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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김동철

롯데일가, 형제의 난

우리는 최근 어느 재벌가의 막장 드라마를 지켜봤다. 막대한 자본을 놓고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 게임을 보는 것은 참 흥미진진하다. 사생결단의 총력전과 방어전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 드라마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패권(覇權)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가칭 ‘신씨가(辛氏家) 이전투구(泥田鬪狗)’ 출연자 가운데 주연급은 서너 명 정도다. 93세 창업자 아버지, 가업 승계자인 60대 초반 두 아들 그리고 일본인 어머니다. 한국과 일본 롯데를 각각 대표하는 두 아들의 기싸움이 벌어지고 차남(한국 롯데 회장 신동빈)은 아버지를 총괄회장직에서 해고했다. 그는 또 형과 싸움을 벌여 부자(父子), 형제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연출했다.

롯데그룹 창업자인 93세의 신격호 총괄회장은 재일동포다. 일본식 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 이름에 ‘무사(武士)’ 냄새를 풍기는 다케오(武雄)가 들어있다. 19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껌, 과자, 초콜릿 등 제과사업을 일으켜 패전(敗戰)의 쓰디쓴 고배(苦杯)를 마신 일본 국민들에게 달콤한 간식거리를 제공했다.

1970년대 초, 외자(外資) 한 푼이 아쉬웠던 가난한 조국(祖國)에 1억4500만 달러를 들여 서울 소공동에 롯데호텔을 지었다. 당시 석유파동으로 공사비가 애초의 3배 이상 들었다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와 맞먹는 거액이었다. 그래서 한때 기업보국(企業報國)을 실천한 ‘애국 기업가’로 칭송받았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93세의 노인이 된 신 총괄회장은 일본 롯데의 장남과 한국 롯데의 둘째 아들이 개입된 재산권다툼 삼파전(三巴戰)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가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에 따라 탐욕(貪慾)의 막장 드라마는 끝나게 되었다. 둘째 신동빈 롯데 회장이 8월 17일 일본 롯데홀딩스 임시주총에서 승리함으로써 경영권 분쟁은 일단락됐다. 장남 편으로 비쳐졌던 신격호 회장은 일본 주총에 가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고령에 건강 상 이유였다. 하지만 언제 또다시 2차 법정다툼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 매출 83조원이란 천문학적 숫자로 한국 재계 5위 그룹을 거머쥐고 있는 신 씨 가문은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비정한 속설을 ‘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로 증명했다. 물론 이전에 삼성가(家)와 효성그룹에서 창업주 자녀들이 ‘OK목장의 결투’를 벌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란 이후 일본의 운세를 가른 세키가하라 전투

롯데 다툼이 한창일 때 뜬금없이 ‘세키가하라 전투’ 이야기가 나왔다. ‘앞으로 세키가하라(關原) 전투가 될 것’이라는 한국 롯데 측 인사의 말이 모 신문 1면 톱으로 장식됐다. 한국 롯데 신동빈 회장을 지지하는 사장단 모임과 계열사 노조위원장들의 ‘충성 맹세’가 연이어 보도되자 정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를 과시하는 모양새로 비쳐졌다.

“그런데 가만, 세키가하라 전투라? 도요토미(豊臣)와 도쿠가와(德川)의 싸움이 아니었던가?” 이순신 장군은 잠시 눈을 감은 뒤 곰곰 생각에 잠겼다.

1598년 임진왜란-정유재란(일본은 ‘분로쿠-게이초노에키(文祿-慶長の役)’라고 부른다)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0년 10월 21일, 일본 중부 기후현에서 일본의 미래를 결정할 최대의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東軍)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지휘하는 7만 명이 동원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심복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서군(西軍)에는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휘하의 8만 병사가 집결했다. 천하통일을 놓고 벌인 일대 대격돌이었다.

잠시 여기서 임진왜란 7년 동안 조선을 분탕질치고 노략질하면서 반목과 시기, 질투를 일삼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서로 다른 동서로 갈라져 싸웠다는 것은 흥미롭다. 결국 패한 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군인 가토 기요마사 앞에 목을 내놓아야 했다.

1598년 8월 18일 임진왜란의 원흉(元兇)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죽으면서 일곱 살짜리 어린 아들(도요토미 히데요리)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남겼다. 절대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를 채우기 위한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전국 통일의 대권을 차지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가(家)에 대를 이은 충성을 하려는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는 숙명(宿命)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가 대세를 가름했다. 서군은 더 유리한 위치와 전략적 우위에 있었음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회유당한 고바야키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내부 모반(謀反)으로 결국 반나절의 전투에서 동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는 1582년 6월 전국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가신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배신으로 자결하면서 끝내 통일을 놓친 전례를 떠올리게 한다. 도요토미가(家) 역시 내부 모반에 의해 멸문(滅門)을 당한 셈이기 때문이다. 적이 한 배를 타고 있을 수 있다는 주중적국(舟中敵國)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천하통일을 이루고 에도(江戶, 도쿄)에 부케정권(武家政權)을 수립해서 186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까지 260여 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 임진왜란 때 내부 단속을 이유로 조선에 출병하지 않은 그는 조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1607년(선조 40년) 일본의 요청으로 재개된 통신사는 광해군과 인조에 걸친 3회의 통신사에 한해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고 불렀다. 즉 이들 통신사의 활동은 임진왜란 직후 일본과의 종전(終戰)을 위한 강화와 수호체결(선조 40년), 도쿠가와 정권의 오사카(大阪) 평정축하(광해군 9년), 습직(襲職)축하(인조 2년)를 내세우고 있지만 주로 조선 피로인(被虜人, 포로) 쇄환이 목적이었다.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말로 무한(無限) 인내심을 발휘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생사(生死)를 가르는 전장에서 한평생 살았던 사무라이 무사(武士)였다. 그는 천하를 평정한 통치자답게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철학을 폈고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 이중에는 롯데의 ‘시게미쓰 다케오가(家)’ 사람들이 들어봐야 할 말도 있는 것 같다.

“천하(天下)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다. 천하는 천하의 천하다.”
“무슨 일이든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굳이 세상에 불만 가질 일이 없다.”
“인생에서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 그래야 인간이 성숙해진다.”
“풀잎 위에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리운 애국애민의 리더십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신격호 회장이 주총에 불참함으로써 일단 ‘롯데 형제의 난’에서는 한국 롯데의 신동빈 회장이 승리했다. 그런데 국민들 사이에서 “롯데가 일본 기업 아니냐?”는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한국 롯데그룹 총매출액의 20분의 1을 소유한 일본 롯데가 전체 그룹을 지배하는 비정상적인 구조가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공분(公憤)을 산 것이다. 이에 따라 롯데 불매운동까지 일어났으니 국민들의 의혹을 잠재울 어떤 조치가 필요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막장 드라마로 국민들 억장을 무너지게 한다.” “처음처럼 소주 안 마시기, 롯데마트-롯데백화점-롯데시네마-롯데면세점 안 가기 등 불매운동을 벌어야 한다.” “세금은 제대로 냈나?” “장남은 한국말 못하고 차남은 어눌하고, 아버지는 큰아들과의 대화에서 시종 일본어로 말했다.”

어린 시절 ‘껌이라면 롯데, 롯데껌!’ CF를 보고 껌을 질겅질겅 씹던 중장년 소비자들의 반란기미도 심상치 않았다.

내년에 완공되는 123층 잠실 제2롯데월드는 높이가 555m로 잠실벌에 우뚝 솟은 산 같다. 마침 5㎞ 정도 떨어진 곳에 공군 성남기지(서울공항)가 있다. 국방부와 공군은 외딴 산 같은 초고층 건물이 들어서면 유사 시나 악천후, 기체결함 등 비상 시 군용기 이착륙 등 전술 운용에 어려움이 있다며 줄곧 반대를 해왔다. 그런데 14년 동안 질질 끌던 건설 허가가 MB정권 때 일사천리로 끝났다. 서울공항의 부(副) 활주로를 3도 틀어 다시 만들기로 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진 것이다. 반대하던 공군참모총장은 경질됐고 권력층이 개입했다는 둥 뒷말이 무성했다. 이쯤 되면 93세 신 총괄회장의 숙원(宿願)사업은 이뤄졌을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은 영공방위의 안보를 크게 양보한 모양새다. 정부가 재벌에 굴복했다는 소리까지 나왔는데, 재벌은 우리 사회에 사회공헌을 확대하는 등 이렇다 할 반대급부조차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짠 급여와 납품업체들에게 갑질을 한다는 어두운 기업 이미지만 남겼다.

 

군의 전술 운용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제2롯데월드가 건설 중이다. ©김동철

‘30대 그룹 1분기 말 사내유보금 710조… 1년 새 38조 증가, 삼성-현대車 30조 넘게 증가’ 전광판에 비친 뉴스다. 재벌의 사내유보금은 매년 증가되는데 소비자인 국민들에게, 기업이 성장하는 데 혜택을 준 정부에게는 참으로 야박한 편이다.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는 꾼들의 논리다. 이번에 막장 드라마를 연출했던 롯데그룹은 사내유보금이 44조307억원으로 1년 새 1조2949억원(3.0%)이 늘었다.

경제가 바닥을 치고 20대 100만 명 이상이 백수인 ‘이태백’ 시대다. 게다가 고령화를 맞는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 712만여 명은 인생 2막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오나가나 돈타령에 ‘목구멍이 포도청’인 서민경제 범죄가 끊이질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 기업들은 정작 제대로 된 일자리 숫자는 얼마 되지도 않는 계획을 내놓으며 “몇 만 명 일자리를 만들겠다”느니 “사상 최대의 고용이다”라고 자랑하지만 눈 가리고 아옹일 뿐이다.

일찍이 맹자가 말했다.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다.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 돈 나올 구멍이 없으면 사람 구실하기 어렵고 결국 막장으로 치닫는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피난민을 위해 둔전(屯田)을 경영했고, 수확의 반을 백성이 가져다 먹도록 했다.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가난을 목마구민(牧馬救民)의 애민정신으로 풀어나갔다. 물론 작은 규모였지만 장군은 경세가(經世家)였다.

골목상권 침해, 갑(甲)질 하는 대기업 횡포를 바로 잡겠다던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정부의 대선 공약이었다. 그래서 이번 국감 때 롯데가 어떤 답을 내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9월 17일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증인으로 나왔다. 한 여당 의원이 질문했다. “한국과 일본이 축구 시합을 하면 한국을 응원하느냐?”는 질문에 “지금도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는 당연한(?) 답변이 나왔다. 다른 야당 의원은 롯데 골프장 공사와 관련한 지역구 민원성 질문을 던졌다.

롯데의 미로(迷路)같은 지배구조와 순환출자 고리 등 본질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한데, 변죽만 울리거나 딴전 피우는 질문이었다. 국감 전 단단히 벼르던 국회의원들의 태도는 돌변했고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거대자본 논리 앞에서 ‘고개 숙인 국감’이라는 말을 들어도 싸게 생겼다.