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은 말했다, ‘평화는 공포의 자식이다’
미루나무 제거 작전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미군 장교 두 명(보니파스 대위, 배럿 중위)이 북한군에게 도끼로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북괴도끼만행사건’이다. 미군 측 4명과 우리 장병 4명 등도 중경상을 입었다. 미국은 즉시 북한을 쓸어버릴 태세로 본토와 해외주둔 군사력을 한반도로 집결시켰다. 6.25 전쟁 후 처음으로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3가 발령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상황이었다. 우리 특전사 장병들은 문제의 ‘미루나무 제거 작전’에 긴급 투입됐고 주변에 불법으로 설치된 북한군 초소 4개를 깡그리 부숴버렸다.
박정인 사단장의 동해보복법
중부전선 백골부대(3사단) 박정인 사단장(지난해 88세로 별세)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이상으로 대응한 장군이었다. 1973년 3월 7일 비무장지대에서 표지판 보수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우리 측 군인들에게 북한군이 기습사격을 가해 대위 1명과 하사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박 사단장은 105mm, 155mm 견인포로 북한 GP와 경계부대에 포사격을 맹렬하게 퍼부었다. 그러나 이 일로 박 사단장은 옷을 벗어야 했다. 1972년 남북협상이 진행 중이었고 작전통제권을 미군이 가진데다 일개 사단장이 함부로(?) 북한을 공격하는 것은 정전협정위반이었기 때문이다.
제1차 연평해전
1999년 6월 7일 연평도 서북쪽 10㎞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 3척이 어선 보호 미명 아래 NLL 북방한계선을 3.5㎞ 침범했다. 다음날에도 경비정 4척과 어선 10척을 북방한계선 남쪽 9㎞까지 침범시켰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을 접근시켜 교전규칙과 국제법에 의해 퇴각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경비정 3척을 추가 투입했고 6월 9일에는 북한 고속정이 대한민국 해군의 고속정과 충돌하여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자 해군은 6월 11일 북한 경비정 4척에 대해 선체 뒷부분을 부딪치는 ‘함미(艦尾) 충돌작전’을 실시했다. 6월 15일 북한 경비정 7척이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접근하여 충돌공격을 실시하고, 양측 간에 혼전이 벌어지던 중 오전 9시 28분 북한 함정이 먼저 사격을 가해오자 해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대응사격을 가하였다. 쌍방 간의 교전은 약 14분간 진행되었고 그 결과 북한은 어뢰정 1척이 격침되고 5척이 크게 파손 당하여 북으로 도주하였다. 반면에 대한민국 해군은 고속정 5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이른바 제1차 연평해전이다.
제2차 연평해전
제1차 연평해전이 벌어진 지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2002 한일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서 북한은 다시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여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이날 북방한계선을 넘기 시작한 북한 경비정들은 근접차단을 실시하던 해군 참수리 357호에 대해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도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대응사격을 개시하는 한편 인근의 제천-진해함(PCC)과 참수리급 경비정 4척을 투입해 격파사격을 실시하였다. 교전은 31분간 진행됐고 북한 SO 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 북으로 퇴각함으로써 종결되었다. 해군은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기습 공격을 받은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되고, 정장인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한상국 상사 및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의 전사자와 18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이른바 제2연평해전이다.
해군의 교전규칙 수정
6명의 해군영웅이 펼친 ‘잊혀진 전투’가 실전(實戰)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 것은 13년 만이었다. 십시일반(十匙一飯) 민간자본에 의해 영화로 환생한 것이다. 당시 영결식은 해군장(海軍葬)으로 치러졌고 연평해전에서 희생된 영웅들은 전사자 대우도 못 받고 순직자로 처리됐다. 당시 군인연금법에 전사자가 법률로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000만~5000만원의 사망 보상금만 받았다. 해군은 연평해전을 계기로 교전규칙을 소극적 대응에서 적극적인 응전 개념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 침범 시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 작전)-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5단계 대응에서 시위기동-경고사격-조준격파사격의 3단계 대응으로 개정되었다.
천안한 폭침 사건
이어 천안함 폭침 사건이 일어났다. 2010년 3월 26일에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초계중이던 해군 초계함 PCC-772 천안함이 피격되어 침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되었다. 정부는 천안함의 침몰 원인을 규명할 민간-군인 합동조사단을 구성하였고, 대한민국을 포함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스웨덴, 영국 등 5개국에서 전문가 24여 명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2010년 5월 20일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침몰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조사 결과는 미국과 유럽 연합, 일본 외에 인도 등 비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안건으로 회부되었다. 안보리는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조사결과에 비추어 우려를 표명한다. 공격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그러나 북한은 ‘특대형 모략극’이라며 펄쩍 뛰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안보리 성명을 반대하면서 ‘안보리는,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하는 북한의 반응, 그리고 여타 관련 국가들의 반응에 유의한다’며 형식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옹호했다.
휴전협정 이래 최초의 민간 상대 군사 공격
또 연평도 포격도발 사건이 있었다. 김정은의 3대 세습을 본격화한 북한이 2010년 11월 23일 서해 연평도 해병 부대와 민간인 마을에 해안포와 곡사포 포탄 100여 발을 발사했다. 북한의 포격 도발로 해병대원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민간인은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이래 민간을 상대로 한 대규모 군사 공격은 처음이었다.
1953년 군사분계선 설정 당시 육상경계선에 대한 양측 합의는 이루어졌으나, 동서 해안의 해상경계선인 NLL에 대해서는 남북한 사이에 명시적인 합의가 없었다. 이에 유엔군은 서해상에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영해 기준 3해리를 고려하고 연평도, 백령도 등 5개 도서와 북한지역과 개략적인 중간선을 기준으로 북방한계선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유엔군의 일방적 조치라며 그 효력을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전후에 해상에서의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말대로 ‘평화는 공포의 자식’이다. 든든한 억제력을 가질 때만 평화체제는 유지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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