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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13 – 바다를 지배하는 자

기회의 바다 한반도, 물길을 지배하라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상을 지배한다.”

영국 군인이자 탐험가, 시인인 월터 롤리(Walter Raleigh, 1552~1618년) 경(卿)의 말이다. 월터 롤리 경은 이순신 장군(1545~1598년)과 마찬가지로 16세기에 활약했다. 그는 영국인 처음으로 북아메리카를 탐험, 플로리다 북부를 ‘버지니아’로 명명하고 식민(植民)을 행했으나 실패했다. 그저 감자와 담배를 유럽으로 가져오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 후 영국은 1607년 북미 최초 상주 식민지를 얻는 데 성공했고, 1763년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을 얻었다.

3면이 바다인 한반도는 ‘외딴 섬’이다. 북쪽이 가로막혀 대륙 진출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2006년 4월 위성으로 촬영한 동아시아의 밤 모습을 보면, 북한 땅은 전기 부족으로 암흑천지고 대한민국은 어두운 바다 한가운데 불을 밝힌 ‘외딴 섬’으로 보인다. 1988년 이한빈 부총리가 주장한 “한국의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라”는 발상의 전환! 거꾸로 놓은 지도에서 우리가 중심이 되어 21세기 환태평양시대를 열어가는 것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어느 기업가의 말처럼 바다를 뚫고 나아가 더 넓은 미지의 세계로 진출해야 더 큰 희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열강들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동북아의 바다 경영에 열을 올리는 것은 바로 한반도가 기회의 땅이자 전략적 요충지(要衝地)이기 때문이다. 대륙과 해양 세력이 만나는 교두보이기 때문에 수많은 외침에 시달렸지만, 반면 대륙횡단철도의 시발점으로서 물류의 중심기지가 될 가능성도 크다.

 

광화문 장군님의 선견지명(先見之明)

 

광화문 이순신 장군의 시선은 정남향(正南向)이다. 그 시선은 멀리 남중국해 아래 말라카 해협부터 난사군도(南沙群島), 센카쿠열도(釣魚島), 오키나와, 가까이는 제주도, 이어도 그리고 남해안의 23전 23승의 격전지로 향한다. 시야를 더 가까이 하면 숭례문(남대문)이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를 상륙한 왜군 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대가 5월 3일 한성에 무혈입성할 때 통과한 남대문이다.

영국의 월터 롤리 경이 대영제국의 발판을 만들었다면,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를 치러가는 데 길을 비켜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왜군을 막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일본군의 서해 진출과 한양 입성을 막았다. 장군은 1593년 7월 16일 그의 친척인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라는 표현을 썼다. ‘호남이 무너진다면 국가도 없어지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15만 이상의 대군을 조선에 동원한 일본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손 안에 넣어야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본국에서 부산포를 통한 보급물자 수송은 이순신 장군의 함대 공격으로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장군이 23전을 벌였던 격전지에는 세계적인 조선소(여수, 거제, 옥포, 부산 등)와 임해공업단지가 들어섰다. 장군은 먼 훗날 산업화 기지와 관광 명소(名所)가 될 귀한 요충지(要衝地)를 지키기 위해서 그토록 노심초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해전에 승리하며 나라를 지켜낸 장군들

 

삼천리 금수강산의 끝인 남해 한려수도는 수려한 풍광으로 언제 봐도 아름답다. 그 푸른 바다 너머 제주도는 조선 때까지만 해도 버려진 ‘유배(流配)의 땅’이었다. 왜구와 중국 해적들은 14세기 이전부터 이 지역을 제집 드나들 듯이 헤집고 다니면서 약탈과 분탕질을 쳤다.

9세기 장보고(張保皐) 청해진(淸海鎭) 대사는 완도(莞島) 출신으로 중국에서 출세했다. 동포들이 노예로 팔려가서 고통 받는 참상에 분개해 귀국한 뒤 완도 장도 일대에 청해진을 개설하고 한·중·일 바다에 출몰하던 해적을 소탕했다. 동양 3국의 ‘해상왕’으로 군대와 무역도 관장했다. 그는 중국 산둥반도와 장쑤성, 절강성, 광둥성, 경항(京杭) 대운하와 장안(西安), 일본 하카다, 교토, 오사카를 비롯해 샴(타일랜드), 페르시아(아랍), 필리핀을 상대로 활발한 교역을 펼쳤다. 선제적인 바다 경영을 통해 해양 상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주일미국대사를 역임한 하버드대학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는 한·중·일 정사(正史)에 영웅 장보고를 ‘해양 상업제국의 무역왕(The Trade Prince of Maritime Commercial Empire)’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후 16세기엔 이순신 장군이 남해를 지킨 영웅으로 등장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한산대첩. 한산도 제승당 소장 그림. ⓒ김동철

 

한반도는 외세의 전장(戰場)이었다. 왜란 당시 조선은 일본을 남쪽 오랑캐, ‘남왜(南倭)’로 비하해 불렀다. 그러나 선진화된 조총에 무참히 당했다. 왜란 후 피눈물을 흘리며 쓴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독자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왜란이 끝난 뒤 채 30년도 안 돼 북쪽 오랑캐인 북로(北虜) 여진족에게 두 번씩(정묘호란, 병자호란)이나 강토가 처참하게 밟혔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은 고사하고 자기 밥그릇만 차지하기 위한 당파 싸움, 외척의 득세, 민생의 피폐함 등으로 나라는 망조(亡兆)가 들었다. ‘개혁가’인 대원군이 등장했지만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정책을 펴는 사이 일본과 구미 열강들은 한반도 낚시질에 열중했다. 마치 ‘냄비 안의 개구리 신세’였다.

 

세계 전쟁에 연승한 일본의 기상

 

구한말인 1894년 7월 청일전쟁 때 일본 함대는 인천 근해 화성군 대부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나라 북양(北洋)함대와 교전하여 격멸시켰다.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다툰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은 일본의 완승으로 끝났다.

1905년 러일해전이 벌어졌다. 일본 해군은 러일해전 발발 3개월 전부터 거제시 취도를 적함으로 간주하여 함포 실사격 훈련을 했다. 도고(東鄕)함대는 진해에서 대기하다가 5월 발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마해협 오끼섬(沖島) 부근에서 수장(水葬)시켰다. 이때 일본 해군은 ‘적전회두전법(敵前回頭戰法)’을 구사했다.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1592년 7월 한산도대첩 때 왜 수군을 격파했던 ‘학익진(鶴翼陣)전법’을 응용한 ‘정자(丁字)진법’과 같았다.

 

 

도고 헤이하치로 일본 제독의 이순신 장군 칭송. ⓒ김동철

 

 

 학익진 전법의 모형. ⓒ김동철

 

학익진(학이 날개 펴듯 에워싸는 전술) 사진

 

학익진(학이 날개 펴듯 에워싸는 전술) 사진.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김동철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남진(南進)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영국은 일본에게 러시아 발틱함대의 이동 정보를 건넸다. 그리고 영국이 관장하고 있던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막아 러시아 발틱함대는 머나먼 남아프리카 희망봉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나긴 항로를 통과하느라 러시아 수군들은 기진맥진했고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염증(厭症)이 도져 전의(戰意)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1905년 2월 22일 일본 해군은 거제도 송진포를 강제로 점령하고 해군기지를 설치했다. 이날 일본의 시마네현은 슬그머니 독도를 현 내 회람문서를 통해 현에 편입시켜버렸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승한 일본은 이미 세계 정세를 주무르는 제국주의 열강(列强)의 반열에 올라가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했고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함께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에 의해 피살됐다.

구한말 나라의 대들보는 나날이 썩어갔고 망초(亡草)가 온 천지를 뒤덮었다. 1936년 일제강점기 일본제국 육군성이 발행한 조선 지도에는 독도를 ‘죽도(竹島, 다께시마)’로 표기하고 조선 영역 안에 표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태평양 연해를 일본해(日本海), 조선의 동해(東海)를 조선해(朝鮮海)라고 표기하였다. _ 2012년 10월 24일 KBS

이처럼 조선이 망국에 이르게 된 것은 일본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년)에 의한 정한론(征韓論) 이론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를 개척하여 제후를 봉건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키나와(琉球)를 빼앗고, 조선을 정벌하여 북으로는 만주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타이완(臺灣)과 필리핀 루손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

2006년 아베가 ‘정신적 지주’라고 공언해온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정신적 지도자로 우익사상의 창시자다. 그의 저서 <유수록(幽囚錄)>과 그의 사설학원이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정한론(征韓論)을 포함한 대동아공영론을 만들어냈다. 그의 제자 가운데 조선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제국주의 강경파가 있었다.

 

한반도의 바닷길 경영

 

세월은 흘러 대국굴기(大國崛起)를 꿈꾸는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2013년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실현 전략을 밝혔다. 중국은 태평양 쪽의 미국을 피해서 육상 실크로드는 서쪽, 해상 실크로드는 남쪽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600년 전(1405~1433년) 명나라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대가 7차에 걸쳐 개척한 남중국-인도양-아프리카를 잇는 바닷길 장악에 나선 것이다. 이를 위해 도련(島鏈, Island Chain), 즉 섬들로 이어진 사슬전략도 구사하고 있다. 그 핵심이 난사군도(南沙群島, Spratly Islands) 인공 섬의 군사기지 건설이다. 국제법상 안전 항해를 보장하라는 미국이 그냥 보고 있을 리 만무하다. 용호상쟁(龍虎相爭)의 형국이다.

중국은 2013년 일방적으로 제주 남방의 이어도(離於島)를 자신의 방공식별구역에 편입시켰다. 또 배타적 경제수역 확장으로 이어도를 해상영유권 분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세계는 평화롭지 않고 전쟁의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cles)’이 인류의 머리에 드리워져 있다.”

지난 9월 항일승전 70주년을 맞은 시진핑 주석의 호언장담이다. 내년이면 제주 해군기지에는 우리의 이지스 구축함(7600t급)이 정박하고 제7기동전대가 모항으로 이용할 수 있다. 난사군도의 일촉즉발 상황은 그저 ‘먼 바다 건너 불길’이 아니다. 우리의 생존권인 에너지 수입과 수출 길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암, 우리도 독도-이어도 축을 잇는 대양함대를 증강해서 유사 시 대비해야 할 거야.”

광화문 앞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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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