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탐방 - 시인 김수영문학관

category 문화산책 2016. 8. 9. 19:39

 

문화탐방

 

저항, 참여파 시인 김수영

 

 

 

 

 

 

‘저항, 참여파 시인’ 김수영 …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무대에 올려

 

시인 김수영(1921~1968)은 왜 ‘자유와 저항’의 꼬리표를 달게 되었을까. 나아가 ‘불온한 자유를 꿈꾸는 모더니스트’라는 현학적인 별칭까지 붙여졌을까.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구하지 않는 자 누구이며,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자는 얼마나 멋진가. 작금 싸구려 천박한 자본주의가 판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삶의 깊은 이치와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들도 있어야 하고, 백성의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 정치 사회문제에 깊숙이 끼어드는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파 시인들도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원이 그려질 터이다.

이 궁금증은 그의 저서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풀린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2008년 문인 100인을 대상으로 애송시 100편을 뽑는 투표를 했다. 그때 뽑힌 시가 바로 그의 대표적 ‘풀’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김수영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풀’은 표면구조와 내면구조로 이뤄져 있고, 이 둘이 균열과 모순을 안은 채 결합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풀은 피해자인 민중, 바람은 가해자인 바깥 힘, 외세로 풀이한다.”(참여시, 혹은 민중시 관점) 또는 “풀은 바람에 나부껴야 뿌리가 튼튼해진다. 바람은 은총을 베푸는 자이고 풀은 수혜자가 된다.” (순수시 혹은 실험시 관점)

순수와 참여가 횡행하던 1960년대 김수영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시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려한 시적 추구의 주인공으로 여전한 연구대상이 된다.

한반도 역사의 격동기와 마주치는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지 않고서 그의 시를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에 끌려갔다가 두 차례 탈출을 감행, 서울 충무로에 돌아왔지만 경찰에게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다. 1946년 연희전문 영문과 편입 및 영어학원 강사 등 경력으로 수용소 내 미 야전병원 통역관으로 활동한다. 그는 산문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에서 “모두가 생각하면 꿈 같은 일이다. 나의 기억은 막 잠에서 깨어난 어린 아이처럼 얼떨떨하기만 하다. 잔등이와 젖가슴과 무르팍과 엉덩이의 네 곳에 전쟁포로라는 뜻의 P.W(PRISONER OF WAR) 여덟 개 활자를 찍고 암흑의 비애를 먹으면서 살아온 것이 도무지 나라고는 실감이 들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이어 ‘세월이 하 수상한’ 역사의 변혁기인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혁명이 잇따라 터졌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푸른 하늘을’ 1960)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1965 발표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한 구절이다.

 

 

 

1968년 6월 15일, 김수영은 시인 신동문, 늦깎이 소설가로 데뷔한 이병주, 한국일보 정달영 기자 등과 함께 1차 소주, 2차 맥주로 늦게까지 마셨다. 시내버스를 타고 마포구 구수동에서 하차, 어두운 길로 비틀거리며 가던 중 인도로 돌진한 버스에 그만 들이받혀 다음날 적십자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불행한 시대, 가난한 지식인의 혼(魂)’은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도봉산 아랫자락에 김수영문학관이 설립된 지 꼭 1년이 됐다. 그곳에는 부인 김현경 여사(87)와 여동생 수명씨(79)가 보관해오던 손때 묻은 사전 등 고인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콘크리트 베드타운에 김수영문학관이 들어서자 문화향유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의 갈증이 어느 정도 해결되는 듯하다. 게다가 부근의 연산군 묘와 세종의 둘째딸로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있는 정의공주 묘역,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부각되면서 문학관은 돋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의 부활에는 도봉산 둘레길이 수훈갑일 것이다.

 

/글, 사진= 김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