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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징비록 11 – 도를 넘는 병역(兵役) 비리

예외 없이 동참하는 병역의무 회피

병역 비리가 도를 넘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의 고위공직자뿐 아니라 최근 들어 ‘국적 이탈 혹은 상실’의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기현상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12년 2800여 명에서 이듬해 3000여 명, 지난해엔 4300여 명까지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7월까지 2300여 명에 달했다. 국적 포기가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한 꼼수라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장성 출신의 국회 국방위 백군기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입법, 사법, 행정부 고위공직자 26명의 자녀 30명이 국적 이탈 및 상실로 병적에서 제적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국적을 취득했다. 여러 언론과 SNS 상에는 비아냥과 분노의 글이 넘쳐나고 있다.

“군대에 안 가야 고위공직자가 될 수 있는 나라니까 그렇지.”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도 않고, 지키고 싶지도 않은 나라에서 고위직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을까.”

대한민국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며 살아온 이들이 국적 변경을 통해 병역의무를 회피하는 것은 ‘먹튀’로 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취업이나 사업, 사회활동에서 엄격한 규제와 경제적 불이익을 줘야 마땅할 것이다. 또한 이들의 안보불감증과 극단적인 이기심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어 사회통합에도 저해요소가 된다.

6·25 전쟁 때 전선에서 “빽(Back)!” “쩐(錢)!” 하는 단말마(斷末魔)를 남기고 전사한 병사들이 많았다고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군대를 빼줄 만한 배경이나 돈이 없어 끌려와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한(恨)을 남긴 비통함일 것이다. 그 후에도 여전히 신체검사를 조작하는 의사와 병역 브로커가 암암리에 돈을 받고 군대를 면제해주는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 허술했던 병역 행정의 단면이다.

병역지정업체에 배치됐지만 산업기능요원이 다른 업체에서 근무하다 적발된 건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번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1년 고발, 경고, 주의 등 행정처분을 받은 병역지정업체 적발 건수는 97건, 2012년에는 130건, 2013년에는 145건, 2014년에는 245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병역기피에 예민한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남자의 병역의무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대통령선거나 인사청문회 때마다 후보 자신 또는 자녀들의 병역 문제가 핫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수많은 정치인, 고위공직자들이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이유로 곤혹을 치른 사례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지난 MB 정부 때 국가안전보장위원회(NSC)가 열렸는데 군대갔다온 사람이 몇 안 됐다는 보도를 접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지난해 서울시교육감에 출마했던 고승덕 후보도 아들의 이중국적과 병역 기피 의혹에 휘말렸다. 가까이는 황교안 현 국무총리도 인준 과정에서 자신의 병역 면제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나 영국 왕실의 왕자들 가운데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전장(戰場)을 누빈 전투병과 장교 출신들이 많다. 모범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유명 정치인 아들에 대한 병역 검증을 놓고 정략적인 공방이 오가는 세상이다. 2002년 당시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씨의 두 아들이 부당하게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폭로가 터졌다. 결국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이로 인해 대선의 판도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병풍(兵風) 조작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국적법은 속인주의(屬人主義)를 원칙으로 속지주의(屬地主義)를 보충해 부모가 외국에 거주할 당시 출생할 경우 이중국적자가 된다. 한때 원정출산이 유행했던 것도 이중국적으로 남자 아이의 경우 병역의무를 면제받기 위해서였다. 정부는 병역기피형 국적 포기자를 막기 위해 2005년 국적법을 개정했다. 이후 이중국적 상태에 있는 남자들도 병역의무를 이행토록 했다. 2002년에는 병역을 고의로 회피한 가수 유승준이 지금까지 입국하지 못하고 있다.

 

임진왜란, 그 시절 병역의무

 

임진왜란 때 각 진영(鎭營)은 병력 부족으로 병사를 징발하는데 애로(隘路)가 많았다. 관군은 아니고 보충병인 사색제방군(四色除防軍)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사시 겨울에 동원되어 해상과 육상에 배치되고 각 지역의 방위를 맡았다. 그러나 이 병력 역시 부족하자 제방군의 친척이나 이웃에게도 병역을 부과하다가 불합리하다는 지적에 제도가 폐지됐다. 그 결과 더욱 병사가 부족해 각 지방의 진영에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쪽 왜구를 방어하는 해상방위병이 북쪽 여진족 방어에 투입되자 백성들의 원성이 커져갔다. 장정들이 모자라자 노약자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임진년) 12월 10일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다음은 임진장초(壬辰狀草) 내용이다.

“모병관이 내려와 내륙과 연안을 구분하지 않은 채 군사 수만을 결정하여 심하게 독촉하여 각 고을에서는 변방 군사를 빼다가 충원하고, 남은 장정을 징용하였으며 복수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가 내노비와 사노비를 남김없이 빼갔습니다. 백성들의 근심과 원망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중략) 전선은 비변사의 공문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본영과 여러 진포에 명령하여 많은 수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한 척의 전선에 사부(射夫, 사수)와 격군(格軍, 노꾼)을 포함하여 130여 명의 군사를 충원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없어 외로운 신하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탄하며 마음은 죽고 형체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병사의 친족에게만 징용하는 일’을 전과 같이 시행하되 차츰 가려내어 백성의 원망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 급선무입니다. 조정에서 더욱 헤아려 주십시오.”

당장 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징용대상자가 대부분 흩어지거나 도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장군은 도망병을 특히 무관용(無寬容)으로 무섭게 다뤘다. 군영의 군기를 엄정하게 잡기 위해서였다. 전시에 한 명이 탈영하면 두 명, 세 명이 잇달아 탈영하게 되고 진영은 곧 무너지게 된다. 깨진 유리창 한 장이 방치되어 있으면 그 건물은 끝내 모두 폐허가 된다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Broken Window Theory)’이 적용되는 대목이다.

1593년(계사년) 2월 3일 맑음“이날 영남에서 옮겨온 귀화인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 등이 명부에 오른 격군 80여 명이 도망갔다고 보고하면서 뇌물을 많이 받고 붙잡아오지 않았다. 군관 이봉수, 정사립 등을 몰래 파견하여 70여 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어주고 김호걸, 김수남 등은 그날로 처형했다.”
1594년(갑오년) 7월 26일 맑음“늦게 녹도만호 송여종이 도망간 군사 8명을 잡아왔기에 그중 주모자 3명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1594년(갑오년) 8월 26일 맑음“흥양의 포작(어부) 막동이 장흥의 군사 30명을 몰래 배에 싣고 도망간 죄로 목을 베어 효수(梟首)했다.”

 

고된 군역(軍役) 회피의 유혹 

조선 전기부터 수군은 힘든 고역(苦役), 천역(賤役)으로 인식돼 신양역천(身良役賤), 즉 신분은 양인(良人)이지만 하는 일은 천민(賤民)의 일과 같이 힘들어 기피 대상이었다. 백성들은 가난보다도 불평등한 차별에 분노했다. 양반들은 군역을 지지 않고 평민들에게 덮어씌웠기 때문이었다.

류성룡(柳成龍)은 1594년 군역을 지지 않는 양인(良人)과 양반을 골라서 천민과 합친 속오군(束伍軍)제도를 도입했다. 황해도부터 시작해 1596년 말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조직이 완성되었다. 훈련된 관군이 아닌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농민군 수준이었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실전에 투입되었다. 류성룡은 또 노비도 공을 세우면 신분을 면해주는 ‘면천법(免賤法)’을 시행했다. 그는 애민(愛民)사상을 가진 개혁가였다.

전투 중 도망병이 나온다는 것은 일단 진 전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1597년 7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의 조선 함대는 칠천량해전에서 궤멸당했다. 판옥선, 거북선 등 100여 척이 대파됐고 2만여 명의 수군이 전사했다. 왜군은 그동안 이순신의 견제를 받던 수세적 상황을 만회하려는 듯 작심하고 대규모 수륙양동작전을 펼쳤다.

 

 

전남 해남 전라우수영 자리에 전시된 조각품으로 ‘왜 수군을 격파하는 조선 수군의 혈전 모습’을 형상화한 것. ©김동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겠지만, 패전에 대한 복기(復棋)작업이 있었다.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파발보고서인 치계(馳啓)를 통해서 “임진왜란 이후 도망간 장수들 중 한 사람도 군법에 따라 치죄(治罪)되지 않아 이것이 관습이 되어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왜적이 공격해오자 수군이 처음부터 힘을 겨루어 싸우다가 패한 것이 아니라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자기 살 길을 찾아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라고 선조에게 보고했다.

병조판서 김명원(金命元)도 조정회의에서 “왜적이 우리 배에 접근하여 올라타자 우리 장졸들은 손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패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장수건 병졸이건 자기 살 길을 찾아 도망갔다’는 말에 방점이 찍힌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해전 전날 핑계를 대고 판옥선 12척을 가지고 한산도 쪽으로 도주했다. 고된 군역(軍役)을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술책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나라가 없으면 가족도 없고 나도 없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의병(義兵)이 곳곳에서 궐기함으로써 육상에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기여했다.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전라도 고경명(高敬命), 김덕령(金德齡), 충청도 조헌(趙憲)과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및 서산대사 휴정(休靜),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같은 의승군(義僧軍)이 있었다.

 

 

호남 의병장 고경명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담양 전투에 출전하는 모습.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동철

 

오늘날 국적을 바꾸고 무릎과 어깨를 망치로 깨트리고 눈에 이물질을 넣고 급기야 정신병자 행세를 하면서 병역을 기피하는 자들이 늘어섰다. 이들에게 지난 8월 4일 북한 목함지뢰 도발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 전개됐을 때 스스로 전역을 미룬 병사들과 ‘국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겠다’는 젊은 예비역들의 당당한 모습이 어떻게 비쳐질지 궁금하다.

    김동철(전 중앙일보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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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리더십 포럼 대표, 교육학 박사, 시사·문화평론가, 전 중앙일보·월간중앙 기획위원, 명지대·성결대 강의

'환생 이순신 다시 쓰는 징비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