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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남한산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성을 지키는 장군의 병영 누각.   

 

 

 남한산성내 성곽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 성을 빠져나갔던 지화문(至和門). 치욕의 문이지만, 청나라와  도모하는 문이란 뜻의 지화문이라 이름지었다.

 

 

 

 

‘남한산성’ 저자 김훈, “고난의 자리가 자랑의 자리로 바뀌어졌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남한산성은 인조가 청나라 100만 대군을 피해 47일 동안 항전을 벌이다가 급기야 성을 나와 항복한 치욕의 장소로 기록된다. 당시 조선은 7년 동안 지속된 임진왜란으로 피폐해 청나라 군대에 맞설 힘이 거의 없었다. 애초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다 청군이 길목을 막아서자 남한산성으로 급히 몸을 피했다. 성 안에서 대신들은 죽음으로 맞서자는 척화파(홍익한, 윤집, 오달제)와 화친을 하자는 주화파(최명길)로 나뉘어 반목, 정쟁을 계속했다. 그해 겨울 추위는 유독 매서웠고 식량은 바닥이 나있었다. 인조는 결국 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 남문에서 걸어 나와 송파의 한강변 삼전도에 당도했다. 높은 단상에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네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사배구고두(四拜九叩頭)’의 예를 올려 항복했다. 그 후 남한산성은 ‘삼전도의 피맺힌 굴욕’과 연계된 부정적 이미지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제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걷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오히려 7세기 초부터 백제의 웅혼한 기상이 숨 쉬는 성터로, 통일신라 기와 등 유물이 출토되는 역사의 장소로, 17세기 외세의 침략에 항거했던 ‘포곡식(包谷式) 산성’의 비상왕궁(Emergency Palace)으로서 역할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또한 2014년 6월 22일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한국의 11번째 문화재로 이름을 올린 영광을 떠올려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석굴암-불국사와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이상 1995년), 창덕궁, 수원화성(1997년),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제주 화산섬-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하회-양동 역사마을(2010년)을 포함해 11건의 세계 유산을 보유한 ‘문화국가’가 됐다.

 

글, 사진/ 김동철 편집장

 


◇<역사 팁> 병자호란(丙子胡亂)이란?


1616년 만주족 누루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칸으로 등극한다. 20년 후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淸)으로 정하고 황제자리에 오른다. 그는 친명배금(親明排金)을 고수한 조선을 괘씸하게 여겼다. 또한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조선과 맺은 ‘형제관계’를 한 단계 더 높은 ‘군신관계’로 요구했다. 홍타이지는 명(明)을 치기 위해 산해관(山海關)을 넘을 때 조선이 배후를 칠 수 있다고 여겨 중국 통일을 이루기 앞서, 조선을 복속시키기 위해 침략했다.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


“나라를 위해서 청에게 살 길을 도모하고자 이야기하는 최명길. 청에게 복속하는 것은 결국 살아도 죽은 삶이라는 김상헌. 그 어느 쪽도 정답은 없다.”

“먹을 것이 없어 말을 잡아먹고, 개를 잡아먹고 더 이상 연명할 수 없을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삶을 연명해간다. 그토록 지켜내야 하는 삶이 무엇인가?”

“어디로 가려느냐... 여기서 머물겠느냐... 임금은 묻지 않았다. 그날 어가행력은 강화를 단념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김상헌은 강을 건너주는 사공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백성인가.’라고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