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은 허구인가?
율곡 이이(李珥)의 10만 양병설의 논란이 뜨겁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10만 양병론’은 역사의 조작, 허구라는 주장이다.
사회경제사적 시각이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오류라는 주장
‘임진왜란과 율곡(栗谷)과 10만 양병은 동시발상적이다. 임진왜란 하면 10만 양병을 떠올리고, 10만 양병하면 율곡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 10만 양병은 율곡의 어느 글에도 없다. 구폐책(救弊策)에 속하는 율곡의 대표적 상소문은 물론 다른 상소문에도 없다.(중략) 임진왜란의 실제 체험적 고통은 바다에서의 이순신(李舜臣), 육지에서의 류성룡(柳成龍) 만큼 치열히 겪은 사람이 없다. 그 고통의 기록을 가장 적나라하게 가장 소상히 적은 류성룡의 그 어느 글에도 율곡의 10만 양병론은 없다.’
송 교수는 “10만 양병론은 오직 율곡 제자들이 쓴 <율곡비문>에만 있고, 또 그 제자의 제자가 편찬했다는 <율곡연보>에만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같은 논란에 대해 “역사는 정치사라는 고정틀에 갇혔고 민생의 개념이 들어있는 사회경제사적 시각이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오류”라고 지적한다.
당시 조선의 총 인구가 근거될 수도
송 교수는 사회경제사적 추론으로 접근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인구는 몇 명이었을까. 왜란이 끝난 뒤 60년 후인 1657년(효종 8년)에 실시된 호구조사에서 조선인구는 229만 83만명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세대가 서너 번 바뀌는 동안에도 인구가 고작 230만명에 불과하다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인구 또한 230만명 내외라고 볼 수 있다. 1657년의 인구가 230만명이라면 그로부터 60~70년전인 1580년대와 1590년대의 인구는 인구통계적으로 계산하면 180~190만 정도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인구 태반이 손실되었다고 계산해서 그 회복기간을 2세대로 보고 3세대에서 4세대가 지나면 전쟁 전의 인구를 능가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인구를 1657년 호구조사와 같은 230만명을 본다.”
그런데 페어뱅크, 라이샤워, 크레이그 등 미국의 1세대 동양사학자들은 ‘동아시아, 현대적 전환’이라는 책에서 1590년대 일본의 인구는 3천200만명이고 조선의 인구는 500만명 이하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정부 세입보다 많은 군병 식량은 불가능
송 교수의 연구는 이어진다. “조선의 인구를 230만명으로 추산하고, 거기서 10만명의 군병을 빼낼 수 있겠느냐? 230만명 중 반은 여자이고 나머지 115만명에서 군병이 될 수 있는 연령층 20~30대는 전체인구의 16% 정도인 18만명. 이를 인구 400만명에 대입해도 30만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인구들은 핵심 생산계층이어서 병역에만 종사할 수 없다. 그리고 나라에서 이들을 먹이고 재울 수 있겠는가.”
“당시 생산가능한 총토지 면적은 170만 결(1결은 평균 600~800평)이고 1결 당 평균 생산량을 3석으로 잡으면 총곡물생산량은 500만석을 넘어서지 못한다. 여기서 국가의 세입은 결당 평균 4두로 해서 60만석이 전부다. 이 60만석으로 정부를 운영하고 관리의 녹봉을 주고 군대를 길러야 한다. 임진왜란 내내 명군과 조선군의 군량 공급에 매진했던 류성룡이 쓴 <진사록>에 의하면 군병 1만명의 한 달 식량은 6천400석이다. 1년이면 7만6천800석이고 10만명이면 연 최소한 76만석이 있어야 한다.”
정부 세입보다 더 많으니 어불성설이란 주장이다. 송복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결말을 맺고 있다.
율곡이 만일 그때 나라의 사정을 알고 시무(時務)를 아는 학자며 정치인이라면 결코 10만 양병론을 거론할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율곡의 제자들이 비문과 연보에 그렇게 썼던 것을 선조수정실록에 그대로 베껴놓은 사람들은 류성룡을 격하하기 위한 술책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율곡은 서인의 영수이고 류성룡은 동인에서 분파된 남인이라는 정치색이 끼어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10만양병설에 관한 기록
‘10만양병설’은 선조수정실록 1582년 9월 1일자에 실려 있다.
“율곡 이이(李珥)가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預養十萬兵)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以備前頭不虞之變)’라고 말하자 류성룡(柳成龍)이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를 키우는 것(養兵所以養禍)’이라며 매우 강력히 반박했다(論辨甚力). 그 후 이이는 항상 (동인인) 류성룡은 재주와 기개가 참으로 특출하지만 (서인인) 우리와는 일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야 반드시 그 재주를 펼 수 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임진년(1592)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 관련 일을 맡은 류성룡은 늘 ‘이이는 선견지명이 있고 충성스럽고 부지런한 의지가 있었으니 그가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오늘날에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만양병설, <율곡행장>에 첫 기록
광해군 집권 당시 북인들이 선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서인인 이이(李珥), 성혼(成渾), 박순(朴淳), 정철(鄭澈) 등을 고의로 헐뜯어 놓았다고 판단한 서인들은 1643년 선조수정실록이라는 기록을 새로 만들었다. 10만양병설이 처음 나타나는 곳은 율곡의 문집이 아니라 그의 문인(門人)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1597년에 쓴 <율곡행장(行狀)>이다. 그래서 선조수정실록의 10만양병 부분은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의 기록을 베껴서 옮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조실록 2월 10일자 기사에 따르면 “조정은 죄를 지어 유배 중인 장수들을 풀어주어 반란 지역으로 파견할 것, 경상도 바닷가 지역의 쌀을 육로나 해로로 경성으로 보내 군량미로 쓰도록 할 것, 군량미를 운반하는 데 필요하면 종친과 대신들의 소와 말을 내놓게 할 것” 등 방비책을 세웠다.
역사에 남은 전쟁의 기록
여진족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2만 기의 니탕개 일당은 종성을 포위하여 군관 등을 죽였고 특히 5월 16일에는 반란군의 세가 3만 기나 되었다. 7월 9일에도 니탕개 등이 2만여 기를 이끌고 와 방원보를 포위해 접전이 벌어졌다. 그해 7월 초 선조는 “하삼도(下三道,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일원에 있는 절의 종을 거두어 총통(銃筒)을 만들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듬해인 1584년 4월에는 전라도 쌀 5천 석과 경상도 쌀 4천 석이 북방 국경 지역으로 전달되기도 했다.
1587년 북방은 계속 소란스러웠다. 8월에 오랑캐 100여 기가 운룡 지역을 침탈해 백성들과 가축을 끌고 갔는데, 이를 추격하던 우리 군사들이 다수 피살되었다. 9월에도 1천여 기가 혜산진을 공격해 왔다. 그 달 하순에는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는데, 나미응개가 이끄는 침략군을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 이순신(李舜臣)이 제대로 막지 못해 군사 10여 명이 피살되고 160명이 납치되었다. 이 일로 한때 이순신은 처음으로 파직되고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이순신은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녹둔도를 지킬 군사를 더 보충해달라고 했지만 이일은 듣지 않았고 패전의 책임을 이경록과 이순신에게 돌렸다.
조선군의 반격이 있었다. 1588년 1월 1일 북병사 이일(李鎰)은 우후(虞候) 김우추(金遇秋)에게 군사 400명을 주어 적의 소굴 추도를 급습하게 하여 33명의 여진인 목을 베고, 따로 2천여 기를 녹둔도에 쳐들어 왔던 자들의 거주지인 시전부락에 보내 380여 명의 여진인을 죽였다. 또 1월 중순에도 시전부락에 대한 소탕전은 이어졌다.
2월 오랑캐들이 혜산을 침입하여 조선 군관 등을 살상하였고, 6월에는 누란도에 적선 20척이 쳐들어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6월 20일에는 남병사 신립(申砬)이 적들의 고미포 부락을 공격하여 20여 명을 죽였다.
율곡은 율곡 전서의 ‘육조계(六條啓)’와 ‘군정책(軍政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583년 3월 병조판서 이이는 그의 상소 육조계에서 “조그만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해도 온 나라가 놀라서 흔들리니, 만약 큰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막을 계책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지적하고 큰 전쟁이 발발하면 “반드시 패하고 말 것.”이라고 한탄했다.
율곡의 선조에 대한 직언 기록
율곡은 <동호문답>과 <만언봉사> 등을 써서 선조에게 대쪽같이 직언했다. 병조 판서 때는 국방 부문에서 개선해야 할 점을 정리한 시무 6조도 올렸다. 시무 6조의 내용은 첫째로 어질고 재능 있는 인재를 뽑을 것, 둘째로 군사와 백성을 기르고 돌볼 것, 셋째로 부족한 재물을 채울 것, 넷째로 국경과 병영을 튼튼하게 할 것, 다섯째로 전쟁용 말을 갖출 것, 여섯째로 올바른 가르침으로 이끌 것 등이다. 이때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씩의 군사를 길러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개혁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동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뒤 158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8년 후 임진년 1592년 4월 13일 왜의 15만 대군이 부산포에 상륙을 시작해 미증유의 전란이 발발했다.
율곡은 니탕개의 반란 이전에 선조에게 제출된 것으로 보이는 군정책에서 “조선은 바다에 접한 땅이기 때문에 왜구가 날뛰어 불시에 출현하니, 어찌 전쟁을 잊은 채 군사 준비를 넉넉하게 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방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다에 접한 3면보다 더 급한 곳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북방 여진족과 남해안 왜구, 즉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침략을 걱정하는 이이의 충정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200년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진시폐소(陳時弊疏)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육조계(六條啓)
“부부일심지대하(桴腐日深之大厦), 기국비국(其國非國)이라”
즉 “나라가 나날이 썩어가는 큰 집의 대들보와 같으니, 이건 정말 나라도 아니다.”라는 사자후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우국충정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서인이니 동인이니 북인이니 남인이니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정치색이 끼어들면 한 인물의 공정한 평가는 반드시 훼손되기 마련이다.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이란 단어를 꼭 짚어서 말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조선의 국방력 약화를 비통해 했고 군사력의 증강을 역설했다는 점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지으려 한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신(神)이 있다.’
독일 실증사학자 랑케(Ranke 1795~1886)의 말대로 한 인물의 평가는 현재의 시각이 아니라, 그 시대의 특수성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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