전대로 아득히 흐르는데 멀리 눈을 들어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니 오직 슬프고 분함에 마음 저리었다. (중략) 분연히 맹세하여 술 한잔 높이 들고 시 한 수를 읊었다. 촉석루 삼장사는 잔을 들고 굽어볼 제 뜻 있어 흐르는 물 웃는 가슴 이어지다. 세월도 강물이거니 넋은 길이 남으리라.”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

 

학봉 김성일은 퇴계 이황 문하에서 류성룡과 동문수학한 사이다. 그런데 1591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뒤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은 쥐와 같고 원숭이 같은 품새가 전쟁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보고를 했다. 왜란이 터지자 속죄하려는 듯 경상도 초유사라는 직책을 맡아 진주성의 김시민 관군과 곽재우 의병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과로사한 탓에 병에 걸려 1593년 사망했다.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중 내륙에서 벌인 가장 치열한 전투로 꼽힌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자 성내 민관군 6만 여명이 도륙 당해 진주성은 살육의 현장으로 기억된다. 임진년 1592년 9월 24일 왜군 2만여 명이 김해를 떠나 창원으로 진군함으로써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적장은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치(木村重玆),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등이었다. 이들은 9월 25일 2대로 나뉘어 노현(露峴)과 안민현(安民峴)을 넘어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의 군사를 물리치고 9월 27일 창원을 점령하였다. 또 9월 26일부터 함안에 진출하여 사방을 분탕하였다. 계속 서진을 하던 왜군은 10월 5일 진주성 동쪽 15리 근방 임연대(臨淵臺) 등지로 나아오며 진주성에 접근하였다.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 모습. 사진=김동철 제공

진주성 전투의 기록

 

적군에 의해 포위된 진주성 수성군은 목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가 3천7백여 명,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가 1백여 명으로 총 3천8백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金誠一)과 진주목사 김시민의 노력에 힘입어 수성군의 방어능력은 종전보다 크게 신장되었으나 적이 워낙 대군이었으므로 중과부적의 상황이었다.

당시 성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각지에서 외원군(外援軍)이 쇄도하여 승첩을 거두는 데 기여하였다. 동쪽 방면은 삼가의병장 윤탁(尹鐸), 초계가장 정언충(鄭彦忠), 선봉장 심대승(沈大承) 등이, 서쪽 방면은 전라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 전라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 승의장 신열, 진주 한후장 정기룡(鄭起龍) 등이, 남쪽 방면은 고성가현령 조응도(趙凝道), 진주복병장 정유경(鄭惟敬), 고성의병장 최강(崔堈), 이달(李達) 등이, 북쪽 방면은 합천가장 김준민(金俊民) 등이 원근에서 호응하였다.

마침내 10월 5일 적의 선봉 1천여 명이 진주성 동쪽 마현(馬峴)의 북쪽 봉우리에 이르러 형세를 살피며 군세를 과시하였다. 10월 6일 이른 아침 적은 세 패로 나뉘어 개미처럼 산을 덮으며 내려왔다. 10월 7일 밤 달이 진 후 적이 수백 보에 달하는 죽편(竹編)을 동문 밖에 몰래 세워 앞을 가린 다음 빈 가마니에 흙을 담아 층층이 쌓아서 언덕(토루 土壘)을 만들었다.

 

 

전투 당시 목사 김시민의 결의. 사진=김동철 제공

 

10월 8일 적이 죽제(竹梯 대나무 사다리)를 수천 개나 만들고 3층 산대(山臺)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김시민이 현자총통을 쏘게 하여 세 번 관통하자 왜적이 물러갔다. 김시민은 화구(火具)를 준비하고 성 위에 진천뢰, 질려포를 설치하는 한편, 큰 돌덩어리와 자루가 긴 도끼와 낫 등을 준비하였다. 또 물을 끓일 수 있도록 성벽의 안(여장 女墻) 내에 가마솥을 많이 비치하였다. 이 날 밤 적이 죽편을 많이 설치하여 성에 가까이 다가와서 흙을 점점 더 높이 쌓았다. 두 곳 산대는 4층으로 만들고 전면에 판자를 달아 총 쏘는 곳으로 만들었다.

10월 9일 적은 산대에 올라 무수히 조총을 쏘았다. 성중에서 현자전(玄字箭)을 세 번 놓으니 죽편을 꿰뚫고 또 큰 판자를 뚫으며 한 전은 적의 가슴을 뚫어 즉사케 했다. 그 후에는 적이 다시는 감히 산대에 오르지 못하였다.

10월 10일 새벽 2시경 적은 두 패로 나뉘어 침입하였는데, 만여 명의 한 패가 동문 쪽 성벽에 육박해 들어왔다. 목사 김시민은 동문 북격대(北隔臺)에서, 판관 성수경은 동문 옹성(擁城)에서 사사(射士)를 거느리며 힘써 싸웠다. 진천뢰, 질려포를 놓고 혹은 큰 돌과 화철(火鐵)을 던지고, 짚을 태워 어지러이 던지며 끓인 물을 적에게 들이부었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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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