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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현한 명량대첩 모습. ©김동철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 명량대첩

1597년 9월 16일(양력 10월 28일) 명량해전이 일어났다. 전라도 남쪽 바다 끝 해남과 진도 사이 울돌목에서였다.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막아낸, 믿을 수 없는 신화(神話)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동원된 조선 판옥선 13척이 한꺼번에 133척을 막았다는 뜻은 아니다. 물목이 좁은 울돌목에 왜군은 선발대 31척을 먼저 보냈다. 그 31척이 모두 격침 또는 분멸 당했다. 후방에 포진해있던 나머지 왜선은 황급히 등을 돌려 꽁무니를 뺐다.

울돌목의 다른 이름은 ‘명량(鳴梁)’이다. 울 명(鳴)에 길 량(梁). 명량 수로는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사이에 있는 협수로이다. 남해에서 서해로 가기 위한 요충지로, 지금은 진도대교가 놓여있다. 그 다리 아래에서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의 기적(奇跡)과 같은 신화를 만들어냈다. 최근 명량대첩 재현 행사를 취재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한 필자는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바다 물길 가운데 굽이치는 소용돌이는 ‘웅웅웅’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밀물과 썰물 때 남해와 서해의 바닷물이 암초와 암벽에 부딪치면 용틀임이 노도(怒濤)처럼 일어났다. 멀리 20리 밖에서까지 ‘바다의 울음’이 들렸다고 한다. 울돌목의 폭은 만조 때는 325m(수심 20m), 간조 때는 280m로 최대 유속은 10.4~11.6노트(knot, 1노트는 1.85㎞/h)다. 그런데 울돌목에서 암초 때문에 실제 항해 가능한 물길의 폭은 약 120m이고 평균 유속은 9.5노트다. 이번 탐방 때 물길을 이용하는 조력발전소가 진도 벽파진 쪽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자료는 국토해양부 국립해양조사원 변도성 씨가 수평 초음파 유속계를 이용하여 2009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분석한 결과다.

 

지형지물과 자연조건의 적절한 활용

풍력과 인력만으로 배를 움직여야 했던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지형지물과 자연조건의 적절한 활용은 승리를 일구기 위한 절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597년 9월 14일 맑음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碧波) 건너편에서 연기가 올랐기에 배를 보내 실어오게 했더니 다름 아닌 임준영이었다. 정탐한 내용을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 척 중 55척이 이미 어란포에 들어왔다’고 했다. 아울러 적에게 사로잡혔다 도망쳐 온 김중걸의 말도 전해주었다. 왜놈들이 한밤중에 의논하기를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 (병사를) 쏴죽이고 배를 불태운 것은 너무 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런 뒤에 곧바로 경강(京江, 한강)으로 올라가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나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되어 곧바로 전령선을 보내 피난민들에게 알아듣게 타이른 뒤 급히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일단 이겨놓고 싸우는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은 치밀한 정보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적을 알고 우리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병가(兵家)의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를 장군은 굳게 믿고 있었다.

1597년 9월 15일 맑음
“밀물 때에 맞춰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右水營) 앞바다로 진(陣)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명량(鳴梁)이 있는데,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였다.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고 했고, 또 한 명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율로 다스려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며 거듭 엄하게 약속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패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결전의 날, 기적의 승리

다음날 결전의 9월 16일. 예상했던 것처럼 엄청난 수의 일본군이 나타났다. 이순신 장군은 태산 같은 자세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장 먼저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동시에 부하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독려했다.
“적선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곧바로 덤벼들기는 어렵다.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마음과 힘을 다해서 적을 쏘고 또 살아라!”

그러나 장군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장수들은 공포에 떨며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선봉에 선 대장선이 포위를 당하는데도 겁을 먹은 장수들이 1마장(약 450m) 뒤쪽에서 관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군은 나각(螺角)을 불게하고 중군선에 명령을 내리는 대장기와 함대를 부르는 초요기(招搖旗)를 올리는 깃발신호로 적진을 향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그제야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장(中軍將)인 미조항첨사 김응함(金應緘)의 배가 다가왔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가서 산다면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또한 김응함을 불러 말했다.

“너는 중군(中軍)인데도 멀리 피해 대장(大將)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느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상황이 또한 급하니 일단 공을 세우게 해주마.”

이리하여 두 전선이 먼저 적진으로 쳐들어가자 적장이 휘하 배 2척에 명령을 내렸다. 안위의 배에 적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앞다투어 기어 올라가도록 했다. 이에 맞서 안위와 배 위의 수군들은 사력을 다해 몽둥이와 긴 창 혹은 수마석(水磨石)으로 정신없이 적들을 쳐댔다. 수군들의 힘이 다해갈 무렵 장군은 뱃머리를 돌려 곧바로 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럽게 20문의 천자총통(판옥선이나 거북선에 탑재함. 사정거리 약 900보, 1㎞)과 불화살을 쏘아 적의 배를 분멸시켰다. 검푸른 바다는 타오르는 불꽃, 검은 연기와 함성으로 뒤덮였다. 적선 3척이 거의 뒤집어졌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전선이 합류하여 가세했다.

일자진(一字陣)을 편 장군이 천자총통을 작열시키자 왜군 아타케부네(安宅船, 일본의 대형 전투함)와 세키부네(關船, 일본의 중형 전투함)는 맥없이 격파됐다. 불화살을 맞은 왜선은 불타올랐고 왜군들은 추풍낙엽처럼 바다로 떨어졌다. 조선 수군이 강했던 것은 판옥선에 총통을 싣고 화력을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비롯해 전라우수사 김억추, 미조항첨사 김응함, 녹도만호 송여종, 영등포만호 조계종, 강진현감 이극신, 거제현령 안위, 평산포대장 정응두, 순천감목관 김탁 등 1000여 명이었고 일본 수군은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루시마 미치우사, 마다시 등 1만4000여 명이었다.

 

하늘이 내려준 불가사의한 대승

조선 수군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정보수집용 소형 배, 전투용으로는 활용할 수 없음) 32척이 고작이었지만 고기잡이 민간 포작선 100여 척을 후방에 배치해 군세를 유지했다. 전투 결과 조선 수군 판옥선은 단 한 척도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수군 1000여 명 중 순천감목관 김탁, 우수영 노비 계생은 사망했고 강진현감 이극신과 박영남, 봉학 등은 부상 당했다. 그러나 왜군 소속 133척 가운데 선발대 31척이 모두 분멸 또는 수장(水葬)됐다. 이 아수라장에서 나머지 후발대는 허겁지겁 퇴각했다. 왜군 1만4000여 명 가운데 해적 출신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마다시는 사망했고 도도 다카도라는 중상을 입었다. 죽거나 다친 왜군은 8000여 명에 이르렀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날 왜 수군은 오전 6시 30분 정조(停潮) 때 발진했다. 조선 수군은 오전 9시 밀물 때 출전했다. 오전 10시 10분 최대 유속은 4m/s였다. 오전 10시 30분 왜 수군의 공세가 시작됐고 오후 12시 21분 정조가 되었다. 오후 1시경 썰물, 조류가 남동류로 바뀌자 조선 수군에 유리한 형세가 되었다. 이때 총공세를 폈다. 오후 2시 40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오후 4시 30분 조류에 휩쓸린 왜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오후 6시 30분 추격을 중지하고 오후 6시 56분 다시 정조를 맞았다. 오후 7시에는 당사도로 후진했다. 바다는 다시 고요해졌다.

“천행천행(天幸天幸), 차실천행(此實天幸)이다.”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일기에 적었다. 하늘이 내려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대승(大勝)이었다.

기적과 같은 대승의 이면에는 상할 대로 상한 심신을 억지로 지탱한 장군의 의지가 숨어 있다. ©김동철

 

애간장이 끊어지던 장군의 속내

이순신 장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가슴 한켠이 아리고 쓰라렸다. 그즈음 토사곽란으로 고생을 많이 한 탓이기도 하지만 고단한 지난날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4월에는 어머니의 임종은 고사하고 발상(發喪)도 못한 채 백의종군 길에 올라야 했다. 7월 18일 백의종군으로 도원수 권율(權慄) 진영인 초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원균(元均)이 칠천량해전에서 궤멸되었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때 선조와 조정에서는 또다시 장군을 부랴부랴 찾았다. 8월 3일 아침 일찍 선전관 양호(梁護)가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와 선조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이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선조가 이순신에게 이렇게 자존심을 내려놓고 자신을 책망하는 뜻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은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장군뿐이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조정과 군왕을 속이고 업신여긴다며 삭탈관직, 고문과 백의종군을 시켜놓고 아쉬울 땐 찾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장군은 교지에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직함 외에 아무것도 없는 통제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곧바로 길을 나섰다. 왜군은 남원성을 공격하기 위해 섬진강을 따라 구례까지 올라왔다. 다행히 단 하루 차이로 장군과 조우(遭遇)하진 않았다. 군량과 화살, 총통 등 군기 및 병사를 모으러 남행(南行)할 때 이전에 휘하에 있던 수군 장수와 지방관들이 장군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8월 15일 보성군에서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가져온 선조의 편지는 ‘지난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결과로 해전이 불가능할 경우 육지에 올라 도원수 권율(權慄)을 돕도록 하라’고 써있었다. 선조의 변화무쌍한 변심(變心)이 또 발동했다. 수군 폐지였다. 이에 장군은 화급히 장계를 올렸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수과(戰船雖寡) : 전선의 수가 절대 부족하지만
미신불사즉(微臣不死則) : 보잘 것 없는 신이 살아 있는 한
불감모아의(不敢侮我矣) : 감히 적은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8월 19일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裴楔)이 숨겨놓았던 12척의 판옥선을 찾아냈다. 그나마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배설은 신병치료를 핑계로 도주했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 고향 선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수국(水國)에 가을이 깊어가던 10월 14일 또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고향 아산에서 둘째아들 열이 보내온 편지 겉봉투에는 ‘통곡(慟哭)’이란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자신을 닮아 가장 사랑하던 셋째아들 면(葂)이 고향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비보(悲報)였다.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의 보복작전이었다. 막내를 잃은 지 나흘 째 마음 놓고 통곡할 수 없었던 장군은 염전에서 일하는 강막지 집으로 갔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너를 따라 죽어 함께 통곡하고 싶지만 너의 형과 누이, 어미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니 참고 연명할 뿐이다.”

장군은 마침내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