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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12 – 천륜이 끊어진 슬픔의 통곡(慟哭)

마른하늘에 날벼락,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리였다. 자식을 먼저 앞세워 가슴에 묻어야 하는 일. 천지사방 누굴 붙잡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늘도 무심코 땅도 무심코 바다도 무심코 갈매기만 끼룩끼룩 울어댔다. 이순신 장군은 그저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렸다.

통곡(慟哭)! 목 놓아 소리 높여 울지도 못하고 차라리 목구멍으로 오열(嗚咽)을 삼킬 뿐이었다. 장군이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 면(葂)이 전사했다. 스물한 살, 혈기 방장한 나이에 왜군의 예리한 칼날에 숨통이 꺾인 것이다. 장군은 자신을 닮아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셋째 아들의 죽음을 멍하니 목도(目睹)하고 있었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한 왜군은 충남 아산 이순신 장군의 고향을 찾아가 분풀이를 했다. 선량한 여염집에 난입해 불을 지르고 베어죽이고 마구 분탕질한다는 소식을 들은 분기탱천한 청년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평소 활 쏘기와 말 타기 등 무예에 능했지만 수많은 왜적을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유난히 애틋하던 막내아들 

 

면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6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전장을 따라 다녔다. 남해안 수군 진영과 고향을 오가며 할머니와 어머니, 형, 사촌 등 가솔(家率)의 안부를 전하는 전령사로서 충실했다. 또 오며가며 왜적의 동태(動態)도 소상히 보고해 정탐병의 역할도 했다. 막내아들 면이 남해 진영에서 아산 집으로 갔을 때, 장군은 아들이 무사히 도착했는지 걱정되어 전전긍긍하였다.

 

 

백의종군 때 장군과 함께한 아들 면.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한 장면. ©김동철

 

한 번은 면이 피까지 토하는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매우 걱정하여 점까지 쳐보았다. 그 결과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다시 해보니 이번엔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역시 좋은 괘였다. 그리고 며칠 후 면의 병세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 아들이 비명횡사(非命橫死)한 것이다.

10월 14일 새벽, 장군은 꿈을 꿨다. 꿈에서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서 냇가로 떨어졌는데, 막내아들 면이 엎드려서 자신을 안는 듯한 모습을 보았다. 이 꿈이 무슨 조짐인지 알 수는 없고, 내수사의 종이 기르던 소 중 12마리를 일본군이 끌고 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1597년(정유년) 10월 14일 맑음

 

“저녁에 사람이 천안(天安)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정신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慟哭)’ 두 글자가 써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가.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과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천륜(天倫)이 끊어지는 아픔은 그토록 아리고 쓰리고 고통스러웠다. 이백(李白)의 시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하늘이 맺어준 부모형제 간의 도리를 천륜(天倫)이라 했다.

회도리지방원(會桃李之芳園) : 복숭아꽃 오얏꽃 만발한 꽃동산에 모여
서천륜지락사(序天倫之樂事) : 부모형제들이 즐거운 놀이를 펼친다

 

셋째  아들 면은 1577년 아산에서 태어났지만 장군은 그 옆에 없었다. 당시 함경도 변방에서 여진족과 대치하던 하급 군관이었다. 변방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을 늘 그리워했고 막내는 무럭무럭 커가면서 아버지를 자주 볼 수 없음에 매우 서운해했다.

 

1597년(정유년)은 장군에게 가장 서럽고 고통스런 한 해였다. 막내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悲報)를 접해야 했고, 4월 13일에는 어머니의 죽음을 전하는 부음(訃音)을 들어야 했다. 그보다 앞선 2월 26일 선조에 대한 항명죄(抗命罪)로 한성으로 압송되어 3월 4일 투옥되었다. 4월 1일 특사로 풀려나 바로 백의종군 길에 올랐는데 모친이 돌아가셨다. 그 후 7월 16일 원균(元均)의 칠천량해전 패전 소식을 들어야 했고, 선조는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는 기복수직교서(起復受職敎書)와 유서(諭書)를 내렸다.

칠천량해전 전날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전선 12척을 가지고 어디론가 달아났다. 장군은 재임명됐지만 한산도 군영은 적의 수중에 넘어갔고 수하에 장졸은 없었다. 사라진 전선 12척을 간신히 찾았고 구례, 하동, 순천 등지를 샅샅이 뒤져 식량과 군사 모집에 나섰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모양만 갖춘 수군(水軍)을 재건한 후 9월16일 ‘천행(天幸)’의 명량대첩을 이뤘다.

이렇듯 스트레스가 과중한 상태에서 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1592년(임진년) 6월 사천해전에서 유탄을 맞은 왼쪽 어깨에서는 계속 고름이 흘러내렸다. 코피를 한 되나 쏟았고 회복차 배에서 내려 뜨거운 온돌방에서 아픈 몸을 지졌다. 하지만 일기는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책상 앞에 앉아 붓을 들고 한 자씩 써내려가는 글쓰기는 깨지고 아픈 심신을 달래주는 힐링의 치유법이었다.

 

 

현충사 내에 있는 장군의 생가 터. ©김동철

 

 

 

현충사에 있는 셋째 아들 면의 묘소. ©김동철

 

1597년 10월 16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10월 17일에는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哭)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비통함을 정말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19일에는 고향집 종이 내려오니 그걸 보고 아들 생각이 나서 다시 통곡하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는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리고, 밤에 앉아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났다. 아직 어머니의 상중(喪中)인 데다가 아들까지 잃어 그 슬픔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19일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만이 흐른다
어찌 이 슬픔을 말로 다하랴
이승에서는 너는 영령이 되었구나
마침내 불효가 이토록 여기에 이를 줄을 어찌 알았으랴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슬픔에 억누를 수가 없다

 

무제(無題)

 

소소풍우야(蕭蕭風雨夜) :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경경불매시(耿耿不寐時) :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회통여최담(懷痛如嶊膽) : 간담이 찢어질 듯 아픈 이 가슴
상심사할기(傷心似割肌) : 살이 에이듯 쓰라린 이 마음

 

지필묵(紙筆墨)을 내려놓자 마침내 한지 일기장 위에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셨던 이 나라 조선, 그 조선의 눈 맑은 백성들이 가솔(家率)의 다름 아님을 깨달은 탓입니다. 그 큰 사랑을 소자가 헤아리고 품을 수만 있다면 몸은 비록 멀리 있으나 소자는 늘 아버지 곁에 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귓전에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면의 전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광해군 때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野談集)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해지는 설화다.

“임진왜란 때 통제사 이순신 군대가 한산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순신 아들은 충청도에서 싸우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순신은 아들의 죽음을 모르고 있는데, 충청도 방어사가 왜적을 사로잡아 한산도로 압송해왔다. 이날 밤 이순신의 꿈에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나 ‘잡아온 왜적 13명 속에 나를 죽인 적이 끼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아들 죽음의 부고가 왔다. 이순신이 잡혀온 왜적들에게 ‘어느 날 충청도 어디에서 흰 무늬가 있는 붉은 말을 탄 사람을 너희들이 죽이고 그 말을 빼앗았는데, 지금 그 말이 어디에 있느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왜적 중 한 명이 ‘어느 날 흰 무늬 있는 붉은 말 탄 소년이 우리 군중으로 돌진해 서너 명을 죽이기에 풀숲에 복병해 있다가 습격해 죽이고 그 말은 진장(陳將)에게 바쳤다’고 대답했다. 이순신은 통곡하고 그 왜적을 죽이라 명하고는 아들 혼백을 불러 글을 지어 제사했다.”

조카 이분의 ‘행록’에도 이면의 죽음에 관한 장면이 나온다.

“이면의 전사 4개월 후 이순신의 꿈에 이면이 나타나서 ‘날 죽인 적을 아버지께서 죽여주십시오!’라고 울면서 말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이 ‘네가 살아 있을 때는 장사였는데, 죽어서는 그 적을 죽이지 못 하겠다는 말이냐?’라고 하니, 이면은 ‘제가 그 놈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겁이 나서 그 놈을 못 죽이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저승과 이승이 무슨 간격이 있을 것입니까?’라고 말하고는 슬피 울면서 사라졌다. 잠에서 깬 이순신이 잡혀온 일본 포로들을 조사하니, 그 중에 이면을 죽인 장본인이 있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그 왜군을 죽임으로 이면의 복수를 하였다.”

이렇듯 면의 죽음은 사후에 이야깃거리로 만들어져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 1597년 12월 5일 도원수 권율(權慄)의 군관이 왕의 명령서(有旨)를 가지고 왔다. 장군이 모친의 상중(喪中)에 소식(素食)만 하여 기력을 잃을까 걱정이 된다며 기력 회복을 위해서 권도(權道)를 따르라는 명령이었다. 붉은 살코기도 함께 보내왔다. 권도는 임시방편, 변통의 의미다. 즉 육식을 먹음으로써 기력을 회복해야 장수로서 전장에 나설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효(孝)를 따르다가 자칫 충(忠)을 놓쳐서 안 되는 것이었다. 한 해에 어머니와 아들과의 천륜을 끊는 고통을 당한 이순신 장군의 마음은 아리고 쓰렸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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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