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진주성 전투와 논개②

category 칼럼/이순신 전략과 리더십 2017. 7. 6. 12:30

진주성 전투와 논개②

 바야흐로 성 동쪽 싸움이 무르익을 때, 또 만여 명 되는 한 떼가 어둠을 틈타 구북문(舊北門) 밖에 이르렀다. 최득량과 이눌, 윤사복(尹思復)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며 동문과 같은 방법으로 적을 막았다. 한참 후 동방이 밝으려 할 때 적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김시민의 진주성 대첩

 

 이때 김시민이 왼편 이마에 총알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북격대를 지키며 힘써 싸웠다. 진사시(辰巳時 오전 7시~11시)가 되자 적이 비로소 퇴각했다. ‘각적전성(却敵全城)’ 즉 적을 물리쳐 성을 온전히 지켜냄으로써 ‘곡창지대’ 호남으로 가는 길을 차단시킬 수 있었다. 김시민의 진주성 대첩은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대첩, 권율(權慄)의 행주대첩 등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참고로 계사년 1593년 1월 이여송(李如松), 류성룡(柳成龍) 등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 수복에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왜적은 서울까지 밀려나게 되고, 다른 한편 강화 협상을 하면서 4월 18일을 기해 서울을 내주고 남하했다. 왜군은 남하와 함께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여 진주성을 공략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2월 27일부터 수차례 진주성 공격 내용이 포함된 명령을 하달하였다. 4월 17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보낸 도요토미의 회신에는 “진주성을 공위(攻圍)하여 모조리 토멸하고 그 후에 전라도와 경상도를 정복하고 축성(築城)할 것. 그리고 한성에 집결한 병력을 인수하여 진주성을 공위하고 축산(築山)으로 압축하여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도살할 것”을 명령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담은 장면. 사진=김동철 제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복수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차 진주성전투의 참패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실제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은 성을 함락시킨 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잔인무도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코와 왼쪽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보냈다.

당시 왜군은 명군의 개입과 의병의 궐기 및 이순신 수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후방이 취약했다. 후방 보급로 확보가 시급했던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킨 뒤 곡창지대인 전라도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전라도를 병참기지로 삼아 다시 북상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명나라와 강화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속셈이기도 했다.

급기야 1593년 6월 15일 약 9만3천여 명에 달하는 왜군이 김해, 창원으로부터 대거 수륙으로 병진함으로써 2차진주성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적군을 지휘한 주요 장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으로 1차 전투 때와는 달리, 일본 전국 다이묘(大名)들이 앞장섰다.

왜군은 6월 16일 함안에 들어와 분탕하였고, 6월 18일부터 정진(鼎津)을 공격한 뒤 의령을 분탕하였다. 이후 점차 진주성 동쪽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와 함께 군사를 단성, 삼가 및 남강변 등지로 진출시켜 원군(援軍)이 이르지 못하도록 진주 일원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든 논개. 사진=김동철 제공

 

절대 불리한 형세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휘하의 본주군(本州軍)은 대략 2천4백여명을 상회하는 정도였지만, 수성군의 전체 규모는 경상우도, 충청도의 관군과 전라도 의병을 주축으로 대략 6천~7천명 정도였다. 남하하는 왜적을 따라 조선의 관군과 의병, 명군(明軍)도 뒤를 쫓아 내려와 있었다.

왜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자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黃進),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등은 진주성에 들어가 수성 태세를 갖추었다. 의병의 손을 빌리려는 관군 장수의 독려에 곽재우는 적의 군세를 ‘천하에 능히 당해낼 수 없는 형세’로 파악하고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입성은 않겠다”면서 성밖으로 나갔다. 그만큼 절대 불리한 형세였다. 그러나 의병장 김천일과 최경회 등은 호남을 보장하기 위해서 이곳 전략 요해처를 포기할 수 없다면서 성을 사수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도원수 권율(權慄)은 운봉에 주둔하며 사태를 주시하였다. 명군은 대구에 유정(劉綎), 오유충(吳惟忠), 남원에 낙상지(駱尙志), 송대빈(宋大斌), 상주에 왕필적(王必迪) 등이 각각 머물러 있으면서 조선 조정의 거듭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성을 비워야 한다는 공성론(空城論)을 앞세워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성밖으로 한 치도 못나가겠다’는 목사 김시민의 결연한 의지를 꺾지 못했다. 사실 명군은 1593년 1월 이여송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왜군을 추격, 남하했다가 백제관 전투에서 왜군들에게 호되게 당해 왜군의 위력을 알았기 때문에 이후로 왜군에게 함부로 달려들려 하지 않았다.

 

 

임진년, 의병을 일으키며 남긴 곽재우의 결의. 사진=김동철 제공

 

류성룡의 망전필위를 기억

 

진주 수성군은 왜군에게 포위된 뒤 외원군(外援軍)이 전무한, 문자 그대로 중과부적에다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6월 21일 적의 선봉이 진주성 동북쪽 산 위에 나타난 뒤, 6월 22일부터 교전이 시작되어 6월 29일 마침내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후 왜적은 진주성을 허물어 평지로 만들었다. 성중에 왜적에게 죽은 사람이 6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 역시 코와 왼쪽 귀는 잘렸고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일본 대본영으로 보내졌다.

오늘날 진주성에는 진주박물관이 들어서 임진왜란 역사관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현존하는 천자총통 2개중 한 개를 보존하는 것을 비롯해서 수많은 전란 관련 자료와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진주성 전투는 힘이 약하면 반드시 당한다는 평범한(?) 교훈을 던져 준다. 나라 지키는 안보에 너와 내가 따로 없음에도 우리는 분열되어 있다. 급히 잊어버리는 급망증 못잖게 누군가 지켜 주겠지라는 무사안일의 의타심 또한 우리의 고질병이 된지 오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 속에서 벗어나 자강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그리고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려는 생각이 없다면 늘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작금의 냉엄한 현실이다. 류성룡의 망전필위(忘戰必危)!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하다는 교훈이 다시금 생각나는 탐방길이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모든기사보기

교육학박사, 이순신 인성리더십포럼 대표, 성결대 겸임교수,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저서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