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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장군 묘역. ⓒ김동철

     

충남 아산 현충사 부근 어라산 기슭 음봉면 장군의 유택(幽宅)이 열렸다. 2015년 4월 28일 장군은 470번째 생일을 맞아 환생(還生)했다. 육신의 껍질을 벗어둔 채 영혼(靈魂)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장군을 세상으로 이끌어낸 것은 한 줄기 빛이었다. 그 빛은 아마도 ‘누란(累卵)’의 시대가 요청한 것인지도 모른다.

장군은 무엇보다 눈부시게 밝은 햇빛이 좋았다. 묘역 주변 소나무 군락은 솔향기를 뿜었고, 지지배배 지저귀는 종다리가 찬찬히 보였다. 갓 피어난 녹음(綠陰) 방초에 반사된 햇살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아주 오랫동안 어두컴컴하고 냉기 서린 음택(陰宅)에서 나온 장군의 표정은 환했다. 기지개를 한껏 폈다.

“아 상쾌하다. 이게 얼마 만인고.”

예미도중(曳尾塗中)이라 했다.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며 살아도 죽은 후의 편안함보다 좋다는 말이다. 정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나은 것일까.

417년 전, 1598년 11월 19일 장군은 임진왜란 최후의 격전(激戰)인 노량해전에서 왜적이 쏜 조총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전방급(戰方急) 신물언아사(愼勿言我死).”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

장군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 전투를 독려하던 북채가 들려있었고 붉은 피가 치솟아 가슴팍을 흥건히 적셨다. 그러나 장군은 죽지 않았다. 다만 홀연히 사라졌다 다시 환생(還生)한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에게는 경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광화문에서 환생한 이순신 장군

유택 주변에서 갑자기 소용돌이 바람이 일었다. 소나무와 녹음방초가 흔들렸고 순간 아주 굵고 밝은 빛줄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어떤 위성의 긴 꼬리를 닮은 모양새였다. 빛줄기는 인근 현충사와 생가, 가족 묘역 그리고 활터 등지를 한 바퀴 휘익 돌고는 북쪽으로 치솟아 올랐다.

장군이 도착한 곳은 한성 육조거리 광화문 동상이었다. 이제부터 여기가 그의 거주지가 될 터이다. 장군은 오른손에 장검을 굳게 쥔 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섰다.

장검의 한쪽 날에는 ‘삼척서천산하동색(三尺誓天山河動色)’, 다른 쪽에는 ‘일휘소탕혈염산하(一揮掃蕩血染山河)’라고 쓰여 있었다. ‘세척 길이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도 빛이 변하도다’ ‘크게 한 번 휩쓰니 피로써 산과 강을 물들인다’는 뜻이다. 장군은 이 글을 직접 지어 좌우명처럼 곁에 두고 늘 자신을 갈고 닦았다. 그 칼은 1592년 4월 14일 왜적 20만 대군이 부산포에 기습 상륙한 이후 나라를 지키는 보검(寶劍)이 되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광화문 광장에선 매미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땡볕 아스팔트 복사열에 찌는 삼복더위로 동상은 후끈 달아올랐다. 동상 바로 아래에는 노란 리본이 여전히 나부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맹골수도(猛骨水道)는 맹수처럼 거칠고 사납다는 이름처럼 조류가 가장 빠르고 위험한 곳이다. 그런데 과적(過積)의 부실한 배를 띄우고 미숙한 어린 선장이 키를 잡았으니 사고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돈에 눈먼 악덕 해운업자와 부실을 눈감아준 관(官)피아의 협작품으로 무비유환(無備有患)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을 강조했던 이순신 장군은 누구였던가. 1597년 9월 16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진도 울돌목에서 명량(鳴梁)해전을 치러 누구보다도 그 지역 물길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좁은 수로, 빠른 물살, 골바람과 암초 등 지형과 지세가 위험한 천험(天險)의 수로를 천혜(天惠)의 기회로 이용해 천행(天幸)을 얻은 전략가였다.

더욱이 장군은 그해 7월 원균(元均)의 칠천량 패전으로 완전히 궤멸된 수군을 가까스로 재건해서 조선수군 판옥선(板屋船) 13척으로 일본수군 아타케부네(安宅船)와 세키부네(關船) 등 133척과 맞붙어 31척을 분멸시켰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수적 열세를 뛰어넘은 사투 끝에 승리를 쟁취했다.

명량대첩은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기적의 승리로 기록된다. 이후 남해 제해권이 확보되자 왜(倭) 수군은 발이 묶여 남해 곳곳의 왜성에 머물면서 서해 진출의 꿈을 포기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도 이순신 수군과의 해전 금지령을 내렸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

7년 전쟁 왜적과 해전을 벌여 23전 23승이라는 유례없는 전과(戰果)를 올린 불세출의 명장은 영국의 넬슨 제독, 일본의 도고(東鄕) 제독과 함께 세계 해군 사상 3대 명장으로 꼽힌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의 신(神)’ 도고 제독은 “나를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이순신과 비교하는 것은 당치않다”면서 “그는 90% 열세한 전력으로 명량에서 기적을 이룬 조선의 명장이다”라고 추켜세웠다.

이제 장군은 경복궁, 아니 대한민국을 지키는 광화문 수문장으로 환생(還生)했다. 장군의 시야에는 여러 언론사에서 운영하는 뉴스 전광판들이 있었다. 피할 수 없는 햇볕처럼 쏟아지는 갖가지 뉴스들은 장군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장군은 그런 덕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때론 나라를 지키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충신으로, 때론 부정부패와 불의(不義)를 감시하는 시대의 파수꾼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나라의 안위(安危)를 위해 24시간 불철주야 불침번(不寢番)을 서는 장군에게 유일한 휴식은 추억 여행이었다. 그 옛날 북로남왜(北虜南倭)를 맞아 함경도 변방과 남해바다에서 벌인 수많은 전투를 하나씩 복기(復棋)해보는 게 유일한 낙(樂)이었다. 또 백의종군 ‘눈물의 천리길’도 빼놓을 수 없었다. 온갖 애증(愛憎)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절절이 묻어나는 지난 일들은 이제 달빛 젖은 신화(神話)와 빛바랜 전설(傳說)이 되었다.

 

뉴스전광판 보는 이순신(크기변환)

광화문의 수문장으로 환생한 이순신 장군. ⓒ김동철

 

65년 만에 한반도에 전쟁이?

그런데 그때 갑자기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군은 장검을 번쩍 들어 앞에 보이는 전광판을 가리켰다.

“북한 전군 준전시상태 돌입! 8월 22일 오후 5시까지 확성기 끄지 않으면 조준 격파하겠다.”

선전포고였다. 전쟁이 난다면 1950년 북한의 남침(南侵) 이후 65년 만의 대재앙이 될 터였다. 칼을 쥔 장군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지난 8월 4일 북한의 DMZ 목함지뢰 도발로 우리 측 수색대 하사 2명이 다리와 발목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우리 군은 보복차원에서 대북 심리전 방송을 시작했다. ‘북한 최고 존엄’의 실정(失政)을 비판하고 국내외 주요뉴스, K-팝과 가요, 북한 날씨 등을 실어 보냈다. 하지만 체제붕괴를 두려워하는 ‘어둠의 폭군(暴君)’은 자신의 아킬레스건(腱)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 심한 경기(驚氣)를 일으켰다. 확성기를 격파하면 도발 원점과 지원세력 및 지휘세력을 초토화시킨다는 우리 군의 결연한 의지표명으로 긴장은 시시각각 높아갔다. ‘마주보고 달려오는 기관차’와 같은 치킨게임이었다.

마침 한반도 전역에서는 한·미간 연례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합훈련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에 맞불을 놓으려는 듯 동해에서는 중·러 연합해상훈련이 펼쳐졌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미 국무부는 “북한은 도발을 즉각 중지할 것 그리고 한미연합 방위체계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는 한미동맹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도발 원인을 간과한 채 “남북한 양측 모두 자제하라”는 뜨뜻미지근한 양비론(兩非論)을 펼쳤다. 의외로(?) 일본은 “미국, 한국과 뜻을 같이 한다”고 발표했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길은 명확해졌다. 경중안미(經中安美) 추구다. 즉 경제는 교역량이 많은 중국과 손잡고 안보는 미국,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에서 뜬금없이 8월 22일 오후 6시 판문점에서 회담을 열자는 긴급제안을 해왔다. 수세에 몰리자 일단 발등의 급한 불을 끄고 보자는 얄팍한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이었다. 회담은 첫날에 이어 3일째 철야 마라톤 회의로 진행되었다.

결국 북한은 25일 새벽에 끝난 회담에서 ‘남측 지역에서 일어난 지뢰 폭발 사고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고 우리는 ‘일단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는 것’으로 답했다. 아쉬운 점이 있지만 대화국면 유도와 앞으로 현안 타개의 물꼬를 텄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박 대통령의 단호한 대북 억제 의지 천명과 막강한 한미연합 전력, 제대를 앞둔 우리 장병들의 복무연기 러시, 상습적인 도발의 고리를 끊고야 말겠다는 정치권 입장 표명과 국민들의 한 목소리, 종북세력을 이용한 이남제남(以南制南) 전략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북한의 확인 등이 작용한 결과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와중에 남남(南南)갈등을 유발시킬 만한 발언도 나왔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SNS를 통해 “북한의 연천 포격소리, 주민들은 못 들었다”고 했고, 허영일 새정치연합 부대변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위원장께서도 어려운 결정을 하셨다”며 “두 분 다 존경한다”고 밝혔다. ‘적장(敵將)을 존경한다?’는 말에 여론은 들끓었고 그는 부대변인직에서 사퇴했다.

 

여전히 내우외환(內憂外患)이로다

우리는 앞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승리를 쟁취했던 이순신 장군의 ‘선승구전(先勝求戰) 전략’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즉 승기(勝機)를 먼저 잡은 뒤 싸움에 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전략이다. 이번에 적의 전술을 똑똑히 보았다. 북한 잠수함, 특수전 게릴라, 공기부양정 등 비대칭무기를 활용하는 성동격서(聲東激西) 전술과 화전양면(和戰兩面)의 전략을 모두 읽었다.

남북고위급회담의 주역인 김관진 안보실장은 국방장관 시절 자신의 집무실에 김정은과 황병서의 사진을 붙여놓고 늘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아! 그래서 그가 두 정권을 넘나들며 국가안보를 책임진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번에 우리는 대북 확성기가 천군만마(千軍萬馬) 위력을 가진 ‘신형 핵무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수상 처칠은 “평화는 공포의 자식”이라고 말했다. “암, 동서고금을 통해 힘이 없으면 당하는 거야. 이번에 전역까지 미룬 젊은 군인들, 너무나 기특하기만 하다.”

한반도 하늘에 어두운 먹구름이 심하게 낀 날 또 하나의 뉴스가 장군을 놀라게 했다. “한명숙 의원 뇌물수수 혐의로 수감.” 그녀는 ‘청렴 순결’의 상징인 백합꽃 배지를 달고 다니던 첫 여성 국무총리였다.

장군은 칼을 쥔 오른손에 힘을 주면서 대성일갈(大聲一喝)했다.

“오호 통재(痛哉)라. 여전히 내우외환(內憂外患)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